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물론 나는 일평생 남자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남자들끼리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당장 마을에 사는 남자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보통 남자아이들을 놀면서 서로 껴안거나 만지는 등 신체적 접촉을 잘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급히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외쳤다.
“저,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냥 친구! 친구랍니다!”
“…….”
나와 데클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차갑게 식었다.
아무래도 내가 괜한 말을 덧붙인 모양이다.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바보 멍청이…….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걸.’
대놓고 변명을 늘어놓으니 더 수상하게 보였을 게 분명하다.
‘이러다가 내가 여자라는 거 들키는 거 아니야?’
아직 정식으로 개강도 안 했는데, 안 돼!
속으로 무성의 비명을 지른 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앞으로 데클란과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장 내일 있을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 * *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신입생 환영회에서 데클란과 거리를 두려는 시도는 아주 장렬하게 실패했다.
왜냐하면 신입생 환영회에서 나와 데클란은 나란히 같이 앉게 되었으니까.
‘출신 지역으로 자리 배치하는 건 도대체 어느 문화권에서 나온 발상인 건데!’
데클란의 옆에 앉은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간 데클란과 너무 편하게 지냈던 게 화근이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나도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잡거나 볼을 만지작거리고, 혹은 어깨동무를 하며 끌어안곤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짓을 했다간 불필요한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남색가로 오인 받을까봐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는 게 싫었다.
그렇게 되면 내 일거수일투족에 세세한 시선에 따라붙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각당할 확률이 더 늘어났다.
‘그냥 가만히 쭈그려 앉아 있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내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데클란은 이런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평민 출신의 신입생들이 모두 자리에 모였다.
대충 눈으로 인원수를 훑어보니 50여명 쯤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학생의 규모가 작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또 마냥 그런 건 아니었다.
‘하긴, 귀족 자제분들 따라 딸려온 아이들인데. 숫자가 적을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땡땡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시끌시끌하던 회장 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다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환영회의 사회를 맡은 학생이 회장의 무대 위로 올라섰다.
“왕국 아카데미 중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히는 오스첸스 남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와아아—!
신입생들 사이로 흥분의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나름 자신이 이 아카데미의 학생이라고 자부심을 품는 모양이다.
와아아…….
반면 나는 영혼 없이 박수를 짝짝 쳤다.
젠장. 남학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들으니까 정말 충격적이다.
“이로써 여러분은 저희 오스첸스 남학교에 32기 신입생이 되었습니다.”
사회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 뒤로는 올해로 5년 차이신 27기부터, 작년에 입학하신 31기 선배님들이 계십니다.”
나와 데클란은 다른 신입생들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신입생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 뒤로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남학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보다 한 두어 살 더 어려 보이는 아이부터, 족히 열여덟 살은 되어 보이는 청소년까지.
입학 나이에 제한이 없다 보니 나이가 다른 학생들끼리 뒤섞여 앉아 있었다.
그 뒤로 아카데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와, 앞으로 이 아카데미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 등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나는 턱을 괸 채 원목 테이블의 나이테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본 데클란이 내게 속삭이듯 물었다.
“너 뭐해, 사샤?”
“나이테 세고 있는데.”
“재밌겠다. 같이 하자.”
“그래.”
그렇게 나는 데클란과 함께 나이테를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막 100개까지 숫자를 셌을 때였다.
“……이로써 인사말을 마칩니다. 자, 다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무대 위에서 열정적인 사회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신입생 환영회의 하이라이트! 신입생들의 개인기 퍼포먼스가 있겠습니다!”
뭐?
사회자의 말에 나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개인기라고?
“뭐야, 초대장이랑 같이 날아온 안내문에는 그런 말 없었잖아?”
내 말에 데클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장기자랑이 있는 건 몰랐는데…….”
주변에 둘러보니 다른 신입생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고 있는 것이 다들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반면 뒤쪽에 앉아 있는 재학생들의 입가에는 씩 미소가 감겨있었다.
특히나 2학년들, 그러니까 작년에 새로 입학한 학생들이 제일 신이 나 보였다.
“큭큭, 우리만 당할 수 없지.”
“작년에 아무런 준비 없이 개인기를 선보여야 했던 우리의 당혹감을 너희도 똑같이 경험해 봐라!”
아무래도 작년에는 저분들이 이 서프라이즈 이벤트에 당한 모양이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신입생들은 어버버, 하며 하나둘씩 무대 위로 불려 나갔다.
당황망조한 신입생들을 보면서 선배 학생들은 열렬한 박수와 함성을 더해주었다.
“신참들 파이팅!”
“우리를 즐겁게 해줘!”
그렇게 즉석으로 개인기 창출이 시작되었다.
