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데클란의 말에 나는 두 눈을 천천히 깜박거렸다.
만일 지금 내가 놀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일 테다.
이건 문자 그대로 옆에 있어 달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잠시 굳어 있던 나는 그대로 실눈을 뜨며 데클란을 흘겨보았다.
이 녀석, 도대체 왜.
‘왜 자꾸 끼 부려?’
그러고 보니.
데클란은 예전부터 자꾸만 선을 넘는 듯한 말을 했다.
친구 이상이 되자고 하거나, 아니면 평생 같이 있고 싶다고 하거나.
물론 겉으로 듣기에는 매우 달콤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여주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 속의 엑스트라다.
그런고로 나는 이후 데클란이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 데클란이 자꾸만 내게 마음의 여지를 주는 게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이제 11살 먹은 꼬꼬마거든?’
전생에 성인이었던 내가 보기에 아직은 어려도 한참은 어린 나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진중하게 미래를 논하다니.
물론 어리다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어른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조금 미숙한 부분이 보였다.
데클란은 분명히 이 마을 바깥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테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이 마을의 경계를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데클란이 이제 로지에 도련님을 따라 도시로 나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데클란은 스펀지처럼 다양한 지식을 흡수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야가 넓어진 뒤에도 데클란은 과연 나를 곁에 두고 싶어 할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나무가 위로 자라고 강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이 세계에는 ‘원작 전개’라는 법칙이 있다.
그렇기에 데클란은 언젠가 자기 짝을 만나 떠날 것이다.
모든 것은 원작의 흐름대로 가게 될 것이고.
그 뒤로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아서 찾아가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벌써부터 다 큰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데클란의 머리를 향해 손을 쓱 내밀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냥, 네가 자랑스러워서.”
데클란의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뭐가 자랑스러운데?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아직 로지에 님도 이기지 못했고…….”
그러면서 데클란은 곁에 서서 우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로지에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로지에는 활짝 웃으며 반갑다는 듯이 그에게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러자 데클란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데클란, 난 네가 있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자랑스러워.”
나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을 이어갔다.
“데클란, 넌 정말 대단한 아이야.”
아직 내게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말해주고 싶었다.
데클란이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도록.
단 한 순간도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앞날에 대해 비관적으로 느끼지 않도록.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도록, 곁에서 계속해서 몇 번이고 말해주고 싶었다.
넌 정말 괜찮은 아이야.
넌 커서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 * *
그렇게 여름이 훌쩍 지나갔다.
끝없이 화창할 것만 같은 날씨도 선선하게 가라앉았다.
영원히 푸릇푸릇 빛날 것만 같던 숲의 녹음도 천천히 물들어 익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드디어 오늘, 아카데미로 출발하는 날이 찾아왔다.
인페르나 남작 저택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도련님 옷 전부 다 다렸니?”
“가방에 잘 개어서 넣어! 구겨지면 안 돼!”
“이번에 도련님이 가지고 가실 물건 전부 다 뒤 마차에 실어야 해!”
온 저택이 들쑤신 개미구멍처럼 난리 통이었다.
모든 사용인은 동분서주하며 로지에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혼잡함에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사샤야!”
뒤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섰다.
“엄마, 아빠!”
부모님이 나를 보기 위해 마을에서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나는 지난 몇 주 동안이나 부모님을 보지 못했다.
나는 인페르나 남작가 밖으로 갈 수 없었고, 부모님은 어째선지 나를 잘 찾아오지 않으셨다.
당장 출발을 하루 앞둔 어제까지도 부모님이 얼굴을 내밀지 않으셨으니, 할 말 다 했다.
물론 부모님이 나를 찾아오지 않아 조금 시무룩했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녀 언니들이 내게 ‘네 부모님은 옥수수 재배 때문에 바쁘다더라!’하고 말하며 나를 위로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모든 진실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 낯선 남자가 나를 이레사 공녀라고 부르며 찾아왔던 사건 이후, 나를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나와 거리를 둔다고 해야 할까.
마치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은 것처럼 일부러 멀찍이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부모님의 심중을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어떤 사정이 있어서겠지.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렇게 부모님을 다시 보게 되니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났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나와 부모님 사이에는 두터운 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나를 보고 싶었던 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두 분은 곧바로 내게 달려와 나를 와락 안아 주었다.
“우리 딸, 공부하느라 고생 많았지?”
“네! 머리 터지는 줄 알았어요!”
“허허, 사람 머리는 터지지 않아요.”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을 넘겼다.
부모님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 방으로 향했다.
“사샤 네게 줄 물건이 있단다.”
방 안으로 들어간 엄마는 가지고 온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침대 위로 엄마가 꺼낸 것들이 즐비하게 놓였다.
대부분 처음 보는 새 옷이었다.
“이거 제 옷이에요?”
침대 위에 놓인 옷가지 중 아무거나 무작정 집어 올린 내가 옷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물었다.
