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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48)화 (48/177)

48화

“나, 남작님. 지금 그 말씀은…….”

인페르나 남작의 말을 들은 샤네리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설마…… 이레사 공작이 들인 두 번째 가짜 딸이 죽어서…… 이레사 공작이 다시 사샤를 찾으라고 했다는 건가요?”

“…….”

남작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긍정에 샤네리의 힘이 탁 풀렸다. 그녀에게는 이미 찻잔을 들어 올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히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잘 숨어서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도대체 어디서 꼬리가 잡혔던 걸까.

‘그러고 보니.’

순간 샤네리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보석 브로치.

사샤의 옷장 안에 감춰두었던 그 브로치가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설마…… 누군가가 집에 침입해 그 브로치를 훔쳐 간 것일까?

그 브로치 때문에 사샤의 행방이 이레사 공작에게 들통나게 된 것일까?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사샤가 다친 이후, 샤네리와 마로크는 일부러 집의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옆집에 사는 데클란이 언제나 들어갈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큰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레사 공작이 또 사람을 보내서 사샤를 납치해 갈수도 있다는 거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샤네리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늘 사샤를 잡아가려고 했던 남자가 정확히 이레사 공작과 어떤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인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이 남자를 감옥에 잡아넣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이레사 공작은 어쩌면 사샤—그러니까, 자신의 첫 번째 가짜 공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이미 다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샤가 이곳에 남아 있는 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안 돼.

또다시 사샤를 잃을 수는 없다.

한 번 잃어버린 사샤를 되찾기 위해 이미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

한 번이면 족했다. 두 번은 절대 안 된다.

“남작님.”

샤네리는 떨리는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인페르나 남작을 바라보았다.

“사샤는 이곳에 남아 있으면 안 돼요. 이레사 공작이, 그 악마가 또 사샤를 잡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사샤를 도와주세요…….”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아무런 말도 없이 샤네리를 응시했다.

그녀는 속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 * *

나와 데클란은 의무실 밖의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딘 선생은 아빠가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딘 선생은 동시에 아빠가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와 데클란은 의무실 안이 아닌 바깥에 앉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 집사에게 불려간 엄마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듣자하니 남작님이 엄마를 불러갔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거지?’

이제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데클란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사샤, 이제 말 해줘.”

“응? 무슨 말?”

“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

데클란의 말에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아직 그에게 상황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아까 집사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할 때 데클란은 엄마를 위로하느라 정신이 없었었다.

“음, 그게 말이지…….”

데클란의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살짝 고민했다.

그러나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이실직고하기를 선택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은 감춰봤자 감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데클란에게 아침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기 전에 날 찾아오지 그랬어.”

마을 입구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데클란이 불현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널 데려가서 뭐 하게?”

“난 검술을 장난으로 익힌 게 아니야. 날 데리고 갔더라면 널 도울 수 있었을 텐데.”

“마음은 고맙지만, 나도 너처럼 검술 쓸 수 있잖아. 잊었어?”

“그래도 한 명보다는 둘이 더 낫잖아. 앞으로 그런 상황이 있으면 날 불러.”

“데클란…….”

나는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데클란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앞으로 또 이런 상황이 닥쳐올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일단 나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는 데클란의 태도가 만족스러웠다.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사람이 널 이레사 공녀라고 불렀다고?”

마을 입구에 나타난 낯선 남자가 날 이레사 공녀라고 불렀다는 말을 들은 데클란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래.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니? 내가 어딜 봐서 귀족처럼 보여? 난 일평생 드레스 한 번 못 입어봤는데!”

나는 다소 억울함을 담아 항변을 늘어놓았다.

진심이었다.

만일 내가 조금 돈이 있고 유서가 깊은 집안의 아이였더라면 조금 덜 억울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누가 봐도 평민이지 않는가.

왜 나 같은 엑스트라를 여주로 오인하게 된 건데!

‘그러다가 괜히 죄 없는 아빠가 다쳤잖아!’

그렇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데, 옆에서 데클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드레스 입어본 적 있잖아.”

“어?”

“드레스.”

데클란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사샤 네가 드레스 입은 거 본 적 있어.”

그 말을 들은 나는 멍하니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나도 본 적이 없는 걸 어떻게 네가 봤어?”

“네가 우리 마을에 오기 전에…… 깜깜한 새벽에 네 부모님이 널 마차에 태우고 온 걸 봤어.”

