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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41)화 (41/177)

41화

시간이 계속 흘러 여름이 찾아왔다.

어느 초여름의 아침이었다.

‘오늘이다!’ 

침대 위에 누워 쿨쿨 자던 나는 순식간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창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커튼을 촥 열어젖히자, 환한 아침 햇살이 창문의 유리 너머로 스며들어왔다.

새로운 하루가 밝은 것을 보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오늘 드디어 로지에 도련님이 오시는 날이구나!’

그랬다.

오늘은 작년 여름이 끝나고 도시로 떠나갔던 로지에가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오는 날이다.

여름에만 잠깐 영지로 돌아오는 로지에는 몇 주 전부터 나와 데클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시 여름이 찾아와 우리를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는 것이었다.

기쁜 건 나와 데클란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우리 둘이 기뻐하는 방향은 조금 달랐다.

나는 로지에가 돌아와 인페르나 남작가로부터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어서 기뻤다.

‘오늘은 남작가로 가서 밥 두 그릇 먹어야지. 그리고 하녀 언니한테 디저트로 초콜릿케이크 달라고 해야지. 아, 그리고 푸딩도 먹고 싶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며 즐거운 상상에 잠겼다.

반면 데클란은 며칠 전부터 더 검술 연습에 증진했다.

“이번에야말로 로지에 그 자식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버릴 거야.”

데클란은 로지에와 결전을 앞두고 기뻐하고 있었다.

당장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데클란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로지에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었다.

“기다려 봐, 사샤. 내가 내일 당장 로지에 놈을 때려눕힐 거야.”

하루 종일 나와 검술 대련을 마친 데클란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는 정말이지 로지에와 1:1로 검술 대결을 할 생각에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곁에서 목검을 다듬고 있던 나는 데클란을 흘겨보았다.

“로지에 도련님이 너한테 뭐 잘못했다고 그래? 왜 도련님을 잡아먹지 못해서 난리야?”

“그냥 마음에 안 들어.”

“왜? 도련님은 우리한테 잘해주시잖아. 그리고 검술 실력도 뛰어나고, 그리고 저번에 나한테 목걸이도 선물로 주시고.”

“그래서 싫어.”

“어?”

데클란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얘 지금 로지에가 나한테 목걸이를 사줘서 기분이 안 좋다는 건가?’

나는 주머니 안에 넣어둔 녹색 보석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목걸이를 잘 착용하지 않았다.

선물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데클란과 검술 훈련을 할 때마다 땀 때문에 목걸이가 목에 달라붙었다.

검술 연습을 할 때 목걸이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데클란은 내가 이 목걸이를 목에 걸려는 시늉만 해도 자꾸 뭐라고 중얼거렸다.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둥, 내 옷에 어울리지 않다는 둥, 그런 조그만 조각이 달린 목걸이가 뭐가 좋으냐는 둥.

여하튼, 데클란은 내가 이 목걸이를 하는 걸 결사반대했다.

나는 처음에 데클란이 질투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만일 데클란이 정말 질투를 해서 그렇게 투덜거리는 거라면 아마 내게 자신이 직접 목걸이를 선물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데클란은 나한테 여태껏 목걸이 선물한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한 가지.

‘로지에가 자기한테는 아무것도 선물 안 줘서 삐진 거구나…….’

나는 측은한 눈으로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로지에는 오로지 내게만 선물을 주었다. 그는 데클란에게는 딱히 아무것도 챙겨주지 않았다.

‘하긴, 자기도 비싼 선물 한번 받아보고 싶었겠지.’

데클란을 빤히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돈 벌어서 데클란에게 비싼 선물 해 줘야겠다.’

나나 데클란이나 아직까지는 둘 다 수입이 없는 꼬마였다.

게다가 이런 시골 동네에는 생필품 외에는 돈을 쓸 곳이 없기에 용돈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중에 데클란이 제대로 원작 궤도에 오르게 된 뒤, 나도 이 마을을 떠나 큰 도시로 떠나자.

그리고 도시에서 일해서 모은 돈으로 선물을 사서 데클란에게 보내야지.

물론 나중에 데클란이 이레사 공녀와 연애를 하게 되면 그녀로부터 훨씬 더 좋은 선물을 받게 될 테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아무도 데클란에게 선물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대신 데클란의 부족함을 채워줘야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아련한 미소로 데클란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시선을 느낀 데클란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너 잘생겨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흘렸다.

사실이었다.

올해 11살이 된 데클란은 가면 갈수록 더 미모가 빛이 났다.

나이가 조금 많은 같은 마을의 여자아이들은 데클란을 보고 꺄르르 웃으며 얼굴을 가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이 언니들, 벌써부터 미남을 알아보는군.’

그간 잘 먹고 잘 자고, 잘 뛰어놀고 지낸 데클란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나중에 너 유명해지면 나 모른 척하기 없기다?”

내가 장난치듯 팔꿈치로 데클란을 슬쩍 쿡쿡 찔렀다.

내 실없는 장난에 데클란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내가 왜 널 모른 척 해? 당장 옆집에 살고 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나중에 우리 둘 다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말이야.”

“어른이 되었어도 넌 항상 내 옆에 있을 거잖아. 아니야?”

