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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54)화 (54/177)

54화

케쉬키의 말에 데클란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지금 이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데클란이 반응을 보이자, 케쉬키는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왜? 사실이잖아? 사샤가 남작님 저택에서 지낸다며? 도련님이 사샤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지?”

“그만해.”

줄곧 침묵을 고사하던 데클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에 케쉬키는 더더욱 재미가 들었는지 입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나불거렸다.

“불쌍해라. 유일한 친구를 도련님에게 뺏기다니. 너 이제 놀 사람 없어서 어떡해?”

“입 다물어.”

“하긴, 내가 사샤라도 너 같은 거지보다는 돈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남작가 저택에 지내면서 도련님이랑 놀겠다. 사샤가 너 따위가 뭐가 좋다고 그동안 감싸고 다녔는지 몰라.”

“입 닥쳐, 케쉬키.”

데클란의 이가 절로 아드득 갈렸다.

그의 주먹은 이미 꽉 쥐어져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케쉬키를 향해 달려들 것처럼 보였다.

그 험악한 인상에 다른 마을 아이들도 슬슬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데클란을 약 올리기에 급급했던 케쉬키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데클란 너 사샤한테 버림당한 거야. 사샤가 진짜 네 친구인 줄 알았어? 걘 그냥 네가 불쌍해서 잠깐 놀아준 거라고.”

케쉬키는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섞으며 데클란을 향해 이죽거렸다.

데클란의 신경을 긁으며 도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실제로 케쉬키는 예전부터 데클란을 언젠가 한 번 밟고 뒤집어버리려고 벼르던 중이었다.

‘그동안 사샤 옆에서 빌붙고 있었던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마침 잘 됐다.’

케쉬키는 데클란이 싫었다.

데클란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아이.

아빠도 없이 자라난 불우한 아이.

왜소하고 작은 체구에 볼품없는 아이.

데클란을 볼 때마다 ‘저런 것’과 같은 마을에 산다는 생각에 케쉬키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그는 데클란을 볼 때마다 일부러 시비를 걸며 그를 툭툭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힘이 약한 데클란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데클란은 동네 아이들에게 아무리 심하게 괴롭힘을 당해도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케쉬키는 그 뒤로 수시로 데클란을 괴롭혔다.

데클란을 향한 케쉬키의 악감정이 악화한 건 사샤가 이 마을에 오게 된 이후였다.

사샤는 케쉬키에게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생긴 것도 예쁘장한데다가, 또 이 마을에서 가장 큰 마차를 가진 옥수수 농장 집 딸이다.

게다가 동네 아이들은 전부 다 활발하고 밝은 사샤를 좋아했다.

케쉬키는 그런 사샤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면 다른 동네 아이들이 자신을 더 우러러볼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케쉬키는 줄곧 사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사샤는 케쉬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샤는 자기보다 어리고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케쉬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샤 걘 쓸데없이 앞뒤가 꽉 막힌 애라니까.’

얼굴만 예쁘게 생겼지, 알고 보니 머리는 텅 빈 호두알처럼 멍청한 계집이었다.

이 마을에서 힘이 가장 센 자신에게 빌붙으면 즐겁게 놀면서 지낼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고생을 사서 하는 건지.

화가 난 케쉬키는 자신을 따르는 마을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들, 전부 다 사샤랑 놀지 마! 걔랑 놀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케쉬키는 마을 아이들을 조종해 사샤를 의도적으로 따돌리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사샤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겠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애쓰는 척하며 사샤를 용서해주고 친구 하자고 말해야지. 그러면 다른 아이들도 내가 얼마나 마음이 넓고 멋진 아이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사샤를 친구로 얻을 수도 있고, 또 동네 아이들 앞에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그러나 일은 케쉬키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사샤는 오히려 케쉬키에게 보란 듯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렸다. 케쉬키를 따르지 않는 몇몇 소수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쉬키를 화나게 만든 것은 사샤가 데클란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재수 없어.’

