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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32)화 (32/177)

32화

데클란의 대답을 들은 로지에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는 데클란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황하던 것도 잠시.

로지에는 곧 굳었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우아한 품위를 지키는 것이 과연 귀족 자제다웠다.

“데클란 군. 미안하지만, 왜 싫다고 하는 거지?”

“사샤는 제 친구입니다.”

“알고 있어. 그래서, 요점은?”

“남의 친구를 뺏어가지 마시지요”

데클란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입이 절로 떡하니 벌어졌다.

‘헉.’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나는 데클란이 감히 귀족 자제에게 말대꾸했다는 사실보다 다른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그건 바로 데클란이 나를 친구라고 부른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심장이 얼어붙은 듯하다가 이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처음이었다. 

데클란이 나를 ‘친구’라고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어째선지 마음 한구석에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어째선지 기분이 좋아졌다.

로지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해가 있는 것 같네, 데클란 군. 난 네 친구를 뺏고자 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같이 친구가 되고 싶다는 거지.”

그런 점잖은 타이름에 데클란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사샤는 저로 이미 충분한데요. 굳이 왜…… 읍.”

“하하! 좋아요!”

나는 급히 두 손으로 데클란의 볼멘소리를 막아섰다.

이대로 데클란의 주둥이를 가만히 뒀다간 아주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다 같이 놀면 재밌겠죠! 지금 바로 놀러 가도록 해요!”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로지에는 싱긋 웃으며 나와 데클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 마침 날씨도 좋은데, 화원으로 가지 않을래?”

“화원이든 어디든 좋아요! 갑시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데클란의 팔을 끌어당겼다.

내게 붙들린 데클란은 약간의 불만이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군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데클란, 그리고 로지에는 남작가의 화원으로 향했다.

화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심겨 있었다.

마을 근처 숲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들풀부터, 생김새가 특이한 희귀종까지.

각양각색 꽃들의 향연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와아…….”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데클란은 팔짱을 낀 채 무심히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화려한 꽃들의 생김새에 잠시 정신이 팔려있을 때였다.

“자, 이거 하나씩 잡아.”

로지에가 나와 데클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잡은 그것은.

“……목검?”

바로 새것으로 보이는 단단한 목검이었다.

내가 얼마 전 데클란에게 선물했던 목검보다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이건 왜 주시는 거예요?”

같이 친구가 된 김에 주는 선물인가?

역시 귀족들은 통도 크지! 하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툭.

로지에가 갑자기 입고 있던 겉옷을 바닥에 벗어 던졌다.

그의 손에는 나와 데클란이 받은 것과 같은 목검이 들려 있었다.

로지에가 쑥스럽다는 듯이 살짝 웃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자, 2:1로 하자.”

“……예?”

난데없는 로지에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이 도련님이 뭐라고 하는 거지?

당혹스러워하는 내 인상을 본 로지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사샤 양? 같이 검 싸움하면서 놀면 좋을 것 같지 않아?”

그 말에 나는 뻣뻣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맞다.

선량하고 고와 보이는 얼굴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다.

이 도련님의 어머니는 바로 멧돼지 이마에 검을 찔러 넣어버린 그 인페르나 남작님이지.

“머리와 급소는 공격하는 거 금지. 배에 맞으면 지는 걸로 하자.”

목검을 든 로지에가 빙긋 웃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는 가만히 목검을 바라보았다.

내 옆에 선 데클란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로지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요, 도련님. 저희는 검술 배워본 적 없습니다만.”

“응, 알아.”

“그럼 이건 엄청나게 불공평한 싸움…….”

“그래서 2:1로 하자는 거잖아.”

로지에가 계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한 판 해보자. 너희들이 못하면 내가 가르쳐 줄게.”

로지에의 강건한 태도에 나와 데클란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도련님의 장난에어울려 줘야 하나?

물론 고작 목검이니 죽거나 크게 다칠 일은 없을 테다.

그리고 이곳은 남작가 저택 안이니 의사가 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나는 몸이 상당히 튼튼하고 맷집이 좋아서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데클란이었다.

체구도 작고, 체력도 약하고, 여러 면에서 부족한 데클란이 과연 로지에의 검술을 받아낼 수 있을까?

그렇게 다각도로 상황을 곱씹으며 고민하고 있는데, 로지에가 대뜸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데클란 군? 설마, 겁이 나는 거야?”

내가 아닌 데클란을 향한 도발이었다.

그 말을 들은 데클란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뭐라고 하셨어요?”

