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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31)화 (31/177)

31화

참다못한 내가 데클란에게 슬쩍 소곤소곤 물었다.

“데클란, 나 얼굴에 뭐 묻었어? 집사님이 자꾸 나 쳐다보는 것 같아서.”

“아니. 평소 같이 생겼는데.”

“평소같이 생긴 건 또 무슨 말이야?”

“그냥 평소의 너답게 예쁘…… 아니다.”

데클란이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내 맘이야. 불만 있어?”

괜히 툴툴거리는 소리를 낸 데클란에 내게 손짓을 했다.

“내 뒤로 와.”

처음에 나는 그가 왜 내게 뒤로 오라고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뒤 나는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기 뒤에 숨어서 집사의 시선을 피하라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집사의 시선이 슬슬 부담스러워지려던 차였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데클란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 보니 나랑 데클란이랑 키가 비슷하네.’

저번에 같이 수영하면서 느낀 거지만, 데클란은 체구가 제법 작았다.

마른 그의 몸을 보자 마음이 아파졌다.

‘앞으로 열심히 사냥해서 데클란한테 고기 많이 먹여야지.’

어서 데클란에게 많은 단백질을 공급해 체력왕으로 길러야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시지요. 남작님께 여러분의 방문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한 집사가 친절히 말했다.

집사가 나간 뒤, 저택의 하녀들이 들어와 다과를 세팅해 주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부모님은 호화스러운 접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하녀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네 개의 다과를 내려놓았다.

“괜찮습니다. 남작님께서 명하신 것이니, 부담 없이 드세요.”

“저희가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두 어른과 달리 나와 데클란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우리 앞에 놓인 간식을 바라보았다.

생크림이 듬뿍 얹힌 부드러운 카스텔라와 설탕에 절인 과일이 올려진 타르트였다.

신이 난 나와 데클란은 망설임 없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얘들아, 흘리지 말고 먹으렴! 예의 없게 굴면 안 돼!”

부모님은 행여나 나와 데클란이 남작가의 저택에서 실수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특히나 아빠는 우리가 응접실에 있는 귀한 물건들을 망가뜨릴까 걱정하고 있었다.

“얌전히 앉아서 먹고 있어. 뛰어다니면 안 돼!”

그러나 아빠의 걱정과는 달리 우리는 응접실을 구경하는 것보다 먹는 것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다.

“타르트 맛있어! 블루베리랑 같이 먹어 봐!”

“크림도 엄청 부드러워!”

소파에 나란히 앉은 나와 데클란은 행복하게 간식을 먹었다.

그렇게 열심히 당분을 섭취하고 있는데, 집사가 응접실로 다시 돌아왔다.

“남작님께서 들라 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샤, 너 입가에 크림 묻었어.”

“아, 그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손등으로 입가를 쓱 닦았다.

“아직도 있어.”

“어디에 있는데?”

“여기.”

데클란이 냅킨을 들고 내 입을 훔쳤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입술을 스치고 지나가자 기분이 묘해졌다.

지금의 데클란은 나에게만 상냥하지만, 나중에는 이레사 공녀에게만 다정해지겠지?

‘여주가 등장하면 사라질 엑스트라가 바로 나인걸.’

나는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생각을 감추며 부모님의 뒤를 따라가려는데, 집사가 나와 데클란을 멈춰 세웠다.

“남작님께서 어른들만 보겠다고 하셨단다. 너희들은 응접실에서 기다려주지 않으련?”

그 말에 나와 데클란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는 남작님이 내가 다 나은 모습 보여주면 기뻐할 거라면서?

‘이거 말이 다르잖아?’

왜 갑자기 부모님만 보자고 하는 건지, 나는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 너희들은 기다리고 있으렴. 우리가 남작님에게 선물 전달해주고 오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해!”

부모님은 오히려 짐을 덜었다며 안도하고 있었다. 행여나 우리가 인페르나 남작 앞에서 불경한 모습을 보일까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부모님은 집사를 따라 응접실을 벗어났다.

“간식 더 줄까?”

응접실에 남은 하녀가 우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더 먹어도 돼요?”

데클란이 조심스럽게 하녀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초콜릿 무스 케이크 먹어 볼래?”

“네, 좋아요!”

씩씩하게 답하는 데클란을 보며 나는 속으로 후후 웃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녀는 주방으로 내려가 간식거리를 더 가지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와 데클란은 단둘이서 응접실에 남게 되었다.

“데클란, 저기 샹들리에 좀 봐.”

소파에 앉아 응접실을 구경하던 내가 천장 위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가리켰다.

제아무리 지위가 낮은 귀족 작위라고 해도, 역시 귀족은 귀족이었다.

수백 개의 작은 크리스털 조각으로 장식된 샹들리에는 조명의 빛을 반사하며 발광하고 있었다.

마치 수백 개의 별 조각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저거 크리스털 한 조각에 얼마나 할까?”

홀린 듯이 샹들리에를 구경하던 데클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우리 몸값보다 비쌀걸.”

