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크.’
분노에 물든 인페르나 남작의 얼굴을 본 나는 상황이 데클란에게 불리한 쪽으로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애초에 나와 데클란에게 목검을 잡아준 건 로지에였다.
그렇지만 로지에는 귀족이었고, 나와 데클란은 일개 평민에 불과했다.
이곳 왕국에서 평민들은 귀족들보다 낮은 존재였다.
평민이 귀족에게 상해를 입힐 경우, 벌금형은 물론이고 구금형, 심할 때는 사형까지 내려졌다.
‘데클란을 더 일찍 말릴 걸 그랬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까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덤벼들 때 처음부터 말렸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데클란이 너무 멋지게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정신이 쏙 빠져버렸다.
데클란의 검술을 헤벌쭉 구경하다 이 꼴이 났다.
이미 사건이 이렇게 벌어진 거,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재빨리 머릿속으로 상황 정리를 마친 나는 무작정 데클란 대신 싹싹 빌기 시작했다.
“남작님! 데클란은 도련님을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어요! 단지 놀다 보니까 그만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걸 거예요!”
데클란을 위해 그런 변명을 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양심이 쿡쿡 찔렸다.
존경하는 인페르나 남작에게 거짓말을 하려니 속이 더부룩해졌다.
아까도 말했던 거지만, 데클란은 분명히 로지에를 향해 꽤 난폭하게 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봐도 개인적인 감정이 실린 움직임이었다.
주변에 서서 가만히 구경하던 나도 그것을 느꼈다.
하물며 그런 데클란의 검을 받아 쳐내고 있던 로지에는 어떠할까.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인페르나 남작에게 알릴 수 없었다.
로지에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데클란이 처벌받는 일은 보고 싶지 않았다.
“로지에, 지금 사샤가 하는 말이 사실이니?”
내 말을 들은 남작이 로지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날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만일 여기서 로지에가 남작에게 사실을 고한다면, 데클란은 큰 벌을 피할 수 없을 테다.
‘로지에, 제발!’
나는 쫄깃한 심장을 억지로 억누르며 로지에를 향해 간절한 시선을 내던졌다.
그러다 나는 마침 로지에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와 시선이 얽힌 로지에는 나를 향해 슬쩍 윙크를 날렸다.
인페르나 남작도, 내 부모님도, 그리고 집사도 볼 수 없게 나에게만 날린 윙크였다.
‘……어?’
뭐지?
갑작스러운 로지에의 윙크에 당황하고 있는데,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샤 양의 말이 맞아요, 어머니.”
로지에가 사근사근하게 인페르나 남작에게 고했다.
“제가 먼저 검 놀이를 하자고 한 거였어요. 데클란 군은 그저 제가 하자는 대로 어울려 준 것뿐이에요! 그런데 데클란 군이 생각보다 잘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세게 나간 거예요!”
나이스!
로지에의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에 로지에의 말이 이어졌다.
“어머니, 데클란 군은 검술 천재 같아요. 그런 재능을 가진 아이는 처음 봐요. 정말이에요!”
로지에는 생각보다 더 착한 아이였다.
데클란이 곤란해질까 봐 이렇게 거짓말을 해주다니!
나는 당장이라도 로지에를 향해 달려가 그를 끌어안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흠…….”
한편, 로지에의 말을 들은 남작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제 아들이 아니라고 재차 말하니, 남작도 화가 조금이나마 사그라든 모양이었다.
남작이 고작 로지에의 말 한마디에 저렇게 차분하게 변하는 것을 보자,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자기 아들을 정말 좋아하나 보다.’
그러자 의문점이 생겨났다.
인페르나 남작은 왜 자기 아들과 같이 살지 않는 거지?
로지에는 분명히 말했었다. 자기는 여름에만 인페르나 영지로 온다고.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페르나 남작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샤.”
“네, 네! 남작님.”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급히 허리를 뻣뻣이 세웠다.
이런 나를 남작은 빤히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데클란에게 전해라. 내일 다시 이곳에 찾아오라고.”
“내일……이요?”
난데없는 남작의 요청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남작의 태도는 제법 확고했다.
“그래. 감히 내 아들에게 함부로 검을 휘두르다니. 그 고약한 버릇을 제대로 고쳐주도록 하지.”
그 말을 하는 남작의 목소리는 꽤나 건조했다.
그와 동시에 내 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고약한 버릇을 고쳐주겠다니?’
잠깐만. 이건 그야말로 데클란에게 벌을 내리겠다는 말 아닌가?
황망해진 나는 다급히 남작에게 말을 올렸다.
“잠깐만요, 남작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데클란은 그냥 가볍게 검을 휘두른 것뿐인데—”
“너도 오고 싶으면 와라.”
