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 뒤로 나와 데클란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매일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세수하고 편한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데클란이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 사샤.”
“너도 좋은 아침, 데클란.”
우리는 전투적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한 뒤, 인페르나 남작가의 마차를 기다렸다.
곧 온 마을에 소문이 퍼졌다.
“그거 알아요? 사샤랑 데클란 그 두 아이들, 매일 인페르나 남작가로 간대요!”
“아마 그쪽 도련님의 놀이 상대로 불려간 것이겠죠? 저번에 사샤가 다쳤을 때 눈에 띈 모양이에요.”
“사샤는 원래 애가 밝고 활기차서 이해가 가는데, 다른 한 명은 왜 하필이면 데클란이래요? 애 아빠도 없는 그런 애를…….”
“쉿! 사샤네 부모가 들으면 화내요. 조용히 합시다.”
마을의 어른들은 우리가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나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도 도련님의 놀이 상대로 불려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귀족의 눈에 띄는 건 즉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들은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데클란이 매일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얼마나 구르고 있는지를.
“자세가 삐뚤어졌다. 허리 더 세워.”
“검을 잡는 힘이 약하구나. 다시.”
“그 애매한 일격은 뭐지? 실전이었으면 넌 벌써 죽었다.”
매일 오전 인페르나 남작은 나와 데클란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녀는 나와 데클란의 자세를 세세히 살피며 검을 다루는 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어릴 적부터 검술 교본을 읽어온 데클란은 나보다 기본 지식이 월등히 뛰어났다.
타고난 실력도 이에 한몫했다.
처음에 나는 사기캐가 다름없는 데클란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기껏해야 그를 흉내를 내는 데에 그칠 뿐이었다.
‘하지만 포기하면 안 돼.’
나는 그런 데클란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며 더더욱 노력했다.
여기서 진도가 더 느려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남작이 내 진도에 맞춰 천천히 나가게 될 테고, 데클란은 새로운 검술을 배우지 못할 테다.
데클란이 더 심화한 검술을 배우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실력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가서 잠들 때까지 계속해서 그날 배웠던 검술을 연습하고 복습하고, 또 다음날 배우기로 한 동작을 예습했다.
“사샤 너도 제법 잘하는구나.”
줄곧 데클란만 주목하던 인페르나 남작도 점점 내 실력이 나아지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게 인페르나 남작과 오전 수련을 마친 뒤, 나와 데클란은 또 전투적으로 점심을 해치웠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내가 기분이 좋네.”
또 수프로 점심을 때운 로지에가 웃으며 나와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영양가가 높은 음식을 먹게 되니 데클란의 몸에 큰 변화가 왔다.
비실비실 말라 있던 데클란의 몸에 처음으로 살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기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몸이 제법 단단해졌다.
게다가 키도 조금씩 더 크기 시작했다.
‘보기 훨씬 좋아졌어. 예전보다도 더 건강해진 것 같고.’
점점 성장하는 데클란의 몸을 보며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지었다.
그럴 때마다 내 시선을 용케도 눈치챈 데클란이 나를 흘끔 바라보며 추궁했다.
“너 왜 자꾸 나 쳐다봐?”
“그냥, 좋아서.”
“자꾸 보지 마. 신경 쓰이잖아.”
“왜? 많이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렇게 익살스럽게 입을 이죽거리며 데클란의 볼을 한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데클란은 아무런 반론도 펼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즐거운 점심 식사 이후.
나와 데클란, 그리고 로지에는 가볍게 땀을 씻어낸 뒤 다 같이 한 방에 모여 낮잠을 잤다.
여름이 깊어지면서 해가 점점 뜨거워졌다. 그래서 한낮에는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좋았다.
데클란은 항상 내 옆에 누워서 잤다. 로지에가 코를 곤다는 이유였다.
데클란의 말을 들은 로지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참 이상하네. 난 코를 안 고는데.”
“원래 코 고는 본인은 모르는 법이지요.”
그렇게 딱 잘라 말한 데클란은 일부러 로지에와 제일 떨어진 침대를 골랐다.
“여기 와서 누워, 사샤.”
“어, 그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데클란과 같은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오전 내내 고된 훈련으로 몸이 지쳐있었다.
나는 머리가 베개를 닿는 순간 곧바로 정신을 잃으며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한 두 시간 뒤 다시 낮잠에서 깨어난 우리는 다시 연무장으로 뛰어나갔다.
목검을 든 로지에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고했다.
“이번에도 2:1이야. 잘 부탁해, 사샤 양. 데클란 군.”
“네!”
씩씩한 외침과 함께 나와 데클란은 로지에에게 덤벼들었다.
물론 우리는 매번 로지에에게 참패했다.
그러나 우리는 실력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매번 오후 대련이 끝난 뒤, 로지에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목검이 아니라 진검을 사용했으면 너희들은 오늘 28번 죽었을 거야.”
