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멧돼지에게 뒤쫓긴 사건이 터진 지 대략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약은 바르지 않아도 되겠구나.”
아침에 내 상처를 살펴보던 엄마가 말했다.
내 등 뒤에 난 상처는 이제 완전히 아물었다.
그러나 완전히 아물었다고 해서 새 살이 예쁘게 돋아난 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상처가 난 자리에는 흉터가 남게 되었다.
“속상해라. 벌써부터 등 뒤에 이런 흉터가 남아서…….”
마지막으로 내 등 뒤를 점검해주던 엄마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엄마는 이제 겨우 열 살인 내가 보기 싫은 흉터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옷 입으면 아무도 못 보는 곳인데요, 뭐!”
엄마와 달리 내가 태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흉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전신 거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등 뒤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목욕할 때마다 손으로 더듬더듬 만져본 흉터는 조각난 그릇 조각처럼 딱딱하고 거칠었다.
‘흉터가 그렇게 나쁜 거 같지 않은데.’
안일하기만 한 나와 달리, 엄마는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드레스 입으면 흉터가 보일 거 아니니.”
“드레스요? 그런 걸 제가 언제 입어 보겠어요?”
“언제 입기는! 결혼할 때 입을 거 아니니?”
아, 결혼 드레스 이야기구나.
그나저나, 결혼이라니.
엄마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데클란(사망 플래그)에 대해 신경을 쓰다 보니,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여기 마을을 떠나야지.’
깨끗하고 청정한 숲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도 좋았지만, 그렇다고 평생 이곳에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옥수수 좀 그만 먹고 싶어.’
도시로 나가서 모험을 떠나고 싶다.
이곳 왕국에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하고 싶기도 하고.
‘일단 데클란이 왕실 특수부대에 선발돼서 가는 것만 보고 가자!’
정확히 말하자면, 데클란이 나를 죽이지 않고 왕국 수도로 떠난 뒤.
데클란이 이 마을을 떠나가고 원작이 시작되면 나 역시 미련 없이 이 마을을 떠날 것이다.
‘부모님이 그립긴 하겠지만, 이왕 얻은 두 번째 삶은 한 곳에만 머물며 보내고 싶지는 않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엄마가 불쑥 말했다.
“오늘 아침 먹고 남작님의 저택으로 가자꾸나.”
“네?”
난데없는 엄마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남작님의 저택으로는 왜?
“남작님이 널 구해주시고 치료까지 해주셨잖니. 거기다가 약이랑 옷도 주시고.”
엄마가 곱게 접어놓은 셔츠를 내게 슬쩍 내보였다.
저번에 내가 인페르나 남작 저택에서 깨어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었다.
정황상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남작가의 하녀들이 옷을 갈아입혀 준 것 같았다.
“가서 옷을 돌려드리고, 감사의 보답으로 선물을 가져다드리도록 하자꾸나.”
“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인페르나 남작에게 고맙다고 제대로 인사를 한 번 더 드리고 싶었는데, 잘 됐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부모님은 남작님에게 가져다드릴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선물이라고 해도 거창한 건 없었다.
부모님은 올해 수확한 옥수수 중 가장 알이 튼실하고 당도가 높은 것들을 골라 담았다.
그리고 아침에 갓 만든 옥수수 주스를 유리병에 담아 리본을 묶어 보기 좋게 포장했다.
참고로 옥수수 주스는 나도 처음 봤다.
생옥수수 알맹이를 설탕과 함께 20여 분 정도 끓인 뒤, 알맹이를 건져내어 고운 천에 담아 꾹꾹 눌러 짜내어 나오는 게 옥수수 주스다.
신기해서 한 입 마셔봤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남작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면 좋겠구나.”
바구니 안에 담긴 옥수수와 주스를 보며, 아빠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아빠에게 밝게 말했다.
“그럼요.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천리송아모(千里送鵝毛)라는 고사성어가 있지 않던가.
선물이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정성만 담겨 있다면 그걸로 된 거다.
게다가 인페르나 남작은 착해 보이는 분이었다.
그녀라면 자기 영지에 사는 농부가 보낸 선물을 절대로 경시하지 않을 테다.
그렇게 나갈 채비를 마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는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데클란!”
“안녕, 사샤.”
내게 아침 인사를 올린 데클란이 부모님을 향해 꾸벅 인사를 올렸다.
“어머, 데클란 왔구나. 마침 잘 왔다. 너도 같이 남작님 저택으로 가지 않을래?”
엄마가 데클란에게 물었다.
“남작님 저택으로요?”
“그래. 저번에 사샤가 남작님께 신세를 졌잖니. 그래서 답례로 선물을 좀 가져다드리려고 한단다.”
그렇게 말하며 엄마는 데클란에게 선물 바구니를 슬쩍 보여주었다.
엄마는 가볍게 한 질문이었지만, 어째선지 데클란은 그리 가볍게 답할 수 없었다.
“아…… 저, 그게, 저는…….”
저번 사고 때문에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걸까?