“음? 아니, 사샤 양은 검이라도 제대로 들고 있는데, 데클란 군은 너무 의욕 없이 서 있어서…… 아, 혹시 내가 무서운 거야?”

어쩐지 약 올리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지만 로지에는 내심 데클란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세게 때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목검은 별로 무서운 게 아니야.”

“…….”

“아, 만약에 조금 무서워서 같이 놀기 싫으면 저기 가서 앉아 있어도 좋아. 나는 사샤 양과 놀고 있을게.”

로지에의 말이 이어질수록 데클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드득.

데클란이 기어코 이를 갈았다.

“지금 바로 하죠.”

저벅, 저벅.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간 데클란이 두 손으로 검을 꽉 쥐었다.

“배를 찌르면, 이기는 거라고 하셨죠?”

“응, 맞아.”

“좋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팡이처럼 검을 대충 들고 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진 자세였다.

물론 나나 데클란이나 둘 다 검을 제대로 들 줄 모르기 때문에 자세는 형편이 없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과 달리 데클란의 두 눈에는 의욕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얘 갑자기 왜 이래?’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데클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깡마른 그의 등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화가 난 것 같은데.

도대체 왜 화가 난 거지?

이런 데클란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이 난 로지에는 그저 기쁘게 외쳤다.

“그럼, 시작하자!”

그와 동시에 데클란이 제 목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검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로지에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똑똑.

집사가 인페르나 남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나.”

집무실 내부에서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 너머로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작의 모습이 보였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조금 긴장한 채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샤의 부모님을 보며, 인페르나 남작이 가볍게 그들에게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사샤의 부모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연신 남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남작이 고작 평민에 불과한 자신들을 집무실 안으로 불러온 것에 대해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샤의 부모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를 갖추며 남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저희 딸을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남작님.”

“남작님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큰 일이 날 뻔했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인페르나 남작에게 내밀었다.

남작은 대수롭지 않게 사샤의 부모가 내민 바구니를 받아들였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재주는 딘 선생이 다 부린 건데.”

그러면서 그녀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 일단 앉게나.”

“아이고, 남작님. 감히 남작님과 겸상할 수 있는 이런 호의를 베푸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샤의 부모는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남작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샤의 부모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인페르나 남작이 그들을 친히 집무실에 부른 건 결코 시시콜콜한 감사의 인사를 듣고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세잔의 찻잔이 향긋한 차로 채워지기가 무섭게 인페르나 남작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이름이 뭐지?”

“아…… 저는 마로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 아내는…….”

“샤네리입니다.”

“그래, 좋아. 마로크, 샤네리.”

남작은 사샤의 부모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찌나 깊고 끈질긴 시선이던지. 이 정도면 관찰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사샤라는 아이, 그대들의 친딸이 아니지?”

“……!”

마로크와 샤네리의 얼굴이 단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샤네리가 먼저 침착하게 말문을 뗐다.

“……네, 맞습니다. 말씀대로 사샤는 저희 친딸이 아닙니다.”

“그럼 그 아이는 어디서 데리고 온 거지?”

“저희의 먼 친척 중 일찍이 돌아가신 분이 있는데, 그쪽의 고아를 입양해 저희 딸로 삼은 겁니다.”

“먼 친척? 먼 친척이라면 왜 굳이 그대들이 아이를 맡은 거지? 그대들보다 더 가까운 친인척이 있지 않나?”

남작의 합당한 질문에 샤네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더 깊게 사정을 캐묻는 남작 때문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샤네리는 천천히 답했다.

“……그분도 마침 인페르나 영지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저희가 아이를 맡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마을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마로크가 급히 맞장구를 치며 아내의 말을 지지했다.

인페르나 남작은 예리한 시선으로 이 말을 하는 부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의 친척이지?”

“네?”

“사샤라는 그 아이가 마로크 그대의 친척 아이인지, 아니면 샤네리의 친척 아이인지 물었다.”

“아, 그건…….”

그 질문에 재빨리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어째선지 마로크와 샤네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작은 이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알아챘다.

‘무언가를 속이고 있군.’

직감이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 두 사람은 거짓을 고하고 있다고.

무언가 수상했다.

마로크와 샤네리는 사샤가 자신의 먼 친척의 아이라고 했다.

이에 남작은 어느 친척인지 물었다.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리어 서로 눈치를 주며 시선을 주고받는 것이 꼭 마치…….

‘괜히 말실수할까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섣불리 대답했다가 꼬투리를 잡힐까 봐, 일부러 말을 아끼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을 숨기려고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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