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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29)화 (29/177)

29화

저번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데클란은 약속을 잘 지키는 아이였다.

그날 이후, 데클란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나를 찾아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 쉬고 있으면 데클란이 어김없이 찾아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어머! 데클란 왔구나!”

엄마와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 사샤.”

아침 인사를 하는 데클란의 목소리는 대체로 무덤덤했다.

혹자는 평온하다고 말할지도 몰랐지만, 내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평온한 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지만 자아낼 수 있는 거다.

하지만 데클란은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곤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관심이 없다고 어필하고 싶어 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래서 나는 헷갈렸다.

‘얘 나 싫어하나?’

그러나 내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마다 데클란은 매번 다정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먹어.”

“이게 뭐야?”

“머랭 쿠키. 독 같은 거 안 탔으니까, 어서 먹어.”

그래, 정정하도록 하겠다.

데클란은 내게 자꾸만 맛있는 걸 먹였다.

물론 내가 먹기 싫다는데 억지로 꾸역꾸역 먹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불만은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나한테 자꾸 먹을 걸 주면 내가 미안하잖아!”

데클란이 준 간식을 야금야금 먹으며, 내가 외쳤다.

맛있는 간식을 한입 가득 먹고 있는 나는 욕심쟁이 다람쥐처럼 두 볼이 빵빵해 있었다.

의자에 앉은 데클란을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먹어. 내가 주고 싶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너무해. 너 나 살찌우려고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또 다른 오트밀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데클란이 직접 집에서 구웠다는 쿠키는 눈물 나게 맛이 있었다. 쿠키를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입 안이 행복하게 녹아내렸다.

데클란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쩍 마른 거보다 낫잖아. 살 좀 쪄.”

“나 저주하는 거야?”

그렇게 티격태격 별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고 나면, 데클란은 침대에 누워있는 내게 책을 읽어주었다.

마을 회관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데클란은 그곳에 있는 아동용 도서를 전부 다 읽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특히나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을 가지고 와서 내게 읽어주었다.

그 또래의 남자아이가 그러하듯 데클란은 주로 기사가 등장하는 책을 즐겨 읽었다.

아무래도 그는 검을 다루는 기사를 동경하는 듯했다.

‘하긴, 검 쓰는 사람들 보면 멋지더라.’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나는 숲에서 만났던 인페르나 남작을 떠올렸다.

물론 나는 그녀가 검을 직접 다루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검을 날려 멧돼지를 즉사시킨 그녀의 포스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검술이나 배워볼까?’

어차피 시간도 많이 남는데, 건강에 좋은 운동 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데클란에게 넌지시 물었다.

“데클란, 너 검 쓸 줄 알아?”

“너처럼 못 써.”

“나?”

데클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은 나도 검을 쓸 줄 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내가 빙의하기 딱 하루 전, 사샤가 데클란을 목검으로 두들겨 팼다고 했었다.

어쩌면 사샤도 검술을 배우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사샤는 케쉬키와 친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케쉬키는 무기 상점 아들이었지.

그럼 사샤는 케쉬키한테 검술을 배웠나?

나는 사샤와 케쉬키가 어떤 사이인지 전혀 몰랐다.

그랬기에 사샤가 정말 케쉬키로부터 검술을 배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말 나온 김에 잘 됐다.

“데클란, 미안한데 내 옷장 옆에 가볼래?”

“그래.”

내 뜬금없는 부탁에도 데클란은 순순히 응했다.

“옷장 옆에 나무 상자 뒤에 목검이 있거든? 그거 가지고 와 주라.”

데클란은 아무런 불평 없이 내가 시키는 대로 목검을 가지고 와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는 대신 그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이거 너 가져.”

“뭐?”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그러니까 가져.”

“사샤…….”

데클란이 멍하니 검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줄곧 무뚝뚝하고 차분하기 그지없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집이 가난해서 목검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었겠지.’

맨 처음에 데클란의 집에 갔을 때, 그는 검술 교본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태껏 그가 검으로 연습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멧돼지 사건이 터지기 전, 나는 데클란에게 목검을 가지고 놀자고 말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냉랭하게 비소를 흘릴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데클란이 목검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실수했네. 데클란은 아마 내가 자길 놀린다고 생각했겠어.’

목검이 없는 아이에게 목검 가지고 놀자고 한 꼴이니까.

왜 데클란이 나와 노는 걸 그렇게나 꺼렸는지 뒤늦게나마 이해가 되었다.

검을 쥐고 있던 데클란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사샤, 이거…… 정말 내가 가져도 돼?”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보단 너한테 더 어울려.”

“그게 무슨 뜻이야?”

“음? 그야 당연히 데클란 넌 커서 훌륭한 기사가 될 거니까.”

