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렇게 나는 데클란과 함께 검술을 연습했다.
인페르나 남작은 해가 머리 위로 떴을 때야 자신의 검을 거두었다.
“수고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으아아…….”
끝마침을 알리는 남작의 선포가 떨어지자마자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간밤에 데클란이 반성문 쓰는 것을 감시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침부터 정오까지 계속 목검을 잡고 휘두르고 찌르는 연습을 했으니, 체력이 남아돌 리가 없다.
“점심 먹고 오후에 더 하도록 하지.”
그 말을 마친 인페르나 남작이 자신의 목검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죽겠어…….”
바닥에 쓰러진 내가 골골 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로지에가 나를 내려다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사샤 양. 사람은 이 정도로 죽지 않아.”
“……데클란 넌 괜찮아?”
일부러 로지에의 시선을 피한 내가 데클란에게 물었다.
“응, 괜찮아.”
데클란은 붕대가 감긴 손등으로 자신의 땀을 훔치고 있었다.
데클란은 분명히 나만큼 지쳐있을 텐데도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런 데클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계곡에서 수영하다 지쳐 쓰러졌던 아이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체력적으로 힘든 훈련을 따라오다니.
‘정말 정신력으로 버텨낸 거구나.’
새삼스럽게 데클란이 검에 대해 얼마나 열정적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대단한 걸, 데클란 군.”
로지에가 데클란에게 다가갔다.
데클란을 바라보는 로지에의 두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했다.
“데클란 군은 검술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역시 어머니가 직접 가르치고 싶다고 하신 이유가 있었어!”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의 눈망울이 크게 뜨였다.
“남작님이 저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다고요?”
“응, 맞아. 어머니…… 그러니까, 남작님께서는 어제 있었던 일을 들으시고는 크게 감명을 받으셨어. 그래서 데클란 군을 바로 남작가로 초대하셨잖아. 기억 안 나?”
아뇨, 기억 안 납니다.
‘어제는 분명 그런 뉘앙스가 전혀 아니었는데요!’
로지에의 말을 들은 내가 속으로 울컥 외쳤다.
어제 인페르나 남작은 분명히 데클란을 두고 감히 겁도 없이 자기 아들에게 검을 휘둘렀다느니, 녀석의 고약한 버릇을 고치겠다느니, 그런 말을 했다.
그게 어딜 들어서 데클란에게 감명받았다는 내용인지?
어제 밤새워 반성문을 쓴 게 아까웠다.
나무야 미안해.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며 가만히 누워있는데, 로지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물론 사샤 양도 멋져. 검을 처음 잡는 것치고 기본자세가 좋아.”
로지에는 내가 기분이 언짢다고 생각했는지 내게도 칭찬 세례를 연신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나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데클란이 저보다 훨씬 더 잘하잖아요.”
“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로지에가 쑥스러운 듯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 말을 듣자 괜히 내가 기분이 좋아졌다.
“들었지, 데클란? 도련님이 너 검술 천재래!”
“……천재는 무슨. 너무 과장되게 말하지 마.”
데클란이 덤덤히 내 칭찬을 넘겨 들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니야, 남작님도 인정하셨다잖아. 넌 최고야, 데클란.”
나는 데클란을 향해 아낌없이 칭찬을 나누며 엄지를 척, 올려주었다.
‘그러니까 네가 훗날 우리 마을 대표로 왕실 특수부대에 입대하게 되는 거 아니겠니!’
데클란 너 이 사기캐! 드디어 남주로서의 진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검을 쥔 데클란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혼자 검술을 터득했다는 원작 전개와 조금 달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인페르나 남작처럼 실력자가 데클란에게 검술을 전수해주다니.
그럼 데클란은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능력자가 될까!
그렇게 혼자 멋진 남주의 미래 모습을 상상하며 헤죽헤죽 웃고 있는데, 데클란이 나를 응시했다.
“너 뭘 그렇게 웃고 있어?”
“음? 기분 좋아서.”
“뭐가 그렇게 좋은데.”
“그냥, 데클란 네가 너무 멋져서.”
너무나 피로해서였을까.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고스란히 내뱉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너무 늦었다.
데클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악 달아올랐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데클란이 더듬더듬 그렇게 읊조렸다.
괜히 마음을 부정당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닌데, 마음에 있는 소린데.”
“뭐가 멋있어. 고작 목검을 다루는 수준인데…….”
데클란은 괜히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 아이는 언제쯤 칭찬을 듣는 게 익숙해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님, 저희 밥 먹으러 가요!”
* * *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와 데클란은 아주 걸신들린 듯이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집에서 먹는 통밀빵과 옥수수수프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호화로운 음식이었다.
나와 데클란은 각자 두 그릇을 거뜬히 해치웠다.
그런 우리를 보며 로지에는 감탄했다.
“너희 참 대단하구나. 난 그렇게 많이 못 먹는데.”
