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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42)화 (42/177)

42화

나는 베실에게 계속 그 아저씨에 대해서 물었다.

이름이 뭔지, 어디서 온 사람인지, 나를 왜 찾는 건지.

그러나 베실은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우리 마을에 사는 사람이야?”

“아뇨, 처음 보는 아저씨였어요! 엄청나게 멋진 말을 타고 계셨어요! 말꼬리가 갈색이었는데 꼭 머리카락처럼 부드럽고 예뻤어요! 그리고……”

그 뒤로 베실은 말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웠는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듣다 못 한 내가 베실의 말을 뚝 끊었다.

“잠깐만, 베실. 그래서, 그 아저씨가 나를 아는 사람이래?”

“그러겠죠? 언니 이름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겠죠’라는 대답은 도대체 뭐야?

베실의 대답에 나는 더더욱 미궁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베실, 그 아저씨가 자기는 어디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지 않았어?”

“아뇨, 그런 말은 없었는데요?”

“흐음…….”

그러니까, 난생처음 보는 사람인데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외지인이라 이거지?

“그 아저씨는 지금 마을 입구 근처에서 언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가서 만나보세요!”

예쁜 구슬 때문에 흥분한 건지 아니면 아직 나이가 어려서 사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건지, 베실은 계속 내게 그 아저씨를 만나러 가라며 아우성이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나는 이내 베실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베실은 이제 고작 여섯 살이 된 꼬마다. 그런 베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냥 어떤 어른이 나를 데리고 오라고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했겠지.

‘도대체 누가 날 찾는 거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 혹시……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보낸 사람인가?’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마침 로지에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인페르나 남작가에서는 돌아온 도련님을 위해 여러모로 바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에는 마차가 아니라 하인을 보내서 같이 말을 타고 남작가까지 오도록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가서 만나보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베실에게 고개를 돌렸다.

“베실, 괜찮으면 숲에 가서 데클란 오빠를 찾아줄래?”

“데클란 오빠요?”

“응. 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주렴. 그러면 오늘 남작가에서 사탕 하나 가져다줄게.”

“좋아요!”

사탕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베실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힘차게 대답했다.

베실을 데클란에게 보낸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나를 찾는 사람이 정말 인페르나 남작가의 하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데클란을 불러와서 하인과 함께 남작가로 같이 출발해야 했다.

‘로지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베실이 만난 남자가 남작가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혹시 작년에 만난 강도 같은 부류인가?’

그런 생각을 했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나를 찾는 이가 강도였더라면 내가 아니라 베실을 잡아갔을 테다. 아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납치했을 테니까.

게다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내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나? 이런 시골 촌동네까지 내려와 나를 찾을 정도로?

그때, 내 머릿속에 부모님이 언젠가 내게 해줬던 말을 떠올랐다.

‘사샤, 너 혹시…… 네가 우리 친딸이 아닌 것도 기억나지 않니?’

멧돼지 사건 이후, 내가 머리를 다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 일이었다.

부모님은 분명히 내가 친딸이 아니라고 말했었지.

그렇다면, 혹시.

‘……내 친아버지?’

드디어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건가?

혹시…… 평민 고아인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어느 높으신 귀족의 잃어버린 외동딸?

—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럴 리가 없지.’

마을의 어른들에게서 다 들었다. 내 친부모님은 인페르나 영지에 있는 다른 마을에 살던 농부들이라고.

듣자 하니 내 친부모님이 죽고 지금의 엄마와 아빠가 나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다고 했다.

이것도 아닌 것 같고, 저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게 계속 머리를 굴렸지만,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인지 종잡을 수 없다.

남작가의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아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전혀 확신이 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야지?

이럴 때는 만능의 주문을 외쳐보도록 하자.

“엄마, 아빠!”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급히 부모님을 찾았다.

“무슨 일이니, 사샤?”

부모님은 이제 막 밭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다가갔다.

“누가 절 찾아왔데요.”

“음? 누가 말이니?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벌써 사람을 보낸 거야?”

“음,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문을 연 나는 부모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부모님의 안색이 눈에 띌 정도로 나쁘게 변했다.

“듣고 보니 조금 의심스럽구나.”

“그죠? 그래서 엄마랑 아빠한테 먼저 말한 거예요.”

“잘했다, 사샤야. 엄마랑 아빠랑 같이 가보자꾸나.”

“아, 그 전에 잠깐만요.”

나는 급히 종이 한 장을 꺼내 그 위에 짤막한 쪽지를 휘갈겨 썼다.

[데클란.

나 엄마랑 아빠랑 마을 입구에 잠깐 갔어.

곧 돌아올게. 기다려.]

나는 데클란을 위해 식탁 위에 그 쪽지를 남겨두었다.

‘곧 돌아올게’라고 쓴 이유는 간단했다.

부모님과 함께 마을 입구로 가서 나를 찾는다는 남자가 인페르나 남작가 사람인지만 확인하고 돌아올 생각이어서.

