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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58)화 (58/177)

58화

남학교에서 장기자랑으로 여장하기.

이 상황을 최대한 안정시키기 위해 내가 생각해 낸 최선의 선택이었다.

과연 내 발언은 회장 안을 완전히 들쑤셨다.

“그래, 처음부터 할 거 없으면 여장이나 하라고 했잖아!”

“이번 기수 애들 좀 놀 줄 아네!”

선배 학생들은 흥미로운 볼거리가 생겼다며 희희낙락거렸다.

그러나 반면 같은 신입생들은 경악했다.

“진짜 여장한다는 미친놈이 있어! 저 새끼 돌았나 봐!”

“쟤 첫날부터 저러면 남은 5년 아카데미 생활 어떻게 하려고!”

“나 같으면 그냥 자퇴한다!”

그중에는 데클란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주시하고 있는 데클란의 입이 멍하니 벌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크나큰 충격에 빠진 모습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했다.

분명히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 인페르나 남작이 데클란이 보는 앞에서 내게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던가.

‘너희가 가는 아카데미는 남학교란다.’

‘네가 여자라는 사실은 들키지 마렴. 들키면 퇴학이란다.’

그런데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남작님은 내게 분명히 여자라는 걸 들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분명히 그랬을 텐데.

“여기 가발. 그리고 구두도 같이 가져가라.”

“드레스는 여기 있어. 무대 용이라서 후크가 없으니까 그냥 대충 걸치면 돼.”

나를 무대 뒤로 데리고 간 준비팀이 내게 가발과 여자 옷을 내밀었다.

‘남작님, 죄송해요…….’

나는 속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준비팀이 내게 내민 것들을 받아들였다.

“시간 많이 없으니까 빨리 갈아입어, 알겠지?”

“어차피 웃기자고 하는 거니까 너무 공들이지 말고. 다 갈아입었으면 무대 위로 바로 이동해.”

준비팀의 학생들이 히죽 웃으며 나를 탈의실로 밀어 넣었다.

“…….”

나는 영혼 없는 눈으로 내 손에 들려진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프릴과 레이스가 덕지덕지 달린 병아리색의 드레스였다.

장미처럼 생긴 장신구가 허리춤에 달려 있고, 그 위로 크리스털 장식이 촘촘하게 늘어져있었다.

확실히 예쁜 드레스였다.

그래서 더 슬펐다.

내가 언젠가 로판에 빙의하는 날이 오면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이 설마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줄이야…….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실망감을 떨쳐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언제 또 이런 드레스를 입어 보겠어?’

물론 남학교의 무대 준비실에 이렇게 여자 가발과 여자 옷이 항시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조금 무서웠지만…… 그건 신경 쓰지 않도록 하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나는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여기까지 와서 드레스를 입지 않겠다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아마 장난기가 돈 선배들이 강제로 드레스를 입히려고 할 테다.

그러다가 여자인 걸 들킬지도 몰랐다.

‘그냥 대충 무대 위에 올라가서 쓱 한 번 지나가고 다시 내려와야지…….’

드레스를 대충 걸쳐 입은 나는 가발을 머리 위에 썼다.

참고로 가발도 참 개떡같이 밝은 분홍색이었다.

“…….”

그러니까 이런 게 도대체 왜 남학교에 있는 거냐고.

대충 ‘여장’을 마친 나는 탈의실의 문을 덜컥 열었다.

‘그냥 안줏거리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스스로를 가라앉힌 나는 천천히 무대 위로 올랐다.

내 인기척을 느낀 사회자가 크게 선포했다.

“자, 여러분! 기다리고 기다리던 엔리 군의 여장입…… 헉!”

사회자가 멘트를 하다 말고 엿장수 가위처럼 끄트머리를 싹둑 잘라먹고 말았다.

뭐야? 프로답지 못하게?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꽉 쥔 나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원하시는 대로 여장했습니다만?”

또각, 또각.