데클란은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데클란을 다독이듯 말했다.
“혹시 남작님이 무서워서 그러니? 걱정 마, 저택 안으로 들어가진 않을 거야.”
“그래, 그냥 선물만 하인에게 맡기고 돌아올 거야. 바람 쐬고 온다고 생각하렴.”
그런 설명을 들었는데도 데클란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데클란에게 내가 마법의 주문을 걸어주었다.
“마차 타고 갈 거야.”
“갈게요.”
역시 마차를 좋아하는 데클란이었다.
저번의 사고 이후, 아빠는 마차 수레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나는 아빠에게 수레 위에 가리개를 만들어 달라며 졸랐다.
아빠는 이런 내 의견을 전격 반영해 주였다.
하여 수레의 네 꼭지에는 얇은 기둥이 세워졌다. 기둥 위로 엄마가 알록달록한 무늬의 모포를 덮어주었다.
가리개 아래로 선선한 그늘이 있으니 그렇게 덥지 않았다.
“너 마차 정말 좋아하는구나.”
수레 위에 올라탄 내가 데클란에게 말했다.
아빠와 엄마는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끌고 있었다.
“넌 왜 마차가 좋아?”
“바퀴 굴러가는 게 신기해.”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관찰하며, 데클란이 그렇게 답했다.
“신기해? 뭐가?”
“바퀴는 동그랗게 360도 돌잖아. 저기 빨간색 자국 보여?”
데클란이 손가락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나는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차 바퀴의 한구석에 붉은 페인트가 보였다. 아빠가 바퀴를 제작할 때 참고하려고 그어놓은 자국이었다.
“저 빨간 자국은 항상 바퀴와 같은 자리에 있어.”
“그렇지.”
“저 자국은 절대로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응, 맞아.”
“그런데 바퀴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저 빨간 자국이 보는 풍경이 달라져. 아무리 같은 자리에 있어도 바퀴가 돌 때마다 제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움직이는 게 신기해.”
“들어보니 그러네.”
나는 데클란이 참 별 쓸데없는 걸 얘기하고 있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데클란의 말이 내 마음을 툭 내리쳤다.
“나도 바퀴처럼 되고 싶어.”
“……?”
뭐지? 구르고 싶다는 건가?
사뭇 이해하기 힘든 발언이었다.
생뚱맞은 데클란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수레 턱에 기대앉은 데클란은 점점 멀어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봐. 얼마나 재미있을까. 항상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매번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다면.”
“…….”
“나는 나 그대로인데,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도 하루하루가 새로워지면 좋겠어.”
“……그렇구나.”
데클란의 말에 나는 그가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소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른들이 보기에 보잘것없는 것도 데클란에게는 큰 의미가 담겨 있었구나.
그렇게 한참을 달린 마차는 인페르나 남작가에 도착했다.
저택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하인 둘이 마차를 세웠다.
“여기 앞은 남작님의 사유지입니다. 누구시죠?”
“아, 저희는 말이죠…….”
마부석에서 내린 아빠와 엄마가 하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부모님의 설명을 듣던 하인은 수레 위에 앉아 있는 나와 데클란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래서 남작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전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부모님은 하인들에게 선물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바구니를 순순히 받지 않았다.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하인들 중 한 명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외부에서 들여오는 물건을 검사받아야 하는 모양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아무 물건이나 선물이라고 무턱대고 받으면 쓰나. 안전이 우선이지.’
그렇게 우리는 마차에 앉아 하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하인이 돌아왔다.
그의 뒤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 저택의 집사잖아?’
저번에 우리에게 쿠키 바구니를 쥐여준 바로 그 집사였다.
설마 집사가 직접 저택 문 앞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이고, 바쁘실 텐데 굳이 여기까지 나오시다니!”
하인과 함께 돌아온 이가 남작가의 집사라는 말을 들은 부모님이 급히 허리를 굽히며 예의를 표했다.
집사는 허허 웃으며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남작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네?”
“저택 안으로요?”
집사의 말을 들은 부모님은 물론, 나와 데클란까지 덩달아 당황했다.
그저 가볍게 선물만 전달하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저택 안으로 초대까지 받을 줄이야.
부모님은 쩔쩔매며 두 손을 휘저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뭐라고 어찌 저택 안까지…….”
“그렇지 않아도 남작님께서 따님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상처가 다 회복하여 건강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남작님도 더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집사의 말에 부모님은 난처해하면서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인페르나 남작이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근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결국 부모님은 집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처가 다 나았다니, 다행이구나.”
부모님을 뒤따르는 나를 본 집사가 방긋 웃었다.
“네, 남작님이 주신 약 덕분에 빨리 나았어요.”
물론 장장 한 달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다행이구나. 감사 인사는 남작님을 직접 뵈면 드리려무나.”
그렇게 말하는 집사는 자꾸만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나와 대화를 하고 있어서 쳐다보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우리가 저택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집사는 계속해서 내게 눈길을 흘렸다.
왜 이렇게 자꾸 쳐다보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