얘는 이럴 때 보면 참 상상력이 없다니까.

간혹 데클란은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마치 내가 평생 자신의 이웃사촌으로 지낼 것처럼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바로 어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데클란, 넌 커서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이런 작은 시골 마을에 남아 있을 인재가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알겠지?”

“…….”

데클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진 나는 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 이제 집에 가서 일찍 자자. 내일 인페르나 남작님이랑 로지에 도련님 만나러 가는 날이잖아!”

그렇게 내 물건을 챙기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사샤.”

데클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데클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샤 너도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응……? 아, 그래. 고마워.”

갑작스러운 덕담에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항상 데클란에게 ‘넌 할 수 있어! 포기하지 마! 멋진 미래가 널 기다리고 있어!’ 따위의 말을 하니, 데클란도 이제 내게 똑같이 해주려는 모양이다.

데클란의 말이 뒤를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 다 함께 멋진 어른이 되자. 그리고 같이…….”

“그리고?”

“……같이 살래?”

잠시 머뭇거리던 데클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

나는 멍하니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지.

“그, 그러니까…… 사샤 네가 항상 그랬잖아. 나는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그리고 또…….”

“데클란.”

나는 데클란의 말을 뚝 잘랐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꿈을 크게 가져.”

나는 두 손으로 데클란의 어깨를 꽉 잡았다.

“넌 고작 가정부로 인생을 마감할 애가 아니잖아.”

“……가정부가 되고 싶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데클란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럼 무슨 뜻으로 말한 건데?”

“……됐다. 그냥 말을 말자.”

데클란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선지 그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왜 저래?’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데클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나와 데클란은 조용히 집까지 걸어갔다.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내가 데클란을 향해 손을 휘휘 흔들며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데클란이 대뜸 입을 열었다.

“사샤.”

“응? 뭔데?”

“너, 내가 좋아, 아니면 로지에가 좋아?”

“뭐래. 당연히 네가 좋지.”

나는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는 식으로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왜?”

“왜냐니. 그야 넌 내 친구잖아.”

데클란의 질문에 내가 곧장 답을 돌려주었다.

데클란과 로지에 중 한 명을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데클란이다.

로지에가 아무리 착하고 친절해도, 그는 기껏해야 여름에 잠깐 이곳에 오는 귀족 집 도련님이었다.

애초에 로지에는 데클란의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내 대답을 들은 데클란의 얼굴에 단번에 환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그래. 너 속고만 살았어?”

“거짓말 아니지? 난 거짓말하는 사람 싫어.”

“난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 거짓말 못 해. 그러니까 어서 집에 가서 발 씻고 이 닦고 잠이나 자.”

내가 데클란을 향해 휘휘 손을 내저었다.

데클란은 찬란한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게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침 식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머, 사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조금 먹니?”

내 접시를 본 부모님이 조금 놀란 듯이 감탄 소리를 냈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머릿속에는 어서 인페르나 남작가로 가서 맛있는 것을 잔뜩 먹을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모님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옥수수는 그만 먹고 싶단 말이지.’

그렇게 평소보다 빠르게 아침 식사를 끝낸 나는 데클란의 집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그러나 데클란은 집에 없었다.

“데클란은 검술을 연습한다고 숲으로 갔단다. 너랑 같이 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데클란의 엄마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숲으로 갔다고?’

물론 데클란이 이른 아침부터 숲으로 간 건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우리는 줄곧 아침부터 조용한 숲에서 검술 연습을 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로지에를 만나는 날이었다.

오전에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우리를 태울 마차가 온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데클란에게 오늘 아침에는 훈련을 하지 않고 집에서 쉬자고 했다.

‘그런데 데클란 이 녀석, 또 훈련을 하러 갔다니.’

아무래도 어지간히 로지에를 이기고 싶었던 모양이지?

승부 욕에 불타오르는 데클란의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연습 잘하고 있는지 한 번 보러 갔다 올까?’

나는 데클란을 만나기 위해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을 지나 걸어가고 있던 도중이었다.

“어, 저기 사샤 언니다!”

마을 아이들 중 조금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를 보고 다가왔다.

이름이 베실이라고 했었던가.

참고로 작년 이후로 케쉬키나 다른 아이들은 알아서 나와 데클란을 피해 다녔다.

그렇지만 비교적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나와 데클란을 보며 친해지려고 했다.

로지에의 놀이 상대 신분으로 인페르나 남작가에 들락날락하는 우리를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사샤 언니, 저 마침 언니 찾으러 집에 가던 중이었는데!”

나를 향해 한걸음에 달려온 베실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째선지 베실의 얼굴은 기쁜 기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아저씨가 언니를 찾아요!”

“음? 그게 누군데?”

베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 수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한테 이걸 줬거든요!”

그러면서 베실은 내게 무언가를 자랑하듯 내밀었다.

유리로 만든 커다란 구슬이었다.

이곳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울퉁불퉁한 구슬과는 차원이 다른 높은 품질의 구슬이었다.

베실의 신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 아저씨가 언니를 꼭 만나고 싶데요. 아, 근데 언니 부모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딱 들어도 엄청나게 수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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