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샤네리와 마로크는 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그들은 두터운 이불을 꺼내 마차의 짐칸 위에 실었다.
“일어나라, 녀석아.”
작은 등불을 든 마로크는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당나귀를 깨워다 마차 앞으로 끌고 왔다.
두 사람은 한스가 자신에게 말했던 장소를 향해 마차를 조심스럽게 몰았다.
과연 그곳에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사샤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이곳에서 제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 잠들어버린 게 분명했다.
“사샤…….”
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샤네리와 마로크는 그 아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 어머니의 것처럼 가을의 단풍을 연상시키게 하는 고운 붉은 색의 머리카락.
제 아버지를 닮아 부드러운 눈매. 그리고 호리호리한 체구.
사샤. 분명히 사샤였다.
사샤 역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레사 공작가에 있을 때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드레스는 이리저리 찢어져 있었고, 손과 팔을 비롯한 살에는 상처가 드문드문 나 있었다. 게다가 등불에 의해 옷자락이 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일단 이불로 둘둘 싸서 집으로 데려가도록 합시다.”
마로크가 샤네리에게 제안했다.
잠시 굳어 서 있던 샤네리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지금 여기서 입을 열었다간 당장 눈물을 흘리고 말 것 같았다.
샤네리와 마로크는 사샤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 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이는 극도의 피로에 쫓겼던 모양인지 도통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한스와 사샤가 어떠한 역경과 싸우며 이곳 인페르나 영지까지 내려왔는지 새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샤네리는 사샤를 끌어안고 짐칸 위로 올라탔다.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는 너무나도 가벼웠다.
마지막으로 본 게 다섯 살 때 일이었다. 그러니 이 아이는 이제 아홉 살이나 되었을 텐데.
어릴 적부터 잘 먹고 잘 웃던 아이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깡마르고 애처로운 꼴이 된 것일까.
샤네리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눈을 감자 한스와 그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샤네리는 그들의 얼굴을 이제 앞으로 결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을 알았다.
그러니 기필코.
기필코 이 아이를 지켜낼 것이다.
한스와 그의 아내의 모습을 물려받은 이 아이를,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마차는 이윽고 집에 도착했다.
마로크는 샤네리를 도와 사샤를 안고 내렸다.
그들은 설마 이 장면을 옆집에 사는 꼬마가 보고 있을 줄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샤네리와 마로크는 사샤를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아빠…… 엄마…….”
침대 위에 쓰러진 것처럼 누운 사샤가 자꾸만 몸을 바르작거렸다.
“집에 보내 줘요…… 싫어요, 집에 갈 거예요…….”
사샤는 마치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분명 앞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계속해서 허우적거리며 몸을 뒤척거렸다.
“……당장 머리카락 색을 어떻게 해야겠어요.”
사샤의 손을 꽉 쥔 샤네리가 마로크에게 중얼거렸다.
“머리카락 색?”
“이레사 공작의 딸이 원래 사샤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스 오빠가 전에 그랬잖아요.”
샤네리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물들이도록 해요. 누가 봐도 이레사 공작의 딸과 닮지 않게.”
“하지만 다시 붉은 머리카락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의심할 텐데…….”
“미용을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를 찾아가도록 해요. 사샤의 머리카락을 영구적으로 검게 만드는 거예요. 듣자 하니 돈 많은 상인의 부인들이 그런 걸 많이 한다잖아요.”
다른 마을로 가서 옥수수를 팔 때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다.
제법 큰 마을에 가면 돈이 좀 남아도는 여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마법사가 있다고 했다.
속눈썹을 길게 만들거나, 눈 색깔을 바꾸거나 하는 시시한 마법을 구사하는 형편없는 부류의 마법사였다.
예전에 샤네리는 그런 마법사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는 일이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그런 마법사가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렇지만…… 그런 강한 마법을 걸면 사샤의 몸에 무리가 갈 거야. 내가 듣기로는 부작용으로 성장이 더뎌진다고 했어. 그러다가 사샤가 불구라도 되면…….”
