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나나 로지에나 곧 2차 성장에 폭풍 진입하게 될 나이인데, 어떻게 같이 방을 쓴단 말인가?
그러나 부모님은 막무가내였다.
“사샤 넌 이제부터 남자라니까?”
아니, 그렇다고 제 진짜 정체성이 바뀌는 게 아니잖아요! 고작 말 한마디로 없던 게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라고요!
나는 부모님을 향해 되물었다.
“잠깐만요. 이거 애초에 남작님도 허락하신 거예요?”
“물론이지. 그래서 우리가 남작님에게 널 로지에 도련님의 시종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한 거란다. 그래야지 로지에 도련님 옆에 꼭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부모님의 말뜻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로지에 옆에 딱 붙어 있음으로써 그가 귀족 영식으로 받는 모든 보호를 같이 받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그대로 인페르나 남작을 찾아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작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절 도련님과 같은 방에 넣으실 수 있어요!”
집무실에 앉아 유유히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있던 인페르나 남작과 로지에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인페르나 남작이었다.
“내 아들과 같은 방을 사용하는 데 불만이라도 있느냐?”
“있습니다!”
“왜?”
남작의 짤막한 반문에 나는 잠시 움찔거렸다.
왜? 방금 ‘왜’라고 물은 건가? 보통 ‘뭐’라고 묻지 않아?
예사롭지 않은 기선 제압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일단 그게, 저는 여자이고 도련님은 남자인지라—”
“잠깐.”
남작이 내 말을 뚝 끊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엔리’가 아니더냐? 넌 남자다.”
“이름이 바뀐다고 성별이 바뀌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지? 네 이름은 너의 존재를 품고 있는 함축된 언어다. 그러니 불가능한 것도 없지.”
뭔가 들어보면 그럴싸한데 곱씹어보면 순 억지잖아!
이제 나는 억울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이 어른들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것일까.
분명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데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여기가 바로 지옥인가?
찹쌀 옥수수를 오십 개 연달아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속이 답답하고 꽉 막힌 것이 아주 죽을 맛이었다.
나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남작님,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는 무슨 후회?”
“그러다가 제가 로지에 도련님을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내가 두 눈을 딱 감고 그렇게 외쳤다.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다. 실제로 로지에를 어떻게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5년이 지나면 나도 로지에도 17살의 청소년이 된다. 호르몬이 들끓는 나이가 된다는 거다.
장차 미래에 있을 수도 있는 문제점에 생각해보라는 취지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남작은 그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 아들이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더냐? 인페르나의 종자들은 베개 밑에 단도를 숨기고 침대 머리맡에 검을 두고 잔다.”
‘아니, 그 의미의 덮침이 아닌데요!’
그리 현명하다 믿었던 인페르나 남작은 내 은유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버리고 말았다.
역시 로맨스 소설 아니랄까 봐, 연애 플래그가 서면 등장인물들이 다 눈치가 없어진다.
젠장.
“사샤 양, 그게 무슨 말이야?”
반면 로지에는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요정이 남기고 간 수정 방울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었다.
그런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내 속이 얼마나 더럽고 썩었는지 똑똑히 느껴졌다.
“사샤 양, 날 덮칠 거야?”
“……아니요.”
순수한 로지에의 눈빛에 나는 그만 순순히 백기를 들어 올리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문 채 남작의 집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부모님이 보란 듯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렴, 남작님에게 미리 허락받았다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나는 다시 한번 부모님께 내 곤란한 입장을 설명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이상 반박을 했다간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와 아빠는 대뜸 내 이름을 불렀다.
“사샤.”
“사샤 아니고 엔리라면서요.”
“아직은 사샤야. 아카데미로 가서는 엔리이고.”
자리에서 멈춰 선 엄마와 아빠는 그대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와 시선을 맞춘 부모님은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가서 건강해야 한다, 우리 딸.”
아.
그 한마디에 그제야 나는 이별이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생생히 느꼈다.
“가서 로지에 도련님 말씀 잘 듣고, 데클란과 재밌게 잘 놀아라.”
“밥도 잘 챙겨 먹고, 잠도 충분히 자고, 친구도 많이 사귀고.”
“그리고 시간 나면 공부도 조금 하고. 그렇다고 너무 목숨 걸고 공부할 필요는 없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렴. 엄마와 아빠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그걸로 됐다.”
“……네.”
이어지는 부모님의 덕담에 내 마음은 물을 먹은 해면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 인페르나 남작의 집무실로 쳐들어가 로지에 도련님과 같은 방을 쓰니 안 쓰니 옥신각신하던 때의 흥분감은 흩어진 지 오래였다.
‘정말 떠나는구나.’
이제 나는 로지에 도련님을 따라 데클란과 함께 아카데미로 떠나게 된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었지만, 결국 정말 떠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인페르나 영지를, 이 작은 시골 동네 마을을, 그리고 이 두 어른을 남기고 저 멀리 떠나게 된다.