사샤를 보며 미소를 짓는 데클란을 볼 때마다 케쉬키는 창자가 꼬였다.

‘왜 나는 안 되고 쟤는 되는 건데?’

데클란 따위가 뭐라고.

그 자식이 도대체 뭐길래.

그 자식은 뭐가 얼마나 잘났기에 사샤의 관심을 전부 다 가져가 버리는 거지?

그리고 이제 그 자식은 사샤와 함께 아카데미로 간단다.

평민으로 태어나서 평생 꿈도 꾸지 못할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케쉬키는 자신의 앞에 선 데클란을 흘겨보았다.

“사샤 걔도 머리가 좀 이상한 것 같아. 하다 하다 너 같은 거지새끼랑 같이 다니…….”

케쉬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우연 중에 마주친 데클란의 눈동자가 선선했다.

당장 불똥이라도 튈 것 같이 살기가 어린 눈빛이었다.

‘뭐, 뭐야?’

케쉬키는 식겁했다.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데클란의 시선이 너무나도 예리했다.

순간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고작 눈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야.”

데클란이 케쉬키의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우, 우리 얘기하는 거야?”

“왜, 왜, 왜 그래, 데클란?”

케쉬키의 등을 방패 삼아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다른 아이들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어, 어어? 얘네들 왜 다 쫄고 있어?’

그제야 케쉬키는 자신을 따르는 아이들이 전부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선지 다른 아이들은 데클란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니네들 다 꺼져.”

데클란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전부 다, 지금 당장.”

그 말이 떨어지자 마을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케쉬키가 말릴 틈도 없었다.

“야, 야아! 니네들 어디 가!”

놀란 케쉬키가 아이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들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그대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결국 자리에 남은 건 데클란과 케쉬키 단둘이었다.

“…….”

데클란은 아무런 말도 없이 케쉬키를 흘끔 쳐다보았다.

“뭐, 뭘 봐?”

갑작스럽게 급변한 상황에 당황한 케쉬키의 목소리가 갈라져 튀어나왔다.

그러나 데클란은 아무런 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말을 근처에 있는 나무로 이끌었다.

말고삐를 나무에 묶어 고정한 데클란은 케쉬키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노려보며 다가오는 데클란을 보자, 케쉬키는 급기야 기분이 섬뜩해졌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안 그러면 너, 너…… 너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보던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데클란이 케쉬키를 향해 걸어갔다.

성큼, 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그 발걸음엔 일말의 유예도 없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너 먼저 죽일 거야.”

어째선지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 이 자식이……!”

케쉬키는 이를 악물며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쉬키는 길가의 나무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네까짓 게 뭔데! 에잇, 더러운 거지 사생아 자식이!”

나무 때문에 등 뒤가 막힌 케쉬키가 데클란을 향해 꼴사납게 소리쳤다.

케쉬키 바로 앞에 선 데클란은 아무런 말 없이 그를 사납게 내려다보았다.

싸늘한 한기가 데클란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잠깐만. 데클란이, 날 내려다본다고?’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케쉬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자식은 키가 언제 이렇게 큰 거지?’

그제야 케쉬키는 데클란이 자신이 기억하던 비실비실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데클란은 이미 케쉬키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다. 게다가 체구도 제법 불어나 있었다.

데클란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쉽게 얕잡아볼 수 있는 약골이 아니었다.

‘젠장.’

케쉬키는 먼저 떠나버린 마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멍청한 새끼들! 아무리 데클란이 세졌다고 해도 그렇지, 다 같이 덤볐으면 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는데!’

“설마 마을 아이들 전부 불러다가 내게 덤비려는 건 아니겠지?”

데클란이 케쉬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빈정거렸다.

뜨끔 놀란 케쉬키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아, 아니거든! 그런 비겁한 짓 안 해!”

일단 소리는 크게 쳤다만, 케쉬키는 속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조금 전까지 케쉬키는 자신이 데클란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다.

