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아카데미라고?’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클란이었다.
그는 남작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와 남작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데클란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다만 차마 남작의 면전에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어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반면 나는 급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아카데미라면…….’
아카데미라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란 하급 귀족 자제들이 정치와 경제학 등 귀족으로서 알아야 할 필수 지식을 배우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물론 가정교사를 통해 같은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정교사를 고용하는 건 큰돈이 든다.
특히나 박식하고 실력 좋은 가정교사들은 어마어마한 몸값을 자랑했다.
공작가나 후작가 쯤 되는 귀족 가문이 아닌 이상 그런 교사들을 고용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로지에와 같이 비교적 낮은 위치의 귀족 자제들은 대신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곳에서 더 저렴한 학비로 지식도 배우고, 또 낮은 귀족들끼리 단합해서 정치계에 영향력을 펼쳐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실력이 검증된 교사로부터 단체로 수업을 받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로지에는 올해 가을부터 아카데미에 재학하게 된다고 했었지.’
예전에 로지에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내가 로지에와 함께 아카데미를 가게 되다니, 말도 안 돼.’
그랬다.
내가 아는 한 아카데미는 분명 귀족 자제들만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평민 신분의 내가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인페르나 남작이 내게 다가왔다.
“아카데미에는 귀족 자제들을 모시는 시종들을 위한 반도 있단다.”
“시종이요?”
“그래. 아카데미에 로지에 혼자만 갈 것 같았느냐?”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카데미는 총 5년 동안 빠듯하게 공부를 해야 겨우 졸업할까 말까 할 정도로 힘든 곳이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에 간 귀족들은 대부분 공부하기에 바빴다.
그런 귀족들이 언제 빨래를 하고 방을 청소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할 짬이 날까.
그러니 귀족들은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 자신의 잔심부름을 하거나 기숙사 내부의 집안일을 도울 시종을 데리고 가곤 했다.
“잠깐만요, 남작님. 그럼 지금 설마 저를 로지에 도련님의……?”
에이, 설마. 아니겠지.
나는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거울에 비친 인페르나 남작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너무나도 당돌하고 또 굳건한 확답이었다.
“네 어머니가 동의했다. 사샤 넌 이제부터 로지에의 시종이다.”
네? 뭐라고요? 갑자기 이렇게요?
나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하녀들은 아직도 내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가…… 로지에 도련님의 시종이라고요?”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만 전 여자인걸요!”
“그래서 뭐?”
“시종은 남자만 하는 거 아니었나요?”
내 순수한 질문에 남작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누가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을 하던?”
아, 네.
아닌가 보다. 남녀 구별 상관없이 그냥 아무나 하는 게 시종인가 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로지에의 시종이라니. 그리고 그와 함께 아카데미에 가게 되다니.
나는 아카데미에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카데미에서는 책을 잡고 공부하는 것 외에도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마법이라던가…… 아니면 검술이라던가.’
마법은 타고난 마력이 있어야만 가공이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애초에 마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일단 마법은 포기하고.
‘……검술을 배울 수 있겠는데?’
시종이라면 일단 제 주인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니 분명히 아카데미에서는 시종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곧바로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데클란.”
“음?”
“남작님…… 혹시 데클란도 로지에 도련님의 시종으로 삼으실 생각 없으신가요?”
순간 뒤에서 멍한 시선으로 이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데클란이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며 남작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반면 내 제안을 들은 인페르나 남작의 미간이 휘어졌다.
“뭐? 데클란?”
보아하니 그녀는 내가 설마 데클란의 이름을 꺼낼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니, 로지에에게는 시종 한 명이면 족하다.”
남작은 내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나 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가 아파서 도련님을 돕지 못하는 날이 생기면요?”
“내가 볼 때 사샤 넌 튼튼해서 웬만하면 아프지 않을 것 같다. 너보다 로지에가 더 걱정이지.”
남작의 대꾸를 들은 나는 속으로 뜨끔거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는 하도 건강하게 태어난 나머지 여태껏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든 데클란도 같이 아카데미로 보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바꿔보았다.
“그렇지만 남작님, 로지에 도련님이 고작 시종 한 명만 데리고 아카데미로 가면 조금…… 그렇지 않나요?”
내가 일부러 ‘조금’이란 말 뒤에 뜸을 들이며 애매하게 말을 표현했다.
그러자 남작이 곧장 내게 물었다.
“뭐가 그렇다는 게냐.”
