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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55)화 (55/177)

55화

풀썩.

갑작스럽게 임해오는 고통에 데클란은 그대로 힘을 잃고 땅바닥 위에 쓰러졌다.

가슴 안에 거대한 쇳덩이가 박힌 것처럼 아파왔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헉, 헉…….”

데클란은 숨을 몰아쉬며 제 심장 위를 꽉 붙잡았다.

뭐지?

난생처음 겪어보는 현상이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뒤끓는 것 같았다. 마치 살아있는 어떤 것이 제멋대로 피가 흐르는 모든 곳을 헤집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이, 인페르나 남작가로 어서 가야 해……!’

상황의 심각함을 직감한 데클란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다리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말을 묶어놓은 나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어서……!’

현기증 때문에 앞에 검게 물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데클란은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붙들었다.

이대로 쓰러져선 안 됐다.

사샤가 저택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침 일찍 가서 만나겠다고 어젯밤에 약속했는데…….

머리가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쿵쿵 날뛰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말고삐를 풀던 데클란은 다시 한번 휘청거렸다.

그 과정에서 실수로 말의 얼굴을 내리치고 말았다.

—히이잉!

마른 하늘의 벼락처럼 얻어맞은 말이 놀라 그 자리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데클란은 급히 말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중심을 잃은 데클란은 그대로 말의 앞으로 쓰러졌다.

갑자기 날아드는 주인 때문에 질겁한 말이 그 자리에서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퍽!

말의 앞다리에 채인 데클란은 그대로 멀리 날아 떨어졌다.

—안 돼.

안 돼, 사샤가 저택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데…….

데클란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땅에 닿기 전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헉!”

데클란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두 눈을 떴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해가 벌써 머리 위에 떠올라 있었다.

땅 위에 쓰러져있던 데클란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쿨럭, 쿨럭!”

입안에 제멋대로 들어간 흙먼지와 나뭇가지 조각을 내뱉은 데클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멍한 표정의 데클란은 여전히 숲 근처에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새로운 발자국이 없었다. 케쉬키를 비롯한 아이들이 떠난 이후 그 누구도 이곳에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누른 데클란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무거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신을 잃기 전과 다르게 몸이 괴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몸 안을 폭주하듯 휘젓고 있던 그 이상한 기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말이 묶여있는 나무를 향해 걸어간 데클란이 조심스럽게 줄을 풀며 생각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살아 있는 것이 자신 안에서 날뛰는 것 같다—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외에 달리 형언할 수 없었다.

“아.”

말 위에 올라탄 데클란은 자신의 얼굴이 따끔따끔한 것을 느꼈다.

손등으로 아픈 부분을 쓱 닦으니 피가 묻어났다.

“…….”

말에 걷어차인 뒤 땅에 나뒹굴며 얼굴이 온갖 상처가 난 모양이다.

‘……사샤한테 절대 얘기 안 해.’

사샤는 항상 데클란에게 승마 실력이 뛰어나다며 찬사했다. 그리고 데클란은 그녀의 칭찬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사샤에게 인정받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사샤에게.

그러니 사샤에게 절대로 말을 잘 다루지 못해 걷어차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얼굴이 왜 이러냐고 물으면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야지.’

속으로 얕은 한숨을 내쉰 데클란은 자신의 짐 가방 안에서 로브를 꺼내 들었다.

로브를 몸에 걸친 데클란은 그대로 후드를 눌러쓰고 얼굴을 가렸다.

그는 그대로 인페르나 남작가로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남작가의 문을 지키고 있던 파수꾼들은 데클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파수꾼들은 왜 그가 후드를 덮어쓰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데클란은 이 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쯧쯧, 아마 어머니와 헤어지는 게 괴로워서 울고 왔던 모양이네…….”

“눈이 퉁퉁 부어서 우리에게 보여주기 싫은가 보다.”

데클란을 안으로 보낸 파수꾼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렸다.

그들은 데클란이 후드를 덮고 있어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다들 알아서 오해를 해 줘서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한 데클란은 사샤의 방으로 곧장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샤가 방으로 돌아왔다.

“사…….”

반가움이 가득 찬 목소리로 사샤를 부르려던 데클란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샤가 지금 자신의 얼굴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파수꾼들이 오해한 것처럼 어머니와 이별하는 것이 슬퍼서 엉엉 울다가 두 눈이 부었다고 말해버릴까.

그렇지만 사샤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는 잘 몰랐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한 치의 거짓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며 고민하던 사이, 사샤가 먼저 데클란을 발견했다.

“데클란! 너였구나!”

그 뒤로 사샤는 기어코 자신의 후드를 벗겼다.

그리고 상처를 본 사샤는 기겁하며 데클란을 추궁했다.

“이거, 누가 그랬어?”

갑자기 몸에 이상 반응이 와서 말에 차인 거라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사샤가 더 걱정하게 될 테니까.

그래서 데클란은 불필요한 내용은 싹 삭제하고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오다가 말에서 떨어졌어.”

그러나 사샤는 데클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사샤는 케쉬키를 비롯한 마을 아이들이 데클란을 때렸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내가 이제 걔네보다 더 센데, 가만히 맞을 리가 없잖아…….’

데클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말을 덧붙였다간 불필요한 오해만 더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내 몸이 갑자기 이상하게 된 건…… 정말 뭐지?’

혹시 병에 걸린 건 아닐까.

딘 선생님에게 물어볼까. 그분은 의사니까 이런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에 정말 병이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아카데미로 갔다가 다시 쫓겨나게 될 텐데.

