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엥?
환하게 웃으며 데클란을 우러러보던 나는 순간 굳어버렸다.
데클란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하하, 데클란 군…… 지금 뭐라고요?”
“마차 바퀴를 잘 그린다고 했습니다.”
“아아, 마차 바퀴……. 아, 네, 마차 바퀴……! 아주 중요하지요!”
사회자는 애써 싸늘해지는 장내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분위기에 심폐소생술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대 밑에서 장기자랑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던 학생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사회자를 바라보았다.
이 신입생에게는 도대체 뭘 가져다줘야 하는 건가.
“어…… 그러면! 신입생 데클란 군의 마차 바퀴 데생 퍼포먼스가 있겠습니다! 바로 당장 종이와 펜 준비해 주시지요!”
사회자가 억지로 들뜬 목소리를 자아내며 관중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신입생을 위해 박수를 쳐달라는 신호였다.
“…….”
침묵.
관중석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그저 멍하니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보다 못한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도 내 새끼를 칭찬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나선다.
“잘한다, 데클란! 대단해! 난 마차 바퀴 그릴 줄 아는 남자가 제일 멋지더라!”
의자를 거의 넘어뜨릴 기세로 일어난 내가 짝짝짝! 물개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에 얼어 있던 신입생들 몇몇이 눈치 빠르게 갈채 소리에 합류했다.
짝짝, 짝, 짝짝짝…….
거대한 회장 안에 드문드문 어설픈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데클란 앞에 커다란 흰 종이와 잉크 펜 하나가 대령했다.
센스 좋은 준비팀 중 한 명이 어디선가 캔버스 스탠드를 가지고 와서 종이를 수직으로 고정했다.
“…….”
펜을 받은 데클란은 종이 앞에 섰다.
그의 뒷모습은 진중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반쯤 얼이 빠진 관중들은 가만히 데클란의 손에 들린 펜에 온 시선을 집중했다.
과연 그는 어떠한 바퀴를 그릴 것인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데클란은 과감히 손을 들어 올렸다.
사각, 사각.
펜촉이 종이 위를 횡단하며 작은 소음을 흩뿌렸다. 그와 동시에 펜촉이 닿은 자리에 굵은 잉크 자국이 스며들었다.
“저, 저 자식!”
“진짜로 마차 바퀴를 그리고 있어……!”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가만히 데클란을 관찰하던 신입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마차 바퀴 그린다는 애가 마차 바퀴를 그려야지, 그럼 뭘 그려?’
그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관중들이 무엇이라 지껄이든 데클란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쥔 펜으로 꿋꿋이 바퀴 그림을 이어갔다.
나는 데클란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그의 방에 갔을 때 스케치북을 하나 본 적 있었다. 그때 그제야 나는 데클란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굳이 데클란에게 그림을 보여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데클란은 단 한 번도 내게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렇게 썩 잘 그리는 건 아닌 모양이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일부러 데클란의 스케치북을 본체만체했다.
그런데 설마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을 줄이야.
‘데클란……!’
왜 네가 나한테 한 번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아!
한편, 데클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은 서로 삼삼오오 모여 데클란에 대해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름이 데클란이었나? 쟤 뭐하던 애야? 설마, 마차 관리하던 하인인 건가?”
“아니면 마차 기술자의 견습생이었을지도 몰라!”
아냐. 니네들 다 틀렸어.
쟨 그냥 마차 오타쿠야.
“다 그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클란이 펜을 내렸다.
종이 위에는 총 네 개의 바퀴 그림이 남겨져 있었다.
“…….”
학생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퀴 그림을 주시했다.
만일 어정쩡한 실력으로 그렸더라면 빈정거리며 놀려먹었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마치 마차 바퀴 설계도처럼 정교하고 진짜 같이 보였으니까.
“어…… 일단 개인기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데클란 군.”
사회자가 흠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왜 같은 바퀴를 네 번이나 그린 거죠?”
“같은 바퀴가 아닙니다.”
데클란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고했다.
사회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요? 어떻게 다른 거죠?”
“이건 시속 5km로 달리는 마차 바퀴.”
데클란이 가장 왼쪽 가에 그려진 바퀴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건 시속 10km로 달리는 바퀴.”
데클란의 손이 그 옆에 그려진 바퀴로 옮겨졌다.
“이 밑은 시속 15km,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우측 하단에 있는 건 시속 20km로 달리는 바퀴입니다.”
“다 똑같은 거 아니에요?”
사회자가 얼굴 위로 큰 물음표를 달며 물었다.
그러자 데클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닙니다.”
그렇게 답한 그는 당장이라도 ‘이래서 초짜들은……’ 이라고 외칠 법한 얼굴로 진지하게 고했다.
“자세히 보세요. 다 다릅니다.”
“도대체 뭐가 다른 거죠?”
“속도에 인해 바큇살의 잔영이 조금씩 다르게 보입니다. 그로 인해 역마차 바퀴 현상이 일어나지요.”
“역마차 바퀴 현상이요? 그게 뭔가요?”
“마차 바퀴를 오래 보고 있으면 일어나는 착시현상입니다. 바큇살이 달린 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지요.”
사회자의 질문에 데클란이 착실하게 답했다.
“아하, 네에……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상 신입생 데클란 군의 발표였습니다.”
사회자가 퀭한 표정을 지으며 억지웃음을 쥐어 짜냈다.
짝짝짝…….