“그게, 뭐라고 해야 할까……. 다른 가문의 영식분들에 비해 형편이 녹록치 않게 보일까 조금 걱정이 되네요.”
나는 정말 인페르나 남작가의 평판이 걱정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에 남작이 콧방귀를 꼈다.
“고작 시종의 숫자로 가문의 정통성과 권위를 논하는 게 아니다.”
“그렇긴 하죠. 그렇지만 데클란은 검술을 참 잘 다루는데…….”
나는 또 일부러 말꼬리를 흐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척을 하기 시작했다.
“로지에 도련님이 분명히 데클란은 검술 천재라고 하셨는데……. 그런 시종을 데리고 다니면 다른 귀족 영식분들이 우리 로지에 도련님을 얼마나 우러러볼까?”
혼잣말을 하듯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물론 진짜 혼잣말은 아니었다. 남작보고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과연 남작은 내 말을 들었는지 조금 반응을 보였다.
“사샤 넌 데클란도 아카데미로 가게 하고 싶은 모양이로군.”
“헤헤, 들켰나요?”
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거울에 비친 남작을 슬쩍 바라보았다.
“들킬 것도 없었지. 그렇게 대놓고 나오는데 내가 모를 것 같았나?”
팔짱을 낀 채 무덤덤하게 그런 말을 하는 남작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지에 본인에게 내가 직접 물어보도록 하지. 만일 데클란 그 녀석을 데리고 가고 싶다고 하면, 마음대로 해라.”
옳거니! 월척이다!
남작의 말에 온점이 찍히자마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해냈다, 데클란! 너도 아카데미로 갈 수 있어!’
아무래도 남작은 로지에가 데클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다.
여전히 머리카락을 손질 당하고 있는 나는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리고 뒤늦게 불려온 로지에는.
“사샤 양과 데클란 군이 제 시종의 신분으로 저와 함께 아카데미로 간다고요? 어머니, 정말 감사해요!”
역시나 내 예상대로 너무나 기뻐했다.
급기야 로지에는 바로 앞에 하녀들과 손님들이 있는 것도 잊은 채 인페르나 남작을 꼭 껴안았다.
“크흠, 크흠.”
남작은 일부러 목청을 청소하며 제 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앗, 죄송해요, 어머니. 너무나 기쁜 나머지…….”
“됐다. 사과는 집어 두고, 이제 가서 네 친구들과 회포나 풀도록 해라.”
남작은 로지에와 나, 그리고 데클란을 향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축객령은 또 처음이었다.
“사샤 양과 데클란 군이 나와 함께 아카데미를 갈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기뻐!”
남작의 드레스룸에서 걸어 나가자마자 로지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는 나도 동감이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난 간다는 말도 안 했는데.”
“에이, 데클란. 너 설마 같이 안 갈 거야?”
내가 은근슬쩍 데클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그러면서 나는 오로지 데클란만 들을 수 있도록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카데미에 가서 검술 배워야지. 너 분명히 로지에 도련님을 이기는 게 목표라면서?”
“그렇긴 하지만…….”
데클란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다.
“난…… 어머니를 혼자 두고 가고 싶지 않아.”
아.
나는 그제야 데클란이 왜 미지근한 태도를 고수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아카데미로 떠나게 되면 어머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전혀 걱정할 게 없었다.
왜냐하면.
“데클란 군. 아카데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전부 다 방학이 있는걸. 그러니까 원하면 방학 때마다 데클란 군이 어머니를 볼 수 있도록 해 줄게.”
나와 데클란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로지에가 고했다.
데클란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내가 왜 데클란 군에게 거짓말을 하겠어?”
“그래, 데클란, 로지에 도련님 말 들어.”
밝은 미소를 지은 내가 데클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아카데미로 가자!”
네가 그곳으로 가서 네 꿈과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면 좋겠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던 네 부정적인 생각이 전부 다 사라졌으면 좋겠어.
내가 늘 너에게 말했던 것처럼 넌 커서 정말 멋진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미래를 향해 더더욱 노력하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자.
“넌 멋진 기사님이 될 수 있을 거야, 데클란!”
이에 줄곧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던 데클란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도 좋아.”
“응?”
“너와 함께라면 난 어디든지 좋아. 사샤 네가 있는 곳에 나도 있고 싶어.”
그런 말을 남긴 데클란은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잡은 데클란의 두 눈동자가 참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