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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34)화 (34/177)

34화

“아, 그 애 말이군.”

집사의 말을 들은 인페르나 남작은 사샤와 함께 저택에 왔던 그 아이를 기억해냈다.

감히 제 친구에게 화살을 겨누었던 그 괘씸한 꼬마 말이다.

첫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터라, 인페르나 남작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데클란이 다쳤다는 말을 들은 사샤의 부모는 기겁하며 두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집사님?”

“크게 다친 건가요?”

“그게…….”

집사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사샤와 데클란, 그리고 로지에는 화원에서 목검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 로지에가 실수로 데클란의 손등을 목검으로 세게 내리치고 말았다.

덕분에 데클란의 손등이 까져 상처가 난 것이다.

사샤의 부모는 당장 데클란을 보러 가야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집사에게 길을 안내하도록 했다.

* * *

불과 반 시간 전.

나와 데클란, 그리고 로지에는 다 같이 화원에 모여 있었다.

로지에는 나와 데클란에게 목검을 가지고 검 싸움을 하며 놀자고 권했다.

나는 로지에와 가볍게 놀아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아니었다.

로지에의 도발 아닌 도발에 당한 데클란은 목검을 들고 무작정 로지에에게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끼어들 틈도 없었다.

로지에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데클란을 보며 당황하면서도 능숙하게 검을 막아냈다.

그 뒤로 로지에와 데클란 사이로 목검이 여러 차례 오고 갔다.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굳은 나는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2:1로 붙자고 했는데.’

졸지에 데클란과 로지에의 1:1 승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나는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금방 밀려버릴까 걱정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걱정이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능력자였다. 그리고 로지에는 그런 남작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로지에는 우리보다 훨씬 검을 잘 다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비록 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데클란 얘…… 꽤 잘하잖아?’

데클란의 검을 쓰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이들 간의 놀이로 치부하기에 너무나도 현란한 검 놀림이었다.

데클란이 빈틈을 노리며 목검을 찔러 들면, 로지에는 유연히 몸을 돌려 공격을 피했다.

로지에가 회피함과 동시에 데클란은 또다시 다른 구석을 노리며 검으로 무차별하게 틈을 파고들었다.

당장 로지에는 데클란의 공격을 피하느라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검을 쥔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멋있어.’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검을 든 데클란은 평소와 눈빛이 달랐다.

평소 냉소적이고 덤덤하기 그지없던 그의 눈동자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데클란의 검 실력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물론 나는 원작 소설을 읽은 입장으로써 데클란이 장차 훌륭한 기사로 성장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어릴 때부터 검에 소질이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데클란은 여태껏 진검은커녕 목검을 제대로 쥐어본 적도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얼마 전에 내가 데클란에게 준 목검이 그가 처음으로 가진 목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로 잘한다고?

“잠깐만! 데클란 군! 우리 대화 좀 하자!”

참다못한 로지에는 검으로 데클란의 공격을 막아낸 뒤 급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숨을 몰아쉬는 로지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로지에도 나와 마찬가지로 설마 데클란이 이렇게까지 능숙하게 검을 사용할 줄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로지에는 손등으로 제 마른기침을 막았다.

“데클란 군, 왜 이렇게 잘해? 검 배운 적 있어?”

“없습니다.”

“정말이야? 대단해!”

그 말을 들은 로지에의 두 눈이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데클란에 대해 엄청난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데클란 군, 생각보다 잘하네! 그럼 이제부터 나도 봐주지 않을 거야.”

이에 데클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봐주고 있었다는 겁니까?”

“으음? 당연하지. 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는걸.”

로지에가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달리 말하자면, 데클란은 검술을 모르는 평민이니 살살 해주고 있었다는 뜻이다.

로지에 나름에는 제법 배려심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로지에의 친절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쳇.”

데클란이 기어코 로지에를 노려보며 혀를 찼다.

“응? 갑자기 왜 그래, 데클란 군?”

로지에는 두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그의 긴 속눈썹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그는 정말 데클란이 왜 언짢아하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데클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검을 쥔 주먹을 더 세게 꽉 쥐었다.

탓!

데클란이 다시 로지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로지에를 향해 직진하는 검에는 제법 큰 힘이 실려 있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로지에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로지에의 검이 머리 위로 높게 치솟았다.

그 짧은 찰나.

내 마음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일 데클란이 이대로 로지에에게 검을 내리쳤다간, 로지에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만일 로지에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인페르나 남작은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런 그녀의 아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와닿자,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크게 외쳤다.

“데클란, 멈춰!”

움찔.

순간 데클란이 멈칫거렸다. 로지에를 향해 휘두르던 검이 갈 길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들어 올렸던 로지에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퍽!

목검의 끝날이 데클란의 손등을 내리쳤다.

툭.

“아.”

손에 힘이 풀린 데클란은 자신의 검을 놓치고 말았다.

데클란의 손등 위로 주륵, 하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새빨간 피였다.

나는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데, 데클란! 손에서 피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데클란에게 다가간 나는 급히 그의 손을 쥐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상처를 핥아야 하나? 일단 소독 먼저 해야 하는데!