데클란은 어설픈 갈채 소리를 받으며 유유히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를 향하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은 모두 하나같았다.
‘저 녀석은 뭐 하는 놈일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멋진데…….’
“왜 검을 잘 쓴다고 말하지 않은 거야?”
데클란이 제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솔직히 나는 조금 기대했다. 만인의 앞에서 뛰어난 검술 실력을 선보이는 데클란의 멋진 모습을.
흔치 않은 기회였다.
마을 사람이나 인페르나 남작가의 사람이 아닌, 생판 모르는 외부인에게 검술 실력을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런 기회를 마차 바퀴 그리는 데 날려버리다니.
답답함으로 인해 속으로 끙끙 거리고 있는데, 데클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굳이 말해야 하나?”
“물론 그럴 필요는 없지만…… 넌 검술에 능하잖아? 개인기라면 자기가 제일 잘하는 걸 보여주는 게 당연한 건데!”
그러자 데클란으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반문이 되돌아왔다.
“그렇지만…… 검술은 네가 나보다 더 잘하잖아.”
어?
데클란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지?
“뭔 소리야, 데클란. 내가 어떻게 너보다 검술을 잘…….”
“다음 순서는 인페르나 남작 가문의 시종인 엔리 군입니다!”
사회자가 우렁차게 내 가명을 불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데클란과의 대화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데클란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대 위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생각했다.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데클란이 나보다 더 검을 잘 휘둘렀다.
물론 인페르나 남작가의 사람들은 데클란의 검술 실력을 칭찬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검술 1위는 단연 인페르나 남작이었으니까.
게다가 인페르나 남작은 워낙 칭찬이 궁색한 사람이었다. 내 기억상 그녀는 단 한 번도 데클란의 검술을 칭찬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남작님은 가끔 나만 칭찬해주시곤 했었지…….’
어째선지 인페르나 남작은 데클란보다 나를 더 유독 많이 챙겨주시곤 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건지는 몰랐지만, 일단 칭찬받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는데…….
‘헉, 설마!’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설마…… 데클란은 나나 로지에 외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 검술에 대해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자기 검술 실력이 얼마나 출중한지 모르고 있는 건가?
‘그런 몹쓸 착각을 하고 있다니!’
무대 위로 올라간 내 어깨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데클란이 꼭 깨닫도록 해야 했다.
너는 사실 이 세계관에서 가장 검을 잘 쓰는 검술 천재가 될 거란 말이야!
‘벌써부터 기가 죽으면 어떡해!’
안 되겠다.
공익을 위해 우리 데클란이 얼마나 검을 잘 휘두르는지 온 세계에 알려야겠어!
두 주먹을 꽉 쥔 나는 사회자 앞에 당당히 섰다.
“조금 전 데클란 군에 이어 인페르나 남작령에서 온 다른 신입생이군요! 자, 엔리 군은 어떤 개인기를 보여줄 건가요?”
“검술이요.”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내가 불쑥 내뱉었다.
“조금 전 올라온 데클란 군과 함께 1:1 대결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관중석이 아주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서로 웅성웅성 사담을 하고 있던 이들이 모두 입을 싹 다물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들의 시선은 무대 위에 선 내게 꽂혀있었다.
졸지에 과녁이 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예상치 못한 침착한 분위기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나는 곧 왜 관중들의 반응이 이렇게 싸하게 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뭐야, 쟤? 다른 애랑 검술 시합을 하겠다고?”
“치사하게 같은 영지에서 온 녀석이랑 짜고 치는 거 아냐?”
“치졸한 자식. 기사도 따윈 고향에 두고 왔나?”
학생들의 신랄한 비웃음이 무대 위로 슬금슬금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실수를 범했는지 깨달았다.
상대를 지목해서 검술 대결을 하겠다는 게 화근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의심할만하네.’
본래 검술 대결이란 한 사람이 도전자를 무작위로 받는 것이다.
만일 도전자를 지목하면 뒤에서 짜고 치는 판일지도 모르는 데다가,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을 일부러 골랐다는 의혹을 사게 될 수 있다.
‘이런, 실수했다.’
하는 혀를 차며 관중석을 쓱 둘러보았다.
삽시간에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영하 30도로 얼어버렸다.
곧이어 기분이 상한 학생들이 나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검술 대결을 하려면 정정당당하게 다른 상대를 받아라!”
“자신 없으면 다른 장기자랑이나 보여줘!”
“아니면 그냥 여장이나 하라고!”
이제야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이 회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무대 위에 서서 삼백여 명의 학생들의 눈초리를 받는 건 그다지 마음이 편한 일이 아니었다.
‘음, 아무래도 검술 대결은 물 건너갔군.’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사회자를 흘끔 바라보았다.
사회자 역시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자, 여러분! 저희 신입생이 잘 몰라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선배 되는 입장에서 너그러이 봐주시길……”
“봐주긴 뭘 봐줘!”
“기사도의 기본도 모르는 녀석이 무슨 아카데미에 입학했어!”
“나 때는 저런 후배 나오면 그 기수가 전부 밤새면서 기사도 달달 외웠어!”
사회자의 발언에 회장 안이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이에 사회자는 쩔쩔매며 내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눈길을 던졌다.
괜히 내 경솔한 발언에 사회자가 뭇매를 맞게 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안 되겠다. 상황을 수습하자.
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하는 수 없이 질러버렸다.
“그럼 저는 그냥…… 여장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