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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36)화 (36/177)

36화

데클란의 요청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래. 그럼 베스트 프렌드 하자.”

“아니, 그거보다 더 친한 거…….”

“그럼 메가 베스트 프렌드로 해줄게.”

“……그러니까, 친구 말고. 가, 가족 같은 거 하고 싶은데.”

데클란이 괜히 제 목청을 가다듬었다.

‘참 귀찮은 요구가 많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데클란의 말을 넘겼다.

“그래? 그럼 앞으로 나보고 누나라고 불러.”

“…….”

“누나 싫으면, 네가 오빠 할래? 근데 내가 생일 더 빠른 거 같은데.”

“……그만하자.”

데클란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선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얘 왜 이래?’

의아해진 나는 다시 한번 데클란의 어깨를 다독였다.

“어쨌든, 이제 도련님 그만 미워해. 여름 동안 도련님이랑 놀아주면서 맛있는 거 얻어먹으면 얼마나 좋아?”

내 말을 들은 데클란이 나를 흘겨보았다.

“너 설마 그거 때문에 로지에 그놈이랑 친해지려고 한 거였어?”

“당연하지. 남작님 댁에 맛있는 거 엄청 많잖아.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데클란 너…… 아까 검 쓸 때 엄청 멋있었어. 아무래도 넌 검술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도련님과 계속 대련하면 실력이 더 늘지 않을까, 싶어서.”

“……!”

데클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귀까지 빨갛게 익어버린 탓에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런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작은 칭찬에 버벅거리는 데클란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그 모습을 마냥 감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근데 말이야, 우리 일단 내일 남작님이랑 도련님에게 싹싹 빌어야 할 거야.”

“……응.”

당장 내일 남작가로 다시 오라는 남작의 명령을 떠올린 데클란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나 역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데클란이 인페르나 남작의 신경을 단단히 거슬리게 한 것 같다.

‘남작님이 은근히 데클란을 싫어하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인페르나 남작은 저번에 내가 다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때의 남작은 의사인 딘 선생에게 내 상처가 어떤지 상세히 물었다. 그리고 내게 약도 내어주었다.

그러나 이번에 데클란이 다쳤을 때 그녀는 데클란이 어떤지 묻지도 않았다.

게다가 바로 의무실 앞까지 왔으면서, 데클란의 상태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혹시 남작은 데클란을 싫어하는 걸까?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겠지. 내가 다쳤을 때랑 다르게 데클란의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서 그랬던 거겠지.’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나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데클란과 손을 잡고 내 방으로 달려갔다.

“시작하자, 데클란.”

“뭐, 뭘?”

“원래 사과는 질보다 양으로 승부를 내는 법.”

서랍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든 내가 데클란에게 외쳤다.

“우리 어디 한 번 반성문 100장 조져보자!”

내 발언에 데클란이 경악했다.

“말도 안 돼!”

“돼!”

단호히 외친 내가 데클란의 다치지 않은 손에 펜을 끼워 넣어 주었다.

“어서 반성문 써, 데클란!”

“웃기지 마! 어떻게 100장을 다 채워!”

“먼저 본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서론 10장, 잘못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 30장, 고통받는 피해자를 인정하는 표현 10장, 지금 네가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과 30장,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이런 일을 방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각오 20장! 이렇게 쓰면 100장 아주 뚝딱이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데클란이 로지에와 인페르나 남작에게 바칠 반성문을 작성하도록 감독했다.

행여나 분노에 사무친 인페르나 남작이 데클란을 감옥에 처넣을까 두려워서였다.

“사샤, 나 졸려…….”

“안 돼! 100장 채워! 잠은 죽어서 자!”

“그렇지만 잠 안 자면 죽잖아!”

“우린 아직 젊어서 괜찮아! 어서 쓰자!”

나는 데클란의 손등에 새로 연고를 발라주며 그를 계속 갈궜다.

데클란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반성문 100장을 채워갔다.

문밖에 서 있던 내 부모님과 데클란의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 * *

다음 날 아침.

인페르나 남작이 보낸 마차 위에 올라탄 나와 데클란은 잔뜩 긴장한 채로 남작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반성문 드리면서 무조건 미안하다고 싹싹 빌어. 알겠지?”

마차 안에 탄 내가 데클란에게 말했다.

100장짜리 반성문을 쥔 데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나와 데클란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둘 다 퀭한 상태였다.

인페르나 남작가에 도착하자, 한 하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남작님과 도련님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단다.”

하인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다짜고짜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저택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었다.

어제 로지에와 함께 놀던 화원과 상당히 상반되는 곳이었다.

들꽃이나 풀 한 포기도 없는 황폐한 공간이었다. 땅 위에는 오로지 모래와 자갈만이 깔려 있었고, 사방에는 칙칙한 색의 돌담이 쌓여 있었다.

‘뭐지? 지하 감옥으로 가는 비밀 통로인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잔뜩 긴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는 반성문을 꽉 쥔 데클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아침부터 오느라 수고 많았군.”

저벅, 저벅.