순서는 학생들이 현재 섬기고 있거나 후원받고 있는 귀족 가문의 이름 알파벳 순서대로 결정되었다.
아베라(Abera)라는 자작 가문의 시종인 신입생이 재수 없게도 가장 먼저 무대 위로 끌려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아이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이벤트가 있는 줄도 몰랐으니, 빈손으로 왔을 수밖에.
무대 위에 선 아이는 긴장감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 그럼 가장 먼저 무대 위로 올라오게 된 우리의 첫 번째 신입생! 이름이 뭐죠?”
사회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크, 크레스입니다!”
“좋아효, 크레스 군. 오늘은 어떤 개인기로 선배들을 기쁘게 해드릴 건가요?”
잠시 고민하던 크레스는 이내 두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저, 저는 리코더를 잘 붑니다!”
“우우, 재미없다!”
“식상하다! 나가라!”
“차라리 여장이나 해라!”
무대 아래에 선배 학생들이 와와 소리를 질렀다.
불쌍한 크레스는 당장이라도 엉엉 울며 집으로 뛰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런 크레스를 사회자가 웃으며 다독였다.
“그럼 지금 당장 리코더를 가지고 오도록 하죠.”
사회자의 지시에 무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리코더를 가지고 왔다.
크레스는 훌쩍거리면서 리코더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 와중에도 짓궂은 선배들이 우우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리코더의 음색이 들려오자 입을 싹 다물고 말았다.
크레스가 쥔 리코더에서 천상의 음계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
회장이 순식간에 잠잠히 가라앉았다.
신선한 충격에 관중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단언컨대 크레스라는 신입생의 입에서 나온 리코더는 내가 알던 리코더 연주가 아니었다.
후후 침 섞인 바람을 불며 삑 사리가 뒤섞인 그런 초급자용 연주가 아니었다.
완벽한 강약 조절, 부드러운 멜로디의 호흡, 그리고 오차 하나 없는 템포의 흐름이 뒤섞여 심금을 울리는 음악을 창조시켰다.
나를 비롯한 회장의 모든 사람들은 넋을 잃고 음악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수십 초가 지난 뒤 크레스가 리코더를 입에서 뗐다.
열기로 달아오른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크레스는 리코더를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관중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의 아버지의 사촌의 조카의 남편의 삼촌의 동네 친구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한 곡 올려드렸습니다.”
뭐야, 모르는 사람 생각하면서 연주한 거잖아?
그러나 선배들은 그런 자질구레한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리코더로 저런 고급스러운 음색을 자아내다니……!”
“마음을 움직이는 명연주! 나의 영혼이 소울과 만난 기분이었어! 내 심장과 하트가 다 공명하며 울었다!”
그렇게 신고식을 마친 첫 타자가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다음 순서로 올라온 신입생은 비슷하게 긴장한 목소리로 고했다.
“저는 차를 잘 따릅니다.”
그러자 아까와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번 기수 신입생들 왜 이렇게 다 빠져 가지고 재미가 없냐!”
“차 따르는 건 영애들 티파티에 가서나 하라고! 여기 남학교야!”
“할 거 없으면 여장이나 해라!”
그러나 뒤이어 차를 잘 따른다는 신입생이 정말로 차를 잘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자, 선배들은 열광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사람들은 그냥 초반에 기선 제압으로 야유부터 던지는구나.
자리에 앉은 나는 데클란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제 곧 우리 순서가 다가왔다.
“데클란 넌 뭐할 거야?”
“내가 제일 잘 하는 거.”
데클란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데클란이 제일 잘 하는 것이라…….
‘역시 검술 실력을 뽐낼 계획인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데클란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내가 키운 아들이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탄 것처럼 느껴졌다.
‘다들 우리 데클란의 뛰어난 검술 실력을 똑똑히 보라고!’
그렇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데클란의 차례를 기다렸다.
나와 데클란이나 둘 다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온 학생이었지만, 데클란의 이름 알파벳이 나보다 먼저였다.
하여 데클란이 먼저 호명되었다.
‘데클란, 파이팅!’
나는 남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며 데클란을 응원했다.
그런 나를 본 데클란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대 위로 올라간 데클란에게 사회자가 물었다.
“반갑습니다, 데클란 군! 어떤 개인기를 준비했나요?”
“저는…….”
데클란은 가슴을 당당히 펴며 관중들을 쭉 훑어보았다.
두근두근.
나는 데클란이 ‘제 검술 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기다리며 두 손을 꼭 모았다.
이제 만인이 데클란의 출중한 검술을 확인할 차례였다.
그리고 오스첸스 남학교는 훗날 왕실 호위가 될 멋진 데클란의 화려한 데뷔를 첫 목격한 영광을 누리게 될—
“저는 마차 바퀴를 잘 그립니다.”
데클란의 입에서 그런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