사회자 옆으로 걸어간 나는 무대 아래의 학생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나를 향하는 시선에 섞인 이질감을 느낀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면서 나는 반사적으로 인파들 중에서 데클란을 찾았다.

“……!”

데클란은 다른 신입생들 사이에 뒤섞인 채 마찬가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고장 난 호두까기 인형처럼 떡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선지 그의 귓가가 붉게 익어있었다.

뭐야, 쟤 왜 저래?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데클란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분홍색 가발이 내 어깨를 쓱 스치며 찰랑거렸다.

그와 동시에 탄성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귀, 귀여워……! 분홍색 솜사탕 같아!”

“너무 잘 어울리잖아! 요정인가 봐!”

어?

나는 두 눈을 금붕어처럼 끔뻑거렸다.

이건 또 무슨 반응이야?

어째선지 회장 안의 학생들은 전부 유령에게 홀린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눈동자의 초점이 흔들리고 있었다.

군데군데에서 찬탄사가 흘러나왔다.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고급진 퀄러티의 분장을……!”

“와, 장난 아니다. 진짜 여자 같아.”

진짜 여자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여자다, 이 머저리들아.

아무래도 남탕에서만 놀던 이 남학생들이 내 분장을 꽤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다.

‘……왠지 기분이 좀 나쁜데.’

나 원래 여자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사회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이제 그만 내려가도 돼요?”

“아, 네, 네에! 그전에, 한 가지 더 있는데요……!”

다른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나를 보고 있던 사회자가 허둥지둥 허리를 폈다.

“사실 엔리 군이 여장을 준비하러 내려갔을 때, 한 학생이 검술 대결에 도전했습니다!”

“네?”

내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아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런 나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무대 끝자락에 삐딱하게 서있던 한 학생이 천천히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엔리 군, 보아하니 검술 실력에 꽤 자신 있는 것 같은데.”

쿵, 쿵.

우락부락한 몸집의 남학생이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딱 봐도 나보다 다섯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청소년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졸업반인 선배 같았다.

‘세상에…….’

남학생의 모습을 본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육으로 장식된 건장한 학생이었다. 특히 당장 교복 바지가 찢어질 것만 같이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도 검술에 자부심이 강하거든.”

쿵, 쿵.

그가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대가 진동하듯 울렸다.

꿀꺽.

압도적인 피지컬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신입생이 나한테 한 수 가르쳐주지 않으련?”

쿵.

내 앞에 멈춰선 선배 학생이 나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엔리 군, 5학년인 안제카 선배님이 당신에게 검술 대결을 신청했습니다!”

사회자가 뒤에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참고로 안제카 선배님은 검술로 유명한 에글리시 백작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학생입니다! 저희 아카데미의 평민 학생들 사이로 ‘검술의 귀공자’라고 불리지요!”

이 자식들, 저런 오글거리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외치다니……!

원래 능력의 강력함은 호칭의 오글거림과 반비례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 안제카라는 놈은 아무래도 보통 실력자가 아닌 모양이다.

내 앞에 선 안제카라는 학생을 올려다보자, 등 뒤로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도와줘, 데클란!’

나는 데클란을 향해 SOS 구조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데클란은 태평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게 나를 우러러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저렇게 날 보고 있는 거야?

‘설마 내가 진짜 이 사람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와 동시에 데클란이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내밀었다.

아무래도 녀석은 내게 큰 기대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젠장.

지금 심정을 묘사하자면, 한 마디로 후회막심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검을 쓸 줄 안다고 말한 걸까.

이건 완전히 ‘헬로우 하우 얼 유’ 정도 할 줄 아는 주제에 ‘나 영어 할 줄 알아’라고 허풍 치던 사람이 원어민을 만난 꼴이잖아.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지시에 준비팀이 바로 올라와 나와 안제카의 손에 검을 한 자루씩 쥐여주었다.

검의 차가운 촉감이 손바닥 위로 스며들었다.

‘어라?’

검이 왜 이렇게 묵직하고 차갑지……?