‘바로 출발할 수도 있으니까 짐도 챙겨야지.’

나는 내가 직접 만든 가방을 어깨에 둘렀다.

가방 안에는 목검 한 자루, 이번에 재배한 옥수수 몇 개, 그리고 지난가을에 케쉬키로부터 구매한 총이 들어있었다.

참고로 총은 로지에에게 자랑하려고 챙긴 거다.

그렇게 나와 부모님은 마을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뜨거운 여름 태양이 중천으로 떠오르지 않은 이른 시각.

마을 사람들은 거의 전부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여 마을 입구는 텅텅 비어 있었다.

“저기 누군가 있어요.”

엄마가 아빠에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과연 베실의 말대로 마을 입구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말 한 마리 옆에 평범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몸이 상당히 우락부락했다.

‘힘 좀 쓰게 생겼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가방을 쥔 손에 힘을 꾹 넣었다.

부모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일부러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쪽이 우리 딸을 찾았어요?”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아빠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남자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에 아빠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쪽은 어디서 온 누구요? 우리 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온 사람이오?”

“…….”

여전히 남자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남자는 내 아빠를 흘끔 쳐다보더니, 이내 흥미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에 엄마가 발끈 화를 내듯 남자에게 외쳤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에요?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수상한 사람이 있다고 파수꾼에게 신고하겠어요.”

“…….”

대신 남자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뭐야? 기분 나쁘게.’

난데없는 시선에 나는 괜스레 긴장감이 들었다.

“……사샤?”

나를 빤히 주시하던 남자가 대뜸 내 이름을 읊조렸다.

“……?”

나는 대답 대신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베실의 말이 맞았다. 이 남자는 이 마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부모님도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이 지역에 오랫동안 산 엄마와 아빠는 웬만한 사람들과 다 면식이 있었다.

‘이 영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내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방에서 삐죽 튀어나온 목검을 잡으려던 바로 그때.

남자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레사 공녀님, 드디어 찾았군요. 모시러 왔습니다.”

“……네?”

남자의 말을 들은 내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레사 공녀님?

‘여주가 여기서 왜 나와?’

이레사 공녀라면 데클란의 미래 와이프 아닌가?

그녀는 지금 왕국 수도에 있는 이레사 공작가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을 텐데……?

혼란스러워진 나는 부모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시야에 들어온 부모님의 얼굴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엄마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나를 뒤로 숨겼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나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남자의 태연한 목소리가 뒤로 이어졌다.

“난 공작님의 귀한 따님을 모시러 왔을 뿐이다.”

“헛소리하지 마! 사샤는 우리 딸이야!”

“공녀님을 납치해 간 주제에,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납치라니! 애초에 멋대로 사샤를 데려간 건 당신들이잖아!”

“말이 안 통하는군. 이래서 미개한 평민들이란.”

혀를 쯧, 찬 남자가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이레사 공녀님, 어서 공작가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뒤에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 잘못 봤어요.”

지금 이 남자는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이레사 공녀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원작 소설에 따르면, 이레사 공녀는 줄곧 왕국 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왕국의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것들만 보고 자라난 귀한 아가씨였다.

“전 이레사 공녀가 아니라, 사샤예요.”

그런 이레사 공녀가 이런 시골에 처박혀 있을 리라 없잖아.

내 대답을 들은 남자는 곤란하게 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쯧, 하고 찼다.

“공녀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공작님이 공녀님을 어찌나 애타게 찾고 계신데요.”

“그러니까 사람 잘못 찾으셨다니까요.”

“하…… 정말 말이 안 통하네.”

남자가 말의 배를 걷어찼다.

“쓰잘머리 없는 평민들 같으니라고.”

남자의 발에 차인 말이 히이잉, 울며 앞발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흥분한 말이 제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어, 어어?”

말이 나와 부모님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불과 10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아, 안 돼!”

자리에서 주저앉은 엄마가 나를 꽉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몸이 휘청 꺾이며 시야가 가로막혔다.

나를 끌어안은 엄마의 등 너머로 우리를 향해 질주하는 말이 보였다. 사방에는 흙먼지가 일어나 있었다.

“피해라, 사샤!”

아빠가 급히 나와 엄마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아무리 성인이라고 해도 사람 혼자서 날뛰는 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아빠의 그림자가 쓰러졌다.

“아빠!”

“여보!”

나와 엄마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땅 위로 쓰러진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쳇, 귀찮게.”

바로 옆에서 말발굽이 땅을 치는 소리가 웅웅 머리를 울리게 했다.

그 소음 너머로 남자가 혀를 차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그러니까 곱게 말할 때 공녀님을 돌려주면 좋았을 것을.”

“미친 소리 하지 마!” 

엄마가 나를 더더욱 꽉 끌어안으며 목청이 찢어질 듯이 외쳤다.

“사샤는, 내 딸은! 어느 정신 나간 귀족의 가짜 딸 노릇을 하려고 태어난 애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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