저 멀리서 어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자, 이제는 제법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뒤로 머리를 질끈 묶은 인페르나 남작이었다. 그녀는 소매를 가죽으로 감싼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남작의 옆으로 로지에가 보였다.

“좋은 아침이야, 사샤 양! 데클란 군!”

“로지에 도련님!”

해바라기처럼 밝고 고운 웃음을 건네는 로지에를 보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정말이지 힐링 되는 상큼한 미소였다.

그래, 설마 남작이 자기 아들이 보는 앞에서 또래 아이들을 감옥에 처박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하던 순간.

나는 남작의 손에 들린 목검 한 자루를 보았다.

‘……어?’

목검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작님이…… 왜 목검을 들고 계시지?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저걸로 데클란을 때리려고……?’

네가 내 아들을 때렸으니 너도 당해봐라! 이런 뜻인가?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탁 트인 공간이라 어디로 도망쳐도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데클란…….”

나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데클란을 향해 소곤거렸다.

“빨리…… 도련님이랑 남작님에게 반성문 바쳐!”

그 말에 데클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페르나 남작과 로지에를 향해 다가갔다.

“남작님, 그리고 도련님.”

“왜.”

“어제 일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그러면서 데클란은 남작에게 100페이지 분량의 반성문을 내밀었다.

그러나 남작은 그 반성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필요 없다. 로지에.”

“네, 어머니.”

남작의 부름에 로지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데클란에게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자!”

로지에가 데클란에게 건넨 것은…… 어제와 똑같은 목검이었다.

데클란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자, 사샤 양도 한 자루 받아.”

내 앞으로 다가온 로지에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검을 내밀었다.

나와 데클란은 얼떨결에 둘 다 목검을 쥐게 되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이 도련님, 왜 다짜고짜 우리 손에 쥐여주는 거야?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전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검을 잡아라.”

인페르나 남작의 차분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나는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나와 데클란 앞에 선 남작은 목검을 쥔 채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먼저 기본 동작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손바닥으로 검의 손잡이를 감싸듯이 쥐어 감아라.”

“……?”

남작의 지시에 나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뭐지?

“저…… 남작님.”

“뭐.”

“지금 저희 뭐 하는 거예요……?”

그러자 이런 답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보면 모르겠느냐? 검을 가르쳐주려고 한다.”

나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예? 갑자기요? 왜요?”

“왜? 싫은가?”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영락없이 혼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무려 검술 교습을 받게 될 줄이야!

그렇다고 왜 혼내지 않느냐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인페르나 남작이 ‘왜, 혼나고 싶으냐?’라고 핀잔을 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본 인페르나 남작은 내가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줄로 오해한 모양이다.

“이래 봬도 난 검술로 유서 깊은 백작가 출신이다. 내 출신 가문은 대대로 왕실 기사를 배출했다.”

“맞아! 그러니까 남작님으로부터 교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품도록 해!”

로지에가 두 주먹을 꽉 쥐며 우리에게 외쳤다.

그는 마냥 즐거운 아이처럼 보였다.

더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갑작스러운 전개에 나는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데클란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데클란은 이미 남작이 시키는 대로 검을 고쳐 잡고 있었다.

어째선지 녀석의 눈빛이 환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인페르나 남작이 데클란에게 쥐여준 이 목검이 그 안에 꿈틀거리던 열망을 깨웠다는 사실을.

* * *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나와 데클란이 있는 이곳은 연무장이었다.

본래는 인페르나 남작가를 섬기는 기사단이 사용하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페르나 영지가 황폐해지고 난 뒤 영지민들이 많이 떠나갔다.

덕분에 줄어든 세금 때문에 봉급을 받기가 어려워진 기사들 역시 남작가를 버리고 사라졌다.

그렇기에 지금 이 연무장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딱 어제까지만 그랬다.

나와 데클란은 오전 내내 인페르나 남작으로부터 검술 교습을 받았다.

덩달아 신이 난 로지에는 수업 조교처럼 굴기 시작했다.

“검을 그렇게 잡으면 안 돼, 사샤 양. 조금 더 높게 해 봐. 옳지, 그렇게 하는 거야!”

“데클란 군, 방금 그 자세가 아주 좋았어. 그런데 힘을 조금 더 빼야지만 검을 훨씬 가볍게 휘두를 수 있을 거야.”

아무래도 로지에는 인페르나 남작에게 교습을 받는 우리를 구경하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이거 왠지 갈굼당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를 악물며 남작이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로지에가 고쳐주는 대로 다시 검을 놀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목검을 내던지고 때려치우고 싶었다.

침대로 쏙 들어가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죽어가는 나와 다르게, 데클란은 아주 행복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억누르지 못하고 검을 휘두르는 데클란을 보자, 마음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분명히 어제 손등을 다쳤을 텐데, 데클란은 상처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목검을 붙잡고 있었다.

남작을 바라보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형형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동경하는 기사를 만난 것처럼 황홀감에 잠겨 있었다.

찬연하게 빛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눈부셨다.

그래서 나는 내 손에 들린 검을 함부로 내던질 수 없었다.

다만 데클란이 지금 이 순간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계속 만끽하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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