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인페르나 남작의 지적 같은 말에 샤네리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남작님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건지.
혹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건지.
그러나 샤네리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사샤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만 것일까.
입을 꾹 다문 채, 샤네리는 지금쯤 의무실 앞에 서서 제 아빠가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사샤를 떠올려 보았다.
* * *
샤네리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러나 신은 그녀에게 자상한 남편과 화목한 집안을 허락하였지만, 아이만큼은 좀처럼 내어주지 않았다.
샤네리와 마로크는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슬하에 아이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아이를 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씨 착한 몇몇 이들은 두 사람에게 몸에 좋다는 약초나 허브차를 내어주었다.
샤네리와 마로크 역시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노력을 해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괜찮아, 샤네리. 우리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살면 그걸로 된 거잖아.”
마로크는 어설프게나마 자신의 아내를 위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로크 자신도 그 위로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영양가가 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두 사람의 마음에는 큰 구멍이 난 것처럼 느껴졌다.
해가 거듭될수록 샤네리와 마로크의 눈에 한 아이의 존재가 더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 아이의 이름은 티엔리사.
샤네리의 먼 사촌 오빠인 한스의 외동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샤네리와 한스는 어린 시절 오누이처럼 함께 지냈다.
그러다 샤네리가 마로크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한스가 살고 있던 센레이나 마을을 떠났다.
그 뒤로 한스도 제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았다.
한스의 딸이 태어나던 날, 샤네리는 마로크와 함께 마차를 타고 센리이나 마을로 달려갔다.
아기는 한스의 아내의 품에 꼭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너무 귀엽다.”
샤네리는 아기에게서 두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렇지?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야.”
한스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기 이름은 뭐야? 벌써 정했어?”
“응. 티엔리사.”
“뭐어? 티엔리사? 세상에나!”
그 이름은 들은 샤네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빠, 아이 이름이 너무 귀족처럼 고풍스러운 거 아니야? 나중에 아이가 크면 부담가지겠다.”
샤네리의 웃음을 들은 한스는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런가? 그럼 애칭을 지어줘야겠네.”
“그럼 사샤라고 해.”
“사샤? 듣기 귀엽네. 그걸로 하자.”
그렇게 한스의 딸 티엔리사는 ‘사샤’라는 이름으로 자라났다.
물론 출생 신고와 같은 공식 서류에는 ‘티엔리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사샤가 자라날수록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샤네리의 마음은 더 커졌다.
이는 그녀의 남편인 마로크도 마찬가지였다.
샤네리와 마로크는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사샤의 생일날은 꼭 챙겨주었다.
사샤는 제 어머니를 쏙 빼닮아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탐스럽게 익은 열매처럼 빛나는 색채였다.
샤네리와 마로크는 그런 사샤의 찬란한 붉은 머리카락과 맑은 연두색 눈동자를 사랑했다.
그러다 사샤가 다섯 살쯤 되던 해였다.
“샤네리! 마로크!”
해가 온전히 뜨지도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샤네리와 마로크를 누군가가 깨웠다.
급히 숄을 걸치고 내려가 문을 열자, 창백한 얼굴을 한 한스와 그의 아내가 밖에 서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런 이른 시간에…….”
“사샤, 사샤가……!”
한스와 그의 아내는 비탄에 젖어 울부짖었다.
그대로 문 앞에 쓰러진 두 사람은 목 놓아 흐느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날 오후, 한스 부부는 사샤를 데리고 마을 장터를 돌고 있었다.
그런데 웬 남자가 다가와 사샤에게 다가오더니, 이내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한스 부부는 얼른 사샤를 뒤로 감추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저희 딸아이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 이 아이는 두 분이 딸이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아이와 비슷해서 잠시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문을 연 남자는 자연스럽게 한스 부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을 다른 영지에서 온 사람이라고 밝혔다.
“인페르나 영지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남자의 말을 들은 한스 부부가 조금은 경계심이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인페르나 영지는 여행지로 적합하지 않았다.
볼 만한 자연 풍경이나 건축물 하나 없고, 가진 것이란 황폐한 대지뿐인 인페르나 영지.
그런 영지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아, 저는 신을 섬기는 수습 사제입니다. 여러 영지를 돌면서 왕국 각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찰하며 수행하는 중입니다.”
“사제님이라고요? 그렇다면 마력을 가지고 계시겠군요.”
“네, 미약하지만 조금이나마…….”
남자는 쑥스럽다는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 위로 작은 빛이 웅웅 피어났다.
“우와.”
난생처음 마법을 본 사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자와 그의 손 위에 피어난 빛을 바라보았다.