그런 말을 하는 로지에는 겨우 토마토 바질 수프 한 그릇을 비운 상태였다.
로지에는 우리에게 자신이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다고 말했다.
로지에가 본래 날 때부터 몸이 허약한 데다가, 마침 인페르나 영지의 기후와 수질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덕분에 로지에는 어릴 때부터 인페르나 영지를 떠나 인근 도시에서 자라났다.
도시는 인페르나 영지와 달리 수질이 깨끗하고 날씨도 적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에만 인페르나 영지로 오는 거구나.’
그제야 나는 로지에가 왜 일 년의 대다수를 다른 도시에서 보내는지 알 수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나와 데클란은 로지에와 함께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연무장에는 인페르나 남작이 없었다.
‘분명히 밥 먹고 오후에 또 연습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두리번거리며 남작을 찾던 나는 로지에에게 물었다.
“도련님, 남작님은 안 오시나요?”
“아, 남작님은 업무를 처리하러 가셨어.”
“아하.”
로지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이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아마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을 테다.
‘그런데도 우릴 위해서 소중한 아침 시간을 써주다니…….’
나는 인페르나 남작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친절을 베풀었는지 깨달았다.
데클란도 이를 알아차렸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작님에게 감사하다고 꼭 전해주십시오, 도련님.”
“응, 그럴게. 그럼 우리도 시작할까?”
로지에가 연무장 입구에 꽂아둔 목검을 잡아 들었다.
나는 어항 속 금붕어처럼 두 눈을 깜빡거렸다.
“뭘 시작해요?”
“오후 훈련.”
로지에가 활짝 웃으며 나와 데클란에게 목검을 내밀었다.
“남작님에게서 배운 검술, 다시 복습해야지?”
로지에는 나와 데클란을 향해 손짓했다.
“이번에도 2:1로 하자. 잘 부탁해, 사샤 양. 데클란 군.”
그렇게 지옥의 오후 훈련이 시작되었다.
* * *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단 한 번도 로지에를 이길 수 없었다.
‘역시 우리 같은 초심자와 수준이 달라.’
나는 연무장 바닥에 그대로 뻗어 누워있었다.
내 옆으로 마찬가지로 지친 데클란이 쓰러져 있었다.
로지에는 기본적으로 검에 대한 흐름을 잘 읽었다.
나와 데클란은 인페르나 남작에게 배운 대로 무작정 검을 휘두르거나 찌르는 등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럴 때마다 로지에는 능숙히 나와 데클란의 검을 피했다.
로지에의 입장에서는 가볍게 몸을 움직이기만 하는 것이니 체력 소모도 훨씬 적었다.
그리고 로지에는 나와 데클란이 힘이 빠져 느릿느릿해졌을 때를 노렸다.
효율적이면서도 전략적인 방식이었다.
“만일 오늘 목검이 아니라 진검을 썼으면 너희들은 오늘 총 39번 죽었을 거야.”
목검을 내려놓은 로지에가 명랑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그대로 바닥에 누운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정말 오늘은 온종일 검만 잡고 있었구나.
손바닥이 지끈지끈 아팠다.
“데클란.”
나는 내 옆에 누워있는 데클란을 나지막이 불렀다.
“으응, 사샤…….”
데클란도 나와 마찬가지로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원래 나보다 체력이 더 안 좋은 애였다. 게다가 어젯밤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으니 오죽할까.
“힘들지 않아?”
“힘들지. 그런데…….”
“그런데?”
“재밌어.”
데클란의 말을 들은 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다행이네.”
그래, 너만 행복하면 됐지.
나는 이제 두 눈을 완전히 감았다.
당장이라도 수마에게 붙들려 깊은 잠에 빠져들 지경이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고 눈꺼풀이 뻑뻑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은 그 무엇보다도 더 가볍고 부드러웠다.
기뻤다.
데클란이 좋아하는 것을 실컷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내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샤 너도 검이 좋아?”
옆에서 데클란의 비몽사몽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나처럼 거의 잠에 빠져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길게 하품을 한 내가 천천히 응답했다.
“아니……. 난 검보다는…….”
네가 웃는 모습이 더 좋아, 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연무장 안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왜 다들 뻗어있지?”
중압감이 있는 여성의 목소리.
인페르나 남작이었다.
“나, 남작님!”
나와 데클란은 그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로지에와 대련을 잘했나?”
인페르나 남작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와 데클란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련님께서 잘 상대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답이 씩씩해서 좋군.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아침에 또 보도록 하지.”
“……?”
남작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아니, 잠깐만요.
내일도 이 짓을 또 해야 한다고요?
“로지에가 있는 동안 매일 저택에 와서 검술을 연습하는 것으로 하지.”
내 의구심에 해답이라도 던지듯, 인페르나 남작이 고했다.
“오전에는 내가 직접 지도하고, 오후에는 로지에가 너희들의 대련 상대가 될 거다.”
나는 이제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데클란이 웃고 있어서 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