그 사실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맴돌자, 가슴 한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느끼고 있는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알 수 없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일까, 아니면 내게 익숙해져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불안감이든, 아쉬움이든.
지금 내가 당장이라도 울고 싶다는 점은 뒤바뀌지 않을 테니까.
‘……눈물은 왜 나는 거야?’
홧홧하게 달아오른 눈가를 괜히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나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당장 생사와 귀환을 장담할 수 없는 전쟁터로 떠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가시라도 찔린 것처럼 쿡쿡 아파져 오는 것일까.
‘즐거운 생각을 하자. 울면 안 돼. 내가 무슨 아기도 아니고, 여기서 울 수 없어…….’
나는 울지 않기 위해 기쁘고 행복했던 시간의 파편들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나와 데클란을 위해 맛있는 소고기 스튜를 끓여주셨던 날. 그때 우리가 너무 전투적으로 스튜를 먹어 치우는 바람에 아빠가 많이 당황하셨지.
유난히 추웠던 겨울날에 엄마가 옥수수 대를 땔감 삼아 태우다가 집을 홀라당 태워버릴 뻔한 날. 그때 데클란과 내가 눈을 퍼다가 붓느라 힘들었지.
데클란의 엄마가 나와 데클란을 위해 새로운 셔츠를 짜주셨던 날. 그런데 데클란의 엄마가 실수로 내 치수를 잘못 아셔서 나는 너무 크고 헐렁한 셔츠를 입게 되었지.
그때 데클란은 나보고 예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내 부모님이 날 보고 포대 자루 입은 것 같다고 엄청나게 웃으셨는데…….
그렇게 울지 않기 위해 웃음으로 가득했던 기억을 떠올리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같은 지붕 아래에 사는 엄마와 아빠. 옆집에 사는 데클란과 그의 어머니.
내가 지금까지 행복했던 모든 순간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나는 기어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앙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엄마, 아빠.”
“그래, 사샤야.”
“저, 꼭 다녀올게요.”
나는 그대로 부모님을 꼭 껴안았다.
잠시 당황한 듯이 굳어 있던 부모님은 이내 얕은 미소와 함께 나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그래, 다녀오렴.”
“기다리고 있을게, 우리 딸.”
부모님의 옷깃에서 은은하게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옥수수 알에서 흘러나온 단내였다.
예전에는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다고 늘 투덜거리던 그 옥수수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제는 그렇게 싫지 않았다.
어쩌면 나중에 나도 옥수수의 맛을 그리워하는 날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부모님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올린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한 시간 후에 나는 데클란과 로지에와 함께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탈 것이다.
‘데클란은 언제 오는 거지?’
데클란은 오늘 아침에 인페르나 남작가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남작가에서 특별히 빌려준 말을 타고 혼자 남작가까지 오기로 했다.
이제 출발까지 고작 한 시간이 남은 시점이었다.
왜 데클란이 보이지 않는 걸까.
‘설마, 늦잠 잔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어제 늦게까지 제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집사님에게 물어볼까?’
아무래도 이 저택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붙들고 묻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니야. 지금 집사님은 출발 준비하느라 정말 정신이 없을 거야.’
주변을 흘끔 살펴보니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야말로 쑤셔진 개미굴의 개미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괜히 바쁜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단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닫은 나는 그대로 소파 위에 쓰러졌다.
“후.”
이제 정말 인페르나 영지를 몇 년 동안 떠나는구나.
나는 가만히 소파 맞은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는 시종 복장을 한 짧고 검은 머리의 아이가 비쳐 있었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내가 봐도 나 꽤 잘생겼는데?’
당장 당사자인 내가 봐도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더 잘생긴 남자아이로 보이겠지?
그렇게 가만히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등 뒤에서 검은 물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헉!”
화들짝 놀란 나는 그대로 작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획 돌렸다.
“……나야, 사샤.”
등 뒤에 서 있던 검은 물체로부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클란이었다. 그는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머리 위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데클란임을 알아차린 나는 이내 긴장감을 풀어내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데클란! 너였구나! 나 정말 깜짝 놀랐잖아!”
“……미안해.”
“너 언제부터 내 방에 있었어? 그렇게 시꺼먼 걸 뒤집어쓰고 있으니까 내가 몰라 봤잖아.”
그렇게 말한 나는 등을 돌려 데클란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로브를 둘러쓰고 있던 데클란이 움찔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
‘왜 피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거야, 데클란? 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당황한 기색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거침없이 데클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후드 벗어 봐, 데클란.”
“시, 싫어.”
데클란이 말을 더듬으며 계속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나를 피하려는 기색이 명백했다.
이에 나는 더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벗어 봐. 도대체 무슨 일인 건데.”
만일 평소의 나라면 결코 데클란이 싫다고 말하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데클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한참 실랑이를 벌인 뒤에 후드를 벗긴 나는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볼 아래 생겨난 시퍼런 멍.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자국. 그리고 이리저리 할퀴어지고 긁힌 흔적들.
후드 아래로 드러난 데클란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