내 시니컬한 발언에 데클란은 나를 흘끔 흘겨보았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부모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끼이익—.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오, 초콜릿 무스 케이…….”

하녀가 새로운 간식거리를 가지고 돌아온 줄 알았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응접실의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문가에 서 있는 이는 간식 트레이를 든 하녀가 아니었다.

“……너희들은 누구야?”

문가에는 웬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 아이는 우리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남자아이와 우리 사이에는 나이가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혀 닮은 게 없었다.

곱상한 외모를 가진 남자아이는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한밤중의 달처럼 창백해 보이는 것이 조금 아파 보이기도 했다.

매일 숲에서 뛰어노느라 상처투성이에다가 피부가 탄 우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또 남자아이는 세련돼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셔츠 앞에 매인 작은 나비 리본은 좋은 질감을 자랑하며 반짝거렸고,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카락은 모범적인 8:2 가르마로 나누어져 있었다.

딱 봐도 저택의 사용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작님의 아들인가?’

나는 인페르나 남작에게 어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남작이 아이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너희들, 내 어머니를 만나러 온 거야?”

맞는 모양이다.

상대방이 남작의 아들임을 깨달은 나는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전 사샤라고 해요. 이곳 영지에 있는 미드턴 마을에서 왔어요. 그리고 얘는……”

“……데클란이라고 합니다.”

정황상 남자아이가 남작의 아들이란 것을 눈치챈 데클란이 공손히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로지에라고 해.”

로지에. 로지에라니.

참 귀티 나는 이름이었다.

로지에는 선선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잘됐다. 저택에서 혼자 있으면 심심했는데. 괜찮으면 내 말동무가 되어주지 않을래?”

로지에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감탄했다.

귀족들은 걸음마를 뗄 때부터 고귀함을 주입받는 걸까? 어쩌면 걷는 모습도 저렇게 우아할 수 있을까.

로지에는 귀족 자제답게 굳이 우리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맞은편 소파에 풀썩 앉았다.

“사샤 양, 데클란 군. 너희들은 여기 왜 있지?”

“아, 그게 말이죠…….”

로지에의 질문에 나는 괜스레 애먼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멧돼지를 만나서 다쳤던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말하자면 이야기가 조금 길어요. 그냥 짧게 설명해 드릴게요.”

“아니야. 난 긴 이야기가 좋아.”

로지에가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데클란과 전혀 상반되는 인상이었다.

데클란은 가시가 잔뜩 돋은 들장미와도 같았는데, 로지에는 백합처럼 곱고 고상한 느낌이 물씬 났다.

“그럼 설명해 드릴게요.”

로지에의 허락을 받은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토끼를 잡기 위해 숲으로 갔던 이야기. 피 냄새를 맡은 멧돼지와 맞닥트린 이야기.

데클란의 실수로 내 등 뒤에 화살이 박혀버린 아찔한 상황.

그리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페르나 남작!

로지에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감탄을 하는 등, 진심으로 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사샤 양, 정말 용감하구나.”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로지에가 짝짝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별것도 아니었는데…….”

그 칭찬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부모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위험천만한 짓을 했냐며 계속 잔소리를 했었다.

마을 사람들 역시 내가 정신이 나갔거나 간덩이가 부은 게 분명하다며 혀를 찼다.

덕분에 나는 천하의 구제불능 사고뭉치로 거듭나고 말았다.

그런데 로지에는 이런 내가 용감하다고 말했다.

“아니야, 넌 정말 대단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로지에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동경하는 기사를 만난 것처럼 감동에 젖은 눈을 하고 있었다.

“사샤 양, 데클란 군. 혹시 미드턴 마을은 여기서 멀어?”

“어…… 아니요. 마차 타고 20분 정도면 도착해요.”

“그래? 그럼 다행이다!”

내 대답을 들은 로지에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면 내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래?”

“네?”

로지에의 말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귀족들은 원래 이렇게 대놓고 우정을 다지나?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나를 향해, 로지에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난 여름에만 이곳 인페르나 영지로 오거든. 그래서 여기에는 친구가 한 명도 없어.”

거기까지 말한 로지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여름에 내가 있는 동안만 저택에 와서 내 말벗이 되어주지 않을래? 너희만 괜찮다면, 매일 마차를 보내줄게.”

아하, 그런 뜻이었구나.

로지에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의 말이 이해되었다.

또래 친구가 없어서 심심하니 같이 시간을 때워 달라는 거구나.

나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빈 접시들을 바라보았다.

‘저택에 오면 매일 맛있는 간식을 얻어먹을 수 있겠지?’

이건 데클란에게 주어질 수 있는 천상의 기회였다.

이렇게 맛있는 디저트를 더 먹을 수 있는 데다가, 인페르나 남작가의 마차까지 탈 수 있다니!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당장 로지에의 부탁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나보다 데클란이 더 빨랐다.

“싫은데요.”

“……?”

퉁명스러운 데클란의 대답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얘 갑자기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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