“그래도 사샤가 다시 잡혀가는 것보다 낫잖아요!”
“……당장 날이 밝으면 출발하도록 하자. 지금 당장 모아둔 돈을 챙기도록 할게.”
마로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떠날 채비를 했다.
샤네리는 자신의 옷장에서 크기가 가장 작은 셔츠를 꺼냈다.
그 셔츠를 사샤의 몸 위에 걸치자, 얼핏 아이의 원피스처럼 보였다.
샤네리는 사샤의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리고는, 그 위에 모자를 씌워 머리카락을 전부 감추었다.
‘……이건 어떻게 처리하지.’
샤네리는 사샤가 원래 입고 있던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촘촘한 레이스와 고풍스러운 장식이 달린 드레스는 이미 포대 자루보다 못한 꼴이 되어 있었다.
이걸 그대로 집에 뒀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불안한 마음이 든 샤네리는 드레스를 벽난로 안으로 휙 던져버렸다.
불길이 확 치솟으며 드레스를 살라 먹기 시작했다.
샤네리는 가만히 그 드레스가 불에 타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드레스가 잿더미로 전락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벽에 기대어 선 샤네리는 멍하니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불길 한 가운데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뭐지?’
샤네리는 화로 집게를 가져다가 그 반짝이는 것을 주워들었다.
그것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브로치였다.
처음부터 드레스에 고정되어 있던 브로치 같았다.
그 브로치를 보며 샤네리는 잠시 고민했다.
이것을 버려야 할지, 아니면 가지고 있어야 할지.
버리기엔 애매한 물건이었다. 불에 타지도 않고, 땅에 묻는다고 썩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바깥에 함부로 이것을 던져 버렸다가 누군가가 습득하거나 발견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사샤의 물건이기도 하니, 일단 가지고 있자.’
샤네리는 그 브로치를 옷장 안 어딘가에 꽁꽁 숨겨 두었다.
아침 해가 밝기가 무섭게 샤네리와 마로크는 미용 전문 마법사를 찾아 다른 마을로 출발했다.
사샤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마차가 출발한 지 두어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아빠?”
부스스 두 눈을 뜬 사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샤는 같이 짐칸에 앉아 있던 샤네리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샤네리 고모?”
아.
그 목소리를 듣자 샤네리는 당장 울고 싶어졌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4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이 아이는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고모, 여기가 어디예요? 아, 마로크 고모부…… 잠깐만요. 아, 아빠…… 아빠는요?”
“사샤야.”
“아빠 어디 있어요? 고모, 아빠는요?”
사샤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샤네리와 마로크 외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분명 곧 돌아온다고 했는데…… 저 보고 바위 근처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는데…… 그랬는데…….”
샤네리는 사샤에게 더 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사샤는 눈치가 제법 빨랐다. 그간 공작가에 억지로 붙들려 있을 때 습득하게 된 태도였다.
이제는 더 이상 아빠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사샤는 더 이상 아빠를 찾지 않았다.
샤네리와 마로크는 미용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에게 거액을 치르고 사샤의 붉은 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였다.
처음에 사샤를 본 마법사는 당황했다.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미용 마법을 걸겠다고요?”
“네.”
“허, 참. 그러다가 아이한테 부작용이 올 수도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성장이 느려집니다.”
“상관없어요.”
샤네리와 마로크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마법사는 혀를 차면서도 일단 돈을 받고 사샤의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만들었다.
“잘 들어라, 사샤.”
샤네리와 마로크는 검은 머리가 된 사샤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넌 이제부터 우리 딸이야.”
“…….”
“네 이름은 사샤. 네 엄마와 아빠는……”
샤네리는 다분히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바로 세우며 말을 이어갔다.
“……샤네리와 마로크란다. 알겠니?”
사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
“……그래, 우리 딸.”