“마차에?”

“응. 그때 넌 분명히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많이 찢어지고 더러워진 드레스였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드레스는 드레스였어.”

“…….”

데클란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사샤의 이전 기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데클란이 하는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혼란스럽네.’

지금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데클란이 보았다던 드레스를 입고 있던 사샤.

그냥 드레스도 아니고, 많이 찢어지고 더러웠던 드레스라.

‘도대체 무슨 상황이었던 거야?’

누구한테 선물 받은 드레스를 입고 기뻐서 날뛰다가 언덕에서 스물다섯 바퀴라도 구른 건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집사가 보였다.

나와 데클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사를 향해 예의를 갖추었다.

“아직도 여기 있었구나.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지 말고 응접실로 가서 기다리라고 해도…….”

집사는 의무실의 문을 한 번 흘끔 쳐다보더니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내 아빠가 다치게 된 것에 대해 큰 유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모두가 침울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내가 더 울상을 지었다간 모두가 더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다시 힘을 내도록 하자.

“집사님, 엄마는 어디에 있어요?”

목소리에 활기를 불어넣은 내가 씩씩하게 집사에게 물었다.

“네 어머니는 아직 남작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란다. 마침 남작님이 너에게도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날 따라오렴.”

“아, 네!”

“저도 가도 되나요?”

데클란이 집사에게 불쑥 물었다.

집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려무나. 어차피 데클란 너도 곧 알게 될 사실이니…….”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집사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와 데클란은 부리나케 집사를 뒤따랐다.

집사가 우리를 데리고 향한 곳은 놀랍게도 인페르나 남작의 집무실이 아니었다.

‘남작님이 날 찾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집무실과 정 반대 반향으로 걸어가는 집사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어서 와라, 사샤. 그리고…… 데클란.”

집사가 안내한 방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거울이었다.

그 거울 앞에는 인페르나 남작과 엄마, 그리고 여러 명의 하녀들이 서 있었다.

낯선 방에 들어선 나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고 말았다.

내 옆에 선 데클란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여긴 도대체 뭐 하는 방이지?’

이런 내 의문에 답변이라도 하듯, 엄마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얘들아, 여긴 남작님의 드레스룸이란다.”

“드레스룸이요……?”

드레스룸이라면 남작님의 개인 옷장이나 다름없는 공간 아닌가.

그런 곳에 왜 우리가 불려온 거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남작을 바라보았다.

인페르나 남작은 그런 나와 데클란을 흘끔 보더니, 이내 하녀들에게 손짓했다.

“잘라.”

순간 옆에 서 있던 데클란이 몸을 움찔거렸다.

“네?”

자르라니요? 뭘 자르라는 거죠?

당황한 나와 달리 하녀들은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곳에 앉으렴, 사샤.”

“어깨에 힘 빼렴.”

“고개 빳빳이 들어 올리고.”

하녀 언니들은 나를 거울 앞에 놓인 의자에 앉혔다.

‘뭐, 뭐지?’

그 손에 이끌린 나는 그대로 의자에 자리 잡고 말았다.

하녀들이 내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지금 내 머리카락은 등의 절반까지 내려올 정도의 길이였다.

긴 머리가 좋아서 기른 건 아니었다. 단지 머리를 자를 시간이 없어서 기르게 된 것이었다.

“예쁘게 잘 길렀네.”

“자르기가 조금 아쉬워.”

하녀 언니들은 내 머리카락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에 나는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 머리를 자르다니요? 갑자기 왜요?

나는 도움을 요청하듯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내 시선이 엄마에게 닿기도 전에 하녀 언니가 내 머리를 살포시 잡고 다시 앞으로 돌렸다.

“머리를 예쁘게 자르려면 움직이면 안 돼, 사샤.”

사각, 사각.

옆에서 가위 날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이 하녀 언니들이 자르는 게 다름 아닌 내 머리카락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 잠깐만요. 제 머리는 갑자기 왜 자르는 거예요?”

그러자 뒤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아카데미 학생들은 머리가 길지 않단다.”

싹둑!

엄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녀 언니가 내 머리카락을 가위로 쳤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나는 거울에 비친 엄마를 향해 당혹스러운 시선을 날렸다.

“아카데미 학생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엄마?”

“사샤.”

인페르나 남작 옆에 선 엄마가 조용한 목소리로 고했다.

“넌 앞으로 로지에 도련님과 함께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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