인페르나 영지에는 마력을 가진 이가 거의 없었다.
“자, 한 번 만져보지 않을래?”
남자는 사샤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샤는 자신의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남자의 손 위에 둥둥 떠 있는 빛을 바라보던 한스 부부는 사샤에게 눈짓을 했다.
부모의 암묵적인 허락을 구한 사샤는 남자의 손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빛이 사샤의 손을 통과하듯 움직이다가, 이내 사라졌다.
“우와, 신기해요.”
사샤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런 사샤를 보며 웃었다.
“사실 제게도 이렇게 생긴 조카가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한스 부부에게 말했다.
“붉은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죠. 흔치 않은 조합이잖아요? 그래서 제 조카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간 남자는 예의 바르게 한스 부부에게 사과를 올렸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따님에게 말을 걸어서 기분이 나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요.”
생각보다 점잖은 남자의 태도에 한스 부부는 경계심을 느슨히 풀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남자가 사제라는 말에 두 사람은 긴장감을 늦추었다.
사람 좋은 한스 부부는 그렇게 남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그러다가 남자가 한스 부부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제가 마침 이 마을에서 하루 숙박을 하려 하는데요, 혹시 추천해주실 수 있는 여관이 있습니까?”
“아, 저희 마을에는 여관이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왕국에서도 시골 중의 시골로 통하는 인페르나 영지였다. 볼 것 하나 없는 이곳에 관광하러 오는 여행객 하나 없었다.
그러니 여관이 있을 리가.
한스 부부의 말을 들은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관이 없다니, 그게 정말입니까? 그것 참…… 큰일 났군요. 오늘은 숲에서 외박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그러면서 남자는 은근슬쩍 한스 부부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괜찮으시면 마구간이나 창고에 하룻밤만 재워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한스 부부에게 은화 몇 닢을 보였다.
그 돈을 본 한스 부부는 은화만큼이나 커다랗게 두 눈을 떴다.
고작 하룻밤 재워주는 것치고 과분한 사례였다.
‘어떡하지?’
은화를 본 한스 부부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그리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염치없지만…… 만일 저녁 식사도 대접해주실 수 있으시면 돈을 더 드리겠습니다.”
남자의 손바닥 위에 놓인 은화가 몇 개는 더 늘었다.
한스 부부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남자는 그대로 한스 부부의 집으로 초대되었다.
“마침 손님방이 비어 있습니다. 이쪽을 쓰시면 됩니다.”
한스 부부는 남자에게 부엌 옆에 딸린 작은 방을 보여주었다.
“꽤 쾌적하군요. 실례지만 두 분은 어디서 주무시나요?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방을 쓱 살펴본 남자가 물었다.
이에 한스 부부는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거실 반대편에 있는 방에서 잡니다.”
“따님도 같이 자는 겁니까?”
“하하, 아니요. 아이는 위에 있는 다락방에서 지냅니다.”
한스는 남자에게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그렇군요. 아주 좋습니다.”
남자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간단히 방에서 휴식을 취한 남자는 곧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다.
“따님의 이름이 무엇이지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남자가 한스에게 물었다.
“사샤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사샤, 너는 몇 살이니?”
남자가 식탁 끝자락에 앉아 손으로 빵을 쥐어 먹고 있던 사샤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섯 살이에요.”
사샤가 남자를 향해 다섯 손가락을 뻗어 보였다. 그렇게 말하는 사샤의 입가에 잼이 묻어 있었다.
“다섯 살이라니. 제 조카와 동갑이군요.”
“호오, 그런 우연이 다 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당장 제 조카 대신 따님을 데려다 놓아도 되겠는데요?”
“하하, 그렇습니까?”
한스 부부는 대수롭지 않게 남자의 말을 받아넘겼다.
누구인지도 모를 아이의 자리에 사샤를 대신 데려다 놓는다니.
그야말로 실행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저 터무니없는 농담이 아닌가.
저녁 식사를 마친 남자는 한스 부부에게 은화 여덟 닢을 내밀었다.
“내일 떠나시기 전에 주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내일 새벽에 일찍 떠날 예정이어서요.”
남자가 싱긋 웃으며 한스 부부에게 고했다.
“일찍 떠나신다니, 얼마나 이른 시간에 출발하시려고요? 사례도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아침 식사 정도는 챙겨드릴 수 있는데…….”
“하하, 마음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느긋한 마음으로 여행하는 게 아니어서 말이지요.”
남자가 한스 부부에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고했다.
“당장 내일 급히 가야 할 목적지가 있어서요.”
그것이 남자가 한스 부부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다음 날 새벽,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샤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