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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39)화 (39/177)

39화

똑똑똑.

나는 인페르나 남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남작님, 저예요. 사샤.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사샤. 안으로 들어오너라.”

남작의 허락을 받은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남작은 단정한 차림을 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집무실 안에는 로지에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자기 방에 있는 모양이다.

“내가 너를 알게 된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나가는구나.”

내게 자리를 권한 남작이 손수 찻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돕겠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찻물을 우려내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간 네 검술 실력이 아주 늘었어.”

“감사합니다.”

인페르나 남작은 내 앞에 놓인 찻잔에 티팟을 기울였다.

“사실 난 처음에 네가 데클란과 같이 검술을 배우겠다는 말에 조금 놀랐었단다.”

아니요, 남작님.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요…….

찻잔을 집어 들며 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단언컨대 나는 인페르나 남작이 데클란에게 검술을 가르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그저 남작이 데클란에게 화를 내지 않기를 바라며 대신 사과하러 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남작은 내가 데클란을 따라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고는 나도 데클란과 함께 따라오라고 했다.

어쨌든, 나도 덕분에 검술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애초에 배울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하자.

데클란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고, 로지에라는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로지에가 떠난 뒤에도 훈련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알겠느냐?”

“네.”

“내년에 로지에가 돌아오면 다시 저택으로 초대하마. 그때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하도록 하지.”

그 말과 함께 인페르나 남작이 얕은 웃음을 흘렸다.

“…….”

나는 멍하니 남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 무표정을 고수하던 인페르나 남작이었다. 그런 그녀가 미소를 띠는 경우는 매우 희귀했다.

‘이런 표정도 지으실 줄 아는 분이셨구나…….’

제법 낯선 남작의 모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나저나, 내가 네게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었단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작이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남작의 얼굴이 평소와 같이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내가 물음에 거짓을 고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네.”

“너도 알겠지만 난 사샤 너를 제법 좋아한다. 그러니 내가 널 위험에 빠트릴 일은 없을 것이다. 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도록 하지.”

“아…… 네.”

남작의 진중한 선포를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고 하기에 이런 밑 작업을…….

“이레사 공작가에 대해 아느냐?”

남작의 첫 질문이 떨어졌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이레사 공작가에 대해서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데클란의 운명의 상대가 바로 이레사 공녀 아니던가.

“알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 대답을 들은 남작이 날카롭게 추가 질문을 던졌다.

“음, 그냥 어디선가 들어봤어요. 꽤 유명하잖아요, 이레사 공작가.”

나는 그렇게 대충 얼버무렸다.

남작은 자신의 물음에 진실만을 고하라고 했지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남작에게 ‘제가 사실 소설에 빙의했는데요, 이 소설 여주가 바로 이레사 공작가 출신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말을 했다간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유명하다라…….”

내 대답을 들은 남작의 반응이 미묘해졌다.

“다시 질문하지. 이레사 공작가는 무엇 때문에 유명한가?”

“그야…… 수도에 있는 귀족 중 가장 돈이 많은 집안 아닌가요?”

“그 외에는?”

“음…… 국왕 폐하와 친한 것 같기도 한데요.”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열 살짜리 아이가 할만한 말을 골라냈다.

물론 나는 이레사 공작가에 대해 이것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원작 소설에 따르면, 이레사 공작부인은 일찍이 이레사 공녀를 낳다가 사망했다.

이레사 공작은 사랑하는 아내가 남기고 간 자신의 외동딸을 끔찍이도 아꼈다.

어릴 적에 외동딸이 소풍을 나섰다가 괴한에게 납치됐다가 돌아온 뒤로 이레사 공작의 딸 과보호는 점점 더 심해졌다.

공작이 항상 자기 딸에게 호위 기사를 최소 다섯 명을 붙였다. 거기다가 자기 딸을 일체 외부에 보내지 않았다.

‘애초에 데클란이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로 따라간 이유가 있지.’

데클란은 여타 다른 호위 기사들보다 실력이 더 월등히 뛰어났다.

그런 데클란은 당장 자기 딸에게 열 명의 호위 기사를 붙이겠다는 이레사 공작의 과도한 요구를 잠재울 수 있는 열쇠였다.

‘하지만 이런 건 평민인 내가, 그것도 시골에 사는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지.’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고 있기로 했다.