당황한 건 로지에도 마찬가지였다.

“데클란 군! 미, 미안해! 이렇게 세게 내리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으아, 어떡해! 많이 아파, 데클란? 아, 맞다! 여기 의사가 있으니까, 어서 가서—”

“안 아파.”

데클란의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네 등에 난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너 바보야?”

데클란의 말을 들은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누가 누가 더 크게 다쳤는지 대회 하는 줄 알아? 네가 다쳤잖아! 난 데클란 네가 다친 거 싫어!”

“……내가 다친 거 싫어?”

“그래! 난 데클란 네가 상처 하나 없이 건강한 게 좋단 말이야! 당장 의사 보러 가자!”

나는 데클란의 다치지 않은 손을 꼭 잡으며 로지에를 향해 급히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딘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세요!”

“아, 응! 알았어!”

로지에는 재빨리 나와 데클란을 의무실로 안내했다.

“데클란, 많이 아파?”

로지에의 뒤를 따라 총총걸음을 걸으며, 내가 데클란에게 재차 물었다.

“…….”

데클란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뭐야, 왜 말이 없어? 왜 나 쳐다보기만 해?”

“……좋네.”

“뭐? 너 갑자기 뭔 소리야?”

“사샤 네가 나 걱정해주니까…… 진짜 좋다고.”

태평스러운 데클란의 말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를 흘겨보았다.

얘가 검으로 머리도 세트로 맞은 건가? 왜 이런 바보스러운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의무실에 도착한 데클란은 인페르나 남작가의 주치의인 딘 선생을 만났다.

딘 선생은 데클란의 상처를 살펴보고는 말했다.

“살갗이 까져서 피가 나는 거지, 그리 큰 상처가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휴, 다행이다.

그 말을 들은 나와 로지에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소독하고 약을 발라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밖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딘 선생의 말에 나와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무실에서 나가기 전, 나는 데클란을 향해 외쳤다.

“데클란, 아프면 나 꼭 불러!”

“부르면 뭐 해줄 건데.”

의자에 앉아 치료를 기다리는 데클란이 덤덤히 물었다.

“어…… 심리적 지원을 해줄 수 있어! 아프지 말라고 꼭 기도해 줄게!”

“그게 끝이야?”

어쩐지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는 데클란이었다.

음?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뭘 더 바라는데? 사탕 가져다줄까?”

“아니, 그거 말고 한 번만 안…… 아니다, 됐어.”

데클란은 하던 말을 자르고 내게서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그대로 의무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나와 같이 복도로 나온 로지에는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아아…….”

의무실 문 바로 옆 벽에 기대어 앉은 로지에는 자신의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여 무릎 사이에 얼굴을 감췄다.

나는 그런 로지에의 옆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저기요, 도련님.”

“…….”

“도련님! 저 좀 보세요!”

“……왜 불러, 사샤 양.”

“기운 차리세요, 도련님. 왜 그렇게 시무룩해져 있어요?”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는 로지에를 바라보며 일부러 큰 목소리로 물었다.

로지에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샤 양…… 나 이제 정말 어떡해.”

그런 말을 하는 로지에의 얼굴 위로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뭐가 어떡해요? 아, 혹시! 남작님에게 혼날까 봐 무서운 거예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데클란 군이 날 미워하면 어떡하지?”

로지에의 얼굴은 어느덧 울상이 되어 있었다.

“오래간만에 사귄 친구였는데, 벌써 이렇게 틀어지게 되었다니…….”

뭐야. 생각보다 여린 도련님이었구먼?

그런 그를 달래기 위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미워하긴요. 놀다가 다친 건데, 뭐. 데클란 그렇게 속 좁은 애 아니에요!”

사실 속 좁은 애 맞지만요!

로지에를 안심시키면서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데클란은 로지에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지 않았다.

‘……조금 전에 데클란, 분명히 로지에를 죽일 듯이 덤벼들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데클란은 로지에를 향해 심할 정도로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아무래도 데클란은 로지에와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데클란이 로지에의 놀이 상대가 되면 좋을 텐데…….’

나나 데클란의 집안과는 달리, 남작 저택에는 먹을 것이 풍부했다.

그러니 데클란이 이곳에 올 수 있다면 적어도 매일 굶주리지는 않을 테다.

풍부한 음식은 한창 성장기의 데클란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리게 될 줄이야…….

그렇게 속으로 아쉬워하고 있는데,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앗.”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이들은 내 부모님과 인페르나 남작이었다.

“도련님! 남작님이랑 오셨어요!”

나는 시무룩해져 있는 로지에의 팔꿈치를 슬쩍 찔렀다.

“어머니가……?”

로지에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 그는 인페르나 남작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로지에, 너는 다친 곳 없느냐.”

남작이 다정한 목소리로 로지에에게 물었다.

“네, 전 괜찮아요. 그런데 데클란 군이…….”

로지에는 인페르나 남작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가만히 로지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작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데클란이란 놈이, 감히 내 아들에게 검을 휘둘렀다고?”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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