인페르나 남작이 ‘아픈 녀석에게 학비를 지원하기 싫다’라며 자신을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으면 어쩌지?

‘일단 나 혼자서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자.’

전전긍긍해진 데클란은 결국 완전히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다.

‘만일 나중에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진다면, 그때 정말 의사를 찾아가야지.’

* * *

이윽고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다.

나와 데클란은 짐 가방을 들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인페르나 남작과 로지에가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넌 왜 음침하게 후드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는 거냐?”

데클란을 본 남작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

데클란은 후드를 더 꾹 눌러 내렸다.

그는 자신의 다친 얼굴을 남작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 나라도 보여주고 싶지 않겠다.

그런 데클란을 가만히 살펴보던 남작에게 집사가 슬쩍 귀띔해 주었다.

“아마 간밤에 어머니와 이별하느라 많이 울었을 겁니다.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그 말에 남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혀를 찼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 떠날 때 웃으면서 떠나야 할 것을…….”

남작은 나와 데클란을 향해 터벅터벅 다가왔다.

“사샤, 데클란.”

남작의 부름에 우리는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라.”

“네!”

“그리고 너희가 그 누구도 아닌 인페르나 남작가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마라.”

“네!”

나와 데클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남작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샤.”

“네, 남작님.”

인페르나 남작은 나를 격려하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참고로 너희가 가는 아카데미는 남학교란다.”

“……네?”

“그러니까 가서 네가 여자라는 사실은 들키지 마렴. 들키면 퇴학이란다.”

“잠깐만요, 남작님!”

그런 중요한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려주면 어떡해요!

나는 당장 남작에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남작은 내 대답은 듣지 않고 그대로 휙 등을 돌렸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정말…… 뭐든지 본격적이구나.

* * *

[엄마, 아빠.

잘 지내고 계시지요? 사샤에요.

아니지, 이제는 사샤가 아니라 엔리겠네요.

여하튼.

저와 로지에 도련님, 그리고 데클란은 아카데미에 잘 도착했어요.

아카데미에는 온갖 지역에서 모인 귀족 자제분들과 그들의 시종들이 모여 있어요.

어제 데클란과 저는 아카데미 중앙에 있는 분수대에 가만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어요.

그렇게 한참 동안 아카데미 안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내일은 아카데미 신입생들 환영회가 있어요.

저처럼 시종 자격으로 온 학생이나 데클란처럼 귀족의 후원을 받고 온 평민들만 모이는 자리라고 하네요.

로지에 도련님은 귀족 자제들이 모인 파티에 따로 초대받았어요.

로지에 도련님이 저와 데클란과 같이 파티에 가지 못해서 조금 섭섭해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저희에게는 평민들의 세계가, 그리고 로지에 도련님에게는 귀족들의 세계가 있는 거잖아요.

내일 환영회 때 맛있는 음식이 많이 나오면 좋겠네요.

그럼 짧게 쓰도록 할게요.

인페르나 영지에서 잘 지내세요.

엄마 아빠의 장녀……였지만, 이제는 장남이 된 엔리가.]

‘아무리 남장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렇지, 아들이라고 말하니까 뭔가 참 이상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펜촉으로 온점을 콕, 찍고 있을 때였다.

“뭐 하고 있어, 사샤 양?”

“아이코, 깜짝이야.”

갑자기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내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예상한 대로 로지에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부모님께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나도 마침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야 하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좋아요. 데클란도 같이 부를까요?”

“사샤 양이 원한다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의자 뒤에 걸쳐둔 겉옷을 챙겨 입었다.

나는 현재 로지에와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룸메이트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했다.

로지에에게 배정된 방은 내가 전에 살던 집의 크기와 비슷했다. 방이 아니라 작은 오두막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듯 했다.

거실, 욕실, 발코니, 그리고 침실이 딸린 이 방의 제일 구석에 손님용 방과 화장실이 하나 더 있었다.

침대와 책상, 옷장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작은 방이었다. 그리고 방 옆에는 작은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시종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아침에 눈 뜨고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제 주인 곁에서 시중을 들어야 하는 시종들에게 딱 맞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데클란은 다른 평민들이 모여 사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나와 떨어지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툴툴거렸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데클란이 사는 기숙사는 내가 상상한 기숙사와 매우 흡사했다.

네 명이 같이 한방을 쓰는 구조였고, 같은 층에 사는 학생들이 같이 쓰는 공용 욕실과 팬트리가 있었다.

편지를 보내기 위해 우체국으로 갈 준비를 마친 나와 로지에는 데클란을 찾기 위해 평민 기숙사를 향해 갔다.

나는 기숙사 관리인에게 데클란의 방 번호와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잠시 뒤 호출을 받은 데클란이 나왔다.

“데클란!”

반가운 마음에 나는 데클란을 향해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사…… 가 아니라, 엔리.”

데클란은 얼떨떨한 얼굴로 내 가명을 읊었다.

“로지에 도련님이랑 나랑 지금 편지 보내러 갈 건데, 너도 같이 오지 않을래?”

그러면서 나는 데클란에게 종알종알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뒤에서 흠흠,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뒤를 돌아보니 로지에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나와 데클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사, 아니. 엔리 군.”

로지에가 무안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로 반가운 마음은 알겠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운 거 아닐까?”

아.

그제야 나는 너무 평소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깜빡했다. 여긴 남학교였지!

허둥지둥 데클란에게서 물러나자, 그제야 주변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나와 데클란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 침묵 속에 잠긴 특유의 시선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아니, 잠깐만.

이 사람들,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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