그것도 무려 왕국의 역사를 다시 쓴 위인이 될 예정이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 말을 들은 데클란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왔다.

‘아차.’

그제야 나는 나 자신이 너무도 스스럼없이 미래를 발설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속 원작 소설, 원작 소설만 생각하다 보니 당연히 모든 사람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뒤늦게 내 발언을 수정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그렇게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는 뜻이야.”

“그렇지만 평민은 기사가 될 수 없어.”

데클란이 두 눈을 치뜨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아이고, 걱정하지 마렴. 나중에 다 특수 전형이 생길 계획이란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포장해야 하지.

“그래도 상관없어. 데클란 넌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잖아. 꿈을 좇아 열심히 노력하면 이루어질 거야.”

“노력한다고 다 된다고? 넌 그런 말을 믿어?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내 훈훈한 덕담에 데클란이 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당장 마을의 애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는지 너도 익히 들어서 알잖아. 난 아빠도 없는 천한 아이야. 내 아빠는 날 거두기 싫어서 엄마와 날 함께 버렸다고. 그런 내가 출세하면 얼마나 출세하겠어?”

“…….”

덤덤하면서도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데클란의 말을 들은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참으로 부정적인 태도였지만, 마냥 그를 탓할 수 없었다.

데클란은 어릴 적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며 살아온 아이였다.

그에게 이 세상은 한없이 날카롭고 매섭고 혹독한 곳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이 세계를 사랑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모든 것은 늘 데클란에게만 불공평했다.

데클란은 한순간도 자신에게 친절하지 못했던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없었을 테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일말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로 결심했다.

미래에 더없이 밝고 환하게 빛나게 될 이 아이가, 고작 이런 과거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잘 들어, 데클란.”

나는 침대 앞에 선 데클란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넌 나중에 커서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검을 들고 서 있던 데클란이 움찔 놀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러나 그는 예전처럼 뒷걸음질을 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마주 잡은 채 나를 올곧이 바라보았다.

그런 데클란에게 내가 천천히 읊조렸다.

“날 믿어, 데클란. 넌 커서 아주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네게 뭐라고 말해도 귀담아듣지 마.”

“…….”

“그 사람들은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너에 대해 관심도 없고, 너에 대해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아. 그런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차라리 그 사람들보다 너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잘 아는 나를 믿어.”

“……사샤 네가 어떻게 알아?”

무겁게 닫혀있던 데클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난 분명 이 마을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거야. 가난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에 걸맞은 삶을 살 게 분명하다고. 그런데 사샤 네가 뭔데,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이는 데클란의 목소리 아래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출구가 느껴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더더욱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넌 이미 대단한 사람인걸.”

“……거짓말.”

“나 거짓말 안 한다니까? 네가 얼마나 대단한 아인데. 일단 넌 얼굴이 잘생겼어. 목소리도 좋아. 네 머리카락을 보면 가을의 낙엽이 생각나. 참고로 가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야. 그리고 네 눈도 반짝거리는 게 너무 예뻐.”

“그만.”

데클란이 내 말을 뚝 끊었다. 더 이상 내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데클란 넌 얼굴만 착한 게 아니라 인성도 착해. 상냥하고 친절해. 넌 네게 못되게 굴던 나한테도 이렇게 잘 대해 주잖아.”

“그만해.”

“게다가 넌 네 엄마를 도와 집안일도 하지.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하여튼 뭐든지 다 잘해. 멋져. 네 나이에 이렇게 착실하고 열심히 사는 애 별로 없어. 정말 대단해.”

“사샤, 그만.”

“넌 책도 많이 읽어. 똑똑해. 항상 새로운 걸 배우려고 하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어. 그리고 검술 교본도 읽고 있었지?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어쨌든, 너 이미 대단한 사람이야. 네가 대단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냥 전부 다 무시해.”

“그만하라고 했잖아!”

결국 참지 못한 데클란이 나를 다그쳤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말이 다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널 많이 좋아해.”

나는 마지막으로 데클란에게 꼭 하고 싶던 말을 그렇게 날름 뱉어버렸다.

“자신감을 가져, 데클란. 그 누구도 아니고, 무려 내가 널 좋아한다니까?”

“네가…… 네가 뭐라고, 감히 그런 말을.”

나는 뻔뻔하게 철면피를 깔고 선포했다.

“나? 난 너랑 가장 친한 친구잖아.”

“너…….”

“아니다. 정정할게. 너랑 가장 친해지고 싶은 친구야.”

“하…….”

그 말을 들은 데클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건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힌 건지. 그것도 아니면 방 안의 분위기가 후끈해 더워서 그런 건지.

그는 결국 푹 고개를 숙였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붉게 달아오른 데클란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런 데클란을 재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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