그들이 준비해 준 검은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었다.

나는 그대로 기겁했다.

“자, 잠깐만요. 저는 진짜 검으로 싸워본 적 없는데요!”

내가 사회자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사실이었다. 나는 여태껏 목검으로만 훈련을 해왔다.

인페르나 남작이 나와 데클란에게 검술을 가리킬 때 분명히 말했다. 만일 기본 체력과 기초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무조건 진검을 휘두른다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는 검술을 배운 지 일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진짜 검은 만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외침을 들은 안제카가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뭐야, 검술에 자신이 있다더니, 겨우 목검으로 훈련하는 수준이었나? 시종에게 진검 한 자루 못 쥐여주다니, 인페르나 남작가의 수준을 알법하군.”

“그 입 닥치세요! 목검도 검이거든요! 니 주둥이도 일단 열린 입으로 쳐주는 것처럼 말이지요!”

졸지에 인페르나 남작을 모욕하는 말에 울컥 화가 난 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안제카의 인상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려는 휴지처럼 꽉 구겨졌다.

“뭐라고? 내 어머니가 물려주신 두터운 매력을 가진 내 입술을 모욕하다니, 이 비겁한 자식!”

그 말과 함께 안제카가 검집에서 검을 뽑고 내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은 또 왜 이렇게 급발진이야!’

당황한 나는 검을 뽑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캉!

안제카가 내려찍은 검 날이 내 검집에 박혔다.

역시 근육질로 뒤덮인 몸이라 그런지 누르는 악력이 상당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그 날을 막아섰다.

“오오!”

“세상에!”

검과 검 사이에 울려 퍼지는 전율에 관중석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애초에 드레스랑 굽 높은 구두 착용한 애한테 검술 대결 거는 게 말이 되냐고! 왜 아무도 이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 거야!

휙!

나는 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안제카의 검을 밀어냈다.

일단 뒤로 물러선 뒤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한 가지 변수가 일어났다.

끼익!

“헉!”

순간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구두의 굽이 무대 바닥에 난 틈에 걸린 것이다.

‘아, 안 돼!’

그대로 중심을 잃은 나는 거하게 휘청거렸다.

설상가상 바닥 위로 질질 끌리는 드레스가 발밑에 닿았다.

실크로 만들어진 드레스의 재질 때문에 나는 완전히 앞으로 미끄러졌다.

바로 앞에 얼어붙은 안제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가 앞으로 돌진할 줄은 꿈에도 그리지 못한 모양이다.

‘너, 넘어진다!’

나는 손에 들린 검을 놓지 않기 위해 손목에 힘을 잔뜩 주었다.

쓰러질 때도 절대 검을 놓지 말라는 인페르나 남작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콰쾅!

무대 위로 격파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컥……!”

안제카의 입에서 고통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엥?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윽고 내 두 눈동자가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앞에 안제카가 무릎을 꿇은 채 있었다.

그의 이마의 정중앙에는 내 검집이 박혀 있었다.

어찌나 세차게 내리쳐진 일격인지 녀석의 이마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졌다…….”

주르륵.

안제카가 코피를 흘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회장 안이 다시 한번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말도 안 돼!”

“신입생이 검술의 귀공자를 쓰러뜨렸어……!”

어, 이게 아닌데.

드레스 자락을 급히 잡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검을 내던졌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이건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학생들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우리 학교의 새로운 검술 천재가 나타났다!”

“엔리라는 이 자식, 오늘 신고식 아주 제대로 했어!”

“오직 검집으로 안제카를 쓰러트리다니! 고작 안제카 녀석 따위로 진검 따윈 쓸 필요 없다 이거지?”

그날 이후, 내게 별명 하나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검술의 솜사탕 요정이다!”

“안제카 선배를 단칼에 기절시킨 솜사탕 요정!”

“이번 기수 신입생 중 최강의 검술 실력을 자랑하는 솜사탕 요정!”

……자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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