“응, 전부 다 사샤 네 것이란다.”
“이제 로지에 도련님을 따라 아카데미로 가니, 새 옷이 필요하잖니.”
참고로 시종 신분으로 주인을 따라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경우 따로 교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원초적인 요소를 빼먹다니. 이런 날강도들.
그러한 이유로 나도 마침 새 옷들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고마워요, 엄마, 아빠! 그런데……”
옷들을 살펴보던 내 입에서는 ‘마음에 꼭 들어요!’ 따위의 입발린 말이 절로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부 다 남자 옷인데요?”
그랬다.
엄마가 가방에서 꺼낸 옷들은…… 전부 다 남아용 옷이었다.
칙칙한 색상. 장식 하나 없는 소소한 디자인.
쓸데없이 넓은 소매와 바지통. 그리고 전체적으로 펑퍼짐한 제단.
누가 봐도 부모님이 나를 위해 준비한 이 옷들은…… 전부 남자 옷이었다.
어째서?
나는 의구심을 품으며 부모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도리어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샤, 넌 앞으로 엔리가 되는 거다.”
“네? 엔리가 뭔데요?”
“이제부터 네가 사용할 이름.”
으응?
부모님의 말에 나는 두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내게는 부모님이 주신 예쁜 이름 석 자 김사샤가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개명하라니.
아니, 이름을 바꾸라는 것은 둘째치고.
사실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엔리라니, 그거 완전히 남자 이름 같은데요?”
내 말에 부모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이름 맞다.”
아.
그 말을 듣자 나도 이제는 슬슬 눈치챌 수 있었다.
엄마의 동의 아래 짧게 싹둑 잘린 내 머리카락.
침대 위에 놓인 남자 옷들.
그리고 딱 들어도 어감이 강한 남자 이름까지.
‘설마.’
아니야.
설마, 아니겠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진 채, 내가 부모님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저 이제 남장여자 되는 거예요?”
“그래.”
설마가 사람을 잡고야 말았다.
나는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갑자기 왜요?!”
내 머리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전개였다.
내가 왜 남장여자가 되어야 하는 건데?
‘설마, 내가 로지에 도련님의 시종이 되어서?’
하지만 그건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인페르나 남작님은 분명 시종은 여자든 남자든 일만 잘하면 장땡이라고 말했는데!
머릿속이 스크램블드에그처럼 온통 휘저어지고 엉망으로 변해갔다.
속으로 혼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부모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샤,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말 잘 들으렴.”
낮게 깔린 부모님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에 사뭇 진지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예전에 널 이레사 공녀라고 부르며 찾아왔던 나쁜 아저씨 기억나니?”
아, 그 나쁜 새끼요?
“당연히 기억나죠.”
“그때는 인페르나 남작님이 계셔서 그 나쁜 아저씨를 잘 처리했지만…… 앞으로 또 다른 나쁜 아저씨가 나타날 수도 있단다.”
그렇게 말하는 부모님은 각기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내 피부 너머로 부모님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제야 나는 두 분 모두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당분간 엔리로 살아가도록 하렴.”
“엄마, 아빠…….”
“그 나쁜 아저씨들이 너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릴 때까지, 잠깐만 사샤가 아닌 엔리로 살아가도록 하렴.”
“…….”
부모님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저번에 내 머리카락을 자를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이 날 인페르나 남작가에 두고 자주 찾아오지 않는 것도 뭔가 묘하다고 느꼈었다.
갑자기 내게 로지에 도련님의 시종 직급을 맡기고 공부시키기 시작한 것도 낌새가 이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날 ‘사샤’가 아닌 다른 아이처럼 취급하겠다니.
도대체, 나를 찾은 이들이 누구이기에.
그제야 나는 상황이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작님과 로지에 도련님에게는 이미 말씀드렸다. 아카데미에는 널 남자라고 말했어.”
부모님은 내 손을 놓지 않으며 말했다.
이에 나는 난색을 보이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제가 여자라는 걸 눈치채면요?”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전원 기숙사행이다.
식당부터 샤워실까지 전부 공용으로 사용하는 마당에, 다른 이들에게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나와 방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는 또 어떻게 속여 넘기려고?
“걱정하지 마렴. 그럴 일 없을 거야.”
“왜요. 설마 제 룸메이트가 데클란인 건가요?”
“어? 아니.”
부모님이 굳은 입술로 억지로 미소를 자아내며 말했다.
“넌 아카데미로 가면 로지에 도련님 방에서 지내게 될 거야.”
“……네?”
부모님의 말에 나는 두 눈이 튀어 나갈 지경이었다.
곧바로 입에서 반박의 언어가 튀어나왔다.
“마, 말도 안 돼요! 제가 어떻게 도련님이랑 같은 방을 써요? 저희는 성별이 다르잖아요!”
내 골수에 찌든 유교 사상이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초유의 비상사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