“목검 말고 진검이었으면 너희는 오늘 24번 죽었겠네.”
“진검으로 대결했으면 오늘 너희들은 19번 죽었을 테지.”
시간이 갈수록 나와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죽임당할 뻔한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화창하고 맑은 날에도, 빗줄기가 억세게 쏟아지는 날에도.
나와 데클란은 매일 같이 인페르나 남작가로 향했다.
그리고 인페르나 남작과 로지에는 늘 한결같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쉴 새 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 날.
여름의 끝이 찾아왔다.
로지에가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할 날이 성큼 다가왔다.
* * *
오늘은 로지에가 인페르나 영지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인페르나 저택은 도련님을 떠나보내는 분위기에 조금 침울해져 있었다.
이는 나와 데클란도 마찬가지였다.
“로지에 도련님……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구나.”
인페르나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내가 중얼거렸다.
데클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시로 돌아가시는 게 도련님에게도 훨씬 더 좋을 거야.”
데클란도 이제는 로지에를 ‘그놈’이라 부르지 않고 도련님이라고 꼬박꼬박 부르고 있었다.
데클란의 말을 들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도련님 건강이 또 안 좋아졌잖아.”
“하긴…….”
나는 최근 지난 며칠 간의 로지에를 떠올렸다.
여름의 막바지에 이르고 가을이 다가올수록 온도 교차가 더 심해졌다.
특히 이른 아침에는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무턱대고 반팔 셔츠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간 오소소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로지에는 기침을 심하게 하게 되었다.
‘콜록, 콜록!’
마른기침하는 로지에는 평소보다 안색이 더 창백해 있었다.
보다 못한 우리는 어제 로지에에게 오후 대련을 취소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로지에는 완고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제 다시 도시로 가면 너희들을 일 년 동안 볼 수 없게 되는걸. 마지막까지 즐겁게 지내고 싶어.’
그렇게까지 말하며 강권하니, 우리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나는 데클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련님은 내년에도 오시겠지?”
“아마 그러겠지. 건강이 특별히 나빠지신 게 아니라면.”
“데클란 넌 도련님이 내년 여름에도 왔으면 좋겠어?”
문득 드는 호기심에 내가 데클란에게 불쑥 물었다.
궁금했다.
데클란은 처음에 로지에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나.
추측건대 데클란은 로지에에게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나를 빼앗길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여름 내내 로지에는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로지에는 특히나 데클란을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데클란 군, 정말 훌륭해! 어제 배운 걸 이렇게 한 번에 터득하다니!’
‘데클란 군은 감각이 좋다고 해야 하나, 검을 잘 다루는 것 같아. 정말이지 천부적인 재능이야!’
‘데클란 군, 체력이 좋아진 게 확실히 느껴져! 건강한 건 참 좋구나! 부러워!’
그렇게 로지에는 데클란을 잘 챙겨주었다.
그러니 데클란도 어느 정도 정이 들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데클란은 내 질문에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년 여름에도 돌아오시면 좋겠어.”
“역시나!”
나는 데클란의 대답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데클란이 나 외에도 다른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뻤다.
“데클란, 너 은근히 아닌 척해도, 결국 로지에 도련님을 친구처럼 보고 있었던 거구나?”
그러자 데클란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뭐? 아니야. 나랑 도련님이랑 어떻게 친구야.”
어라?
데클란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혼란스러워졌다.
“친구가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럼 왜 내년 여름에도 도련님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 거야?”
“그야 당연히 승부를 내야 하니까.”
“……?”
데클란의 말에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부? 갑자기 무슨 승부?
“우린 여태껏 2:1로도 도련님을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잖아.”
사실이었다.
여름 내내 우리는 단 한 번도 로지에를 이길 수 없었다.
여태껏 최고 기록은 ‘진검이었으면 아마 11번 죽었을 것’이었다.
데클란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내년 여름에는 기필코 1:1로 도련님을 꺾을 거야.”
“…….”
나는 흐린 눈으로 데클란을 훑어보았다.
남자들의 우정은 참…… 경쟁으로 범벅이 되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차가 멈춰 섰다.
그 사이에 인페르나 남작가에 도착한 것이다.
“어서 오렴, 얘들아.”
“안녕하세요, 집사님.”
이제는 안면이 트인 저택의 집사에게 우리는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늘 그래왔듯이 연무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런 우리를 집사가 말로 붙잡았다.
“오늘은 연무장에 갈 필요가 없단다.”
“네? 그럼 오늘은 훈련이 없는 건가요?”
“그렇단다. 대신 남작님께서 집무실에서 보자고 하시는구나.”
그렇게 말한 집사는 내게 살짝 손짓했다.
“사샤 너만.”
“……저만요?”
“그래, 너 혼자만.”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내게 손짓했다.
나를 바라보는 집사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남작이 내게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