“……사샤 넌 본래 내 부모님의 친딸이 아니라고 했었지.”

잠시 나를 응시하고 있던 남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남작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란 기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남작님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

나와 부모님 사이의 비밀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남작에게 반문하려던 나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잠깐만.’

남작은 이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보통 출생의 비밀이라면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나?’

아니면 듣는 사람이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니 일부러 애매하게 에둘러서 말하던가.

그러나 남작님은 그런 태도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들었다는 것을 강조하듯 당당히 말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내 부모님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추론에 도달하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일 테다.

괜히 숨기려 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판단이 옳았는지 남작은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넌 혹시 네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또 출생의 비밀 관련된 질문을!’

남작의 질문에 물음표가 찍히기가 무섭게 나는 고민했다.

남작은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어쩌면 내 친부모는 좋든 나쁘든 어쨌든 유명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작이 내게 묻는 걸지도.

아니면 남작은 정말 단순히 호기심에 이런 질문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질문의 의도가 어찌 됐든,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입을 닫고 있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자칫하다 남작이 나를 의심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곤란한 상황이었다. 나는 내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내게는 빙의한 이후의 기억만 있었지, 그전에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내 부모님에게 사용했던 것과 같은 카드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저…… 제 친부모님이 누군지 몰라요.”

“모른다?”

남작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나는 태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사실 몇 달 전에 아빠와 함께 옥수수를 팔러 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요, 그때 마차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면서 제가 머리를 심하게 다쳤어요.”

거짓말이 아주 강물처럼 촬촬 흘러내렸다.

나는 짐짓 슬픈 기색을 띠며 말을 이어갔다.

“그 뒤로 옛날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잘 안 나요. 그래서 제 친부모님도 누군지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내 말을 들은 인페르나 남작의 안색이 조금 어둡게 변했다. 그녀는 내 말을 곧이 믿는 기색이었다.

“머리를 다쳤다니, 큰일 날 뻔했구나. 기억을 잃은 것 외에는 괜찮은가?”

“네, 몸은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인페르나 남작의 얼굴을 살폈다.

‘뭐지? 나한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나는 남작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행여나 표정을 통해 그녀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남작의 심중을 읽을 수 없었다.

“수고했다. 이제 나가 보아라.”

내가 남작의 안색을 더 자세히 살피려고 함과 동시에 남작이 축객령을 내렸다.

“가서 데클란과 함께 로지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려무나. 그 아이는 제 방에 있을 게다.”

“……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을 나선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뒤를 향해 고개를 흘끔 돌렸다.

집무실의 문은 굳건히 닫혀있었다. 마치 내게 단 한 치의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처럼.

‘남작님은 도대체 왜 내게 그런 질문을 하신 거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남작의 질문 공세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다시 집무실 안으로 쳐들어가 ‘근데 아까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거죠?’라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부모님에게 물어봐야겠다.’

이쯤 되자 나 자신도 내 출신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 엑스트라치고 제법 멋진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인페르나 남작은 닫힌 집무실의 문을 조용히 주시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

남작은 조금 전 사샤라는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사샤는 확실히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남작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사샤는 몇 달 전 강도에게 쫓기다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겪었다.

그 뒤로 사샤가 조금 달라졌다는 정보가 있었다.

예를 들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멀어졌던가.

난장판이나 다를 바 없던 방을 언제부턴가 깔끔하게 치우기 시작했고.

거기다가 평생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토끼 사냥에 나섰다고 했다.

‘어쩌면 정말 머리를 다쳤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한 남작은 자신의 집무실 책상 서랍을 드르륵 열었다.

서랍 가장 안쪽 구석에는 강도들에게서 압수한 브로치가 놓여있었다.

‘이레사 공작가…….’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던 남작은 어젯밤 파수꾼에게서 들은 정보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파수꾼의 보고를 들었을 때, 남작은 처음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건 정말…… 생각보다도 구역질 나고 끔찍했다.

그래.

어쩌면 사샤가 기억상실에 걸린 건 신이 내린 축복일지도 몰랐다.

‘이레사 공작…… 그 개새끼.’

브로치를 쥔 남작의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절대, 절대로 이 브로치를 이레사 공작에게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간 그 미친놈이 사샤를 또 어떻게 할지 모르는 노릇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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