최근 귀족물을 먹은 데클란이 검술이니 뭐니를 배웠다고 하지만, 열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아무리 데클란이라도 감당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그 열 몇 명의 아이들은 모두 도망치고 오로지 케쉬키만 남았다.

‘아니야, 그래도 긴장할 필요 없어. 그래봤자 고작 데클란일 뿐인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케쉬키는 일부러 가슴을 펴며 데클란에게 외쳤다.

“뭐, 뭐 하려고? 설마, 날 때리려고?”

“왜, 맞고 싶어?”

곧장 돌아오는 데클란의 반문에 케쉬키는 다시 한번 움찔거렸다.

정말 자신이 알던 데클란인지 의심이 갔다.

자신이 알던 데클란은 항상 겁에 질리고 위축되어 자신에게 한 마디도 못하던 녀석이었는데…….

그때, 데클란의 목소리가 케쉬키의 생각을 끊어 잘랐다.

“네가 사샤에 대해서 뭘 알아?”

“뭐, 뭐라고?”

케쉬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데클란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뭔데 사샤에 대해서 함부로 지껄이는 건데?”

데클란의 입가에 겨울 하늘 같은 싸늘함이 꽂혀있었다.

“넌 사샤랑 아침이나 같이 먹어 봤어? 넌 사샤가 어떤 디저트를 좋아하고 어떤 차향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무, 무슨 소리야, 그게.”

“넌 사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넌 사샤랑 같이 낮잠이나 자 봤어? 걔가 어떤 잠꼬대하는지도 모르지?”

“사샤 걔가 낮잠 자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넌 사샤가 오후에 검술 훈련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 지도 모르잖아. 넌 노을 질 무렵에 그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네 모습을 본 적 있어?”

“너 도대체 뭔 소리를 지껄이는……”

“넌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데클란이 케쉬키의 말꼬리를 잘라먹었다.

“사샤는 항상 내 곁에 있었어. 그리고 앞으로 내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보다 내가 사샤에 대해 더 잘 알아.”

그렇게 말을 끝낸 데클란이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케쉬키의 멱살을 잡았다.

“윽!”

“그러니까 입 닥쳐, 이 개자식아.”

쾅!

순간 날카로운 굉음이 케쉬키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데클란이 다른 주먹으로 케쉬키의 뒤에 있던 나무를 내리친 것이었다.

케쉬키는 덜덜 떨리는 시선으로 자신의 옆 공간을 훑었다.

데클란의 주먹이 박힌 나무의 껍질이 우수수 조각이 나 떨어졌다.

데클란이 어찌나 세게 주먹을 내리찍었는지 나무 위가 음푹 패어 들었기 때문이다.

‘괴, 괴물이다!’

케쉬키는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게 진정 사람의 몸에서 나올 힘인가? 겨우 열한 살 먹은 꼬마가 주먹으로 나무를 부쉈다고?

“꺼져.”

나무에서 주먹을 치운 데클란이 케쉬키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아, 알았어! 꺼져줄게!”

멍하니 굳어 있던 케쉬키는 허겁지겁 달아났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케쉬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데클란은 케쉬키가 기대어 서 있던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의 몸통에는 데클란이 주먹을 휘두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힘이 이렇게 셌나?’

데클란 역시 케쉬키와 마찬가지로 얼떨떨했다.

케쉬키에게 겁을 주려고 주먹을 세게 내리쳤을 뿐인데, 이렇게 강한 힘이 나갈 줄은 몰랐다.

분노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힘을 너무 과하게 써서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맨손으로 나무를…….’

데클란은 자신이 박살 낸 나무의 껍질을 더듬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기묘하지 않는가. 자신도 모르는 괴력이라니.

그때였다.

“……윽!”

순간 데클란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관통한 것처럼 아파왔다. 그와 동시에 온몸이 펄펄 끓는 솥 안에 던져진 것처럼 달아올랐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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