남작이 내 말을 뚝 끊었다.
“……네?”
“사샤 너도 내일 남작 저택에 오라고 했다.”
남작이 나를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고했다.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소름 끼칠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그와 동시에 뒤편에 서 있던 부모님이 ‘헉’하고 숨을 거꾸로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부모님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그냥 가만히 있지, 왜 괜히 남작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매를 버니!’
참고로 나도 같은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졸지에 암석 아래에 깔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심장에 긴장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 설마…… 인페르나 남작님을 화나게 한 건가?’
괜히 데클란 대신 변명하려다가 남작님의 눈 밖에 나게 된 건가?
‘어쩌지?’
나는 아랫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남작은 내 부모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일 아침에 미드턴 마을로 마차를 보내도록 하지. 사샤와 데클란 둘 다 꼭 마차에 태워서 보내도록 해.”
“……예, 예에.”
감히 남작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부모님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다.
“집사, 남자애가 나오면 손님들에게 나가는 길을 안내해주길.”
“예, 남작님.”
“가자, 로지에.”
“네, 어머니.”
로지에는 인페르나 남작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망했다.’
이러다 원작이 시작하기도 전에 나랑 데클란 둘 다 지하 감옥에 처박히는 거 아냐?
* * *
인페르나 남작과 로지에가 떠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무실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손등에 솜 거즈를 덧붙인 데클란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샤…….”
“아이고, 데클란! 이를 어쩌면 좋니!”
데클란을 본 부모님이 동시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부모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들은 데클란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어갔다.
“미안해, 사샤. 면목이 없다. 괜히 나 때문에…….”
“아니, 나한테 사과할 게 아니잖아.”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데클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인페르나 남작가의 밖으로 나온 우리는 마차 위로 올라탔다.
“집에 가자, 얘들아…….”
침울해진 아빠가 힘없이 당나귀를 채찍질했다.
흐어엉, 어설픈 울음소리를 낸 당나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삐꺽, 삐꺽. 덜컹, 덜컹.
손수 못질하여 만든 초라한 마차가 구슬픈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도련님에게 왜 그렇게 덤벼든 거야.”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제법 멀어졌을 때, 내가 데클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데클란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러자 뜬금없이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마음에 안 들어서.”
“뭐?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로지에 그 자식, 마음에 안 들어.”
“야, 말조심해!”
나는 행여나 다른 사람이 우리의 대화를 들을까 두려워 고개를 돌렸다.
감히 남작님의 아들을 이름으로 부르다니!
그러나 당나귀를 몰고 있는 아빠는 어깨에 힘이 쭉 빠진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옆에 앉은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데클란의 어깨를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따졌다.
“너 왜 그래, 데클란! 도련님이 너한테 쌍욕을 했어, 아니면 너를 두들겨 팼어? 그냥 우리랑 같이 놀고 싶다는 건데, 뭐가 그렇게 싫다는 거야?”
“나한테서 널 뺏어가려고 했잖아.”
“어?”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데클란이 뭐라고 하는 거지?
데클란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내 손목을 잡았다.
“다른 사람이 너한테 관심 보이는 건 싫어.”
“…….”
“사샤 네가 나랑만 친했으면 좋겠어. 나 말고 다른 아이들이랑 노는 건 싫단 말이야.”
허…….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얘 갑자기 왜 이렇게 찌질해졌어?
“데클란, 내가 언제 로지에 도련님과 친구 하면 너랑 더 이상 친구 안 한다고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데클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래도…… 로지에 그놈에게 널 단 1분이라도 뺏긴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아까워.”
“…….”
나는 데클란을 빤히 쳐다보았다.
얘 지금 진심인 건가?
“데클란, 너 지금 네가 얼마나 헛소리하고 있는지 알지?”
나는 내 손목에서 데클란의 손을 떼어냈다.
순간 데클란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나는 그를 향해 말을 이었다.
“뺏기긴 뭘 뺏겨. 생각해봐. 로지에 도련님은 여름이 끝나면 영지를 떠나는 사람이야. 하지만 넌 항상 내 옆에 있을 거잖아.”
“……그렇지.”
“너 앞으로도 우리 집에 와서 아침밥 먹을 거 아냐?”
“……맞아.”
“넌 내가 아침마다 너희 집 문 두드리면 나올 거지?”
“……당연하지.”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냐?”
나는 데클란을 향해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련님은 널 영원히 못 이겨. 왜냐하면 넌 나랑 제일 친한 친구니까.”
“제일 친한 친구…….”
데클란이 앵무새처럼 그 말을 따라 했다.
“그래, 우린 친구잖아.”
나는 데클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은 햇살 아래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있잖아, 사샤.”
“어, 왜.”
“우리…… 친구 이상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