그 길로 샤네리와 마로크는 사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저희 딸이 될 아입니다.”
그렇게 사샤는 마로크와 샤네리의 딸이 되었다.
* * *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인페르나 남작의 차분한 목소리가 방 안을 맴돌았다.
“…….”
그 목소리에 회상에 잠겨 있던 샤네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샤를 데리고 마을로 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그 많은 일 중에 이레사 공작과 관련된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을 제외하고 말이다.
“남작님은…… 다 알고 계시는 거죠?”
샤네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완벽한 긍정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제 딸을 잃은 이레사 공작이 어떻게 실성하게 되었는지.
이레사 공작과 관련되어 있을 남자가 어떻게 사샤를 납치해갔는지.
사샤가 어째서 죽은 이레사 공녀의 대역으로 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빼앗긴 제 딸을 되찾기 위해 사샤의 부모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인페르나 남작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털썩.
샤네리는 남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작님, 제발 부탁입니다. 사샤를, 제 아이를 살려주세요.”
샤네리는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몸을 깊숙이 숙였다.
“사샤를 이렇게 또 빼앗길 수 없어요. 제발요. 남작님, 제발 사샤를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일어나게.”
샤네리의 머리 위로 남작의 침착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내게 사샤의 목숨을 구걸할 필요는 없다.”
“남작님…….”
“내가 설마 사샤를 이레사 공작에게 넘기는 걸 걱정하는 거라면 그만두도록 하게.”
남작이 단호히 샤네리에게 고했다.
“난 자네와 같이 이레사 공작 그 개새끼를 당장 죽이고 싶으니까.”
그 말을 들은 샤네리는 멍하니 남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이내 남작의 뜻을 깨닫고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작은 그런 샤네리에게 손수 차를 권했다.
샤네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찻잔을 받았다.
“자네는 귀족 사회와 거리가 머니 몰랐겠지만, 지난 2년 동안 이레사 공녀는 공석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남작의 차분한 목소리가 차가운 집무실의 공기를 뭉갰다.
“이레사 공녀는 계속 집에만 틀어박혀서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그건…….”
“이레사 공작이 사샤를 데리고 간 건 그 아이가 다섯 살일 때의 일이었지.”
인페르나 남작의 예리한 시선이 샤네리에게 닿았다.
“그때부터 4년간 귀족 예법을 익히게 했었으니…… 귀족 노릇을 제법 잘 해냈었겠군.”
“…….”
이에 샤네리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사샤에게 과거의 일을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사샤가 공작가에 있을 때 어떻게 지냈는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남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2년 전 사샤가 사라지면서 이레사 공작은 또 다른 대역을 찾았어야 했겠지. 그리고 아마 또 다른 붉은 머리카락과 녹색 눈을 가진 평민 여자아이를 납치해 왔을 테고.”
“…….”
“그 아이가 과연 이레사 공녀의 대역을 잘 수행해 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사샤를 대체한 또 다른 가짜 이레사 공녀는 아마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샤가 샤네리와 마로크에게 돌아온 건 2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사샤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다.
그렇다면 이레사 공작은 또 다른 아홉 살의 평민 여자아이를 납치해 와서 자기 딸 노릇을 하도록 시켰다는 것이다.
아홉 살이 되도록 예법은커녕 글 쓰는 법도 배운 적이 없을 것이 분명한 평민이 이레사 공녀 역할을 잘 해냈을 리가 없다.
“최근에 내가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하나 입수했다.”
인페르나 남작이 덤덤한 목소리로 제 말을 이었다.
“이레사 공작이 제대로 귀족 행세를 하지 못하는 자신의 딸에게 크게 화를 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제 딸에게 손찌검을 했다던데…….”
그 말을 하며 인페르나 남작은 씁쓸한 표정으로 샤네리를 바라보았다.
“아마 이레사 공작에게는 또 다른 공녀가 필요한 모양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