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렇게 내게 디저트까지 착실히 챙겨 먹인 데클란은 나를 방까지 안내해주었다.
“설거지 내가 할…….”
“그냥 자.”
데클란은 다시 내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나 밥을 얻어먹고 난 뒤 뒷정리를 돕지 않는 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침대를 벗어나기 위해 최후의 반항을 모색했다.
“그렇지만 아침에 계속 자서 잠이 안 온단 말이야.”
“그래? 그럼 책 읽어줄게.”
데클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가져온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갑자기 독서 타임?
당황한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데클란이 내게 선보인 책을 바라보았다.
이제 제법 긴 글을 읽을 수 있는 저학년 학생에게 어울릴 법한 책이었다.
<드래곤에게 잡혀간 공주님을 구해낸 용감한 기사님>
제목이 스포일러였다.
‘책 제목이 저래도 되는 거야?’
나는 작은 충격에 사로잡힌 채 책 표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반면 데클란은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책을 펼쳤다.
“[제1장. 프린스 공주님, 드래곤에게 잡혀가다.]”
잠깐만. 공주님 이름이 프린스야?
“그 공주님은 얼굴이 털이 나는 공주님이니?”
“뭔 소리야.”
데클란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다시 책의 페이지 위로 눈을 돌린 데클란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옛날 옛날 어느 왕국에 프린스 공주님이 살았습니다.]”
방 안으로 데클란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오, 목소리 좋은데?’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데클란의 목소리는 확실히 미성이었다.
비록 지금의 데클란은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열 살의 소년이었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장성하면 분명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거듭나리라.
“[프린스 공주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공주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린스 공주님이 사라졌습니다.]”
네? 갑자기요?
엄청난 전개 속도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웹소설도 이렇게 전개가 빠르지 않을 텐데.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클란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놀란 왕궁의 사람들은 프린스 공주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디 갔겠어? 드래곤에게 잡혀갔겠지.
“[‘공주님이 어디 간 거지?’ 왕궁의 사람들이 당황하며 외쳤습니다.]”
데클란이 생동감 넘치게 놀란 사람들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제법 잘하는데?
침대에 누운 나는 가만히 데클란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나중에 데클란은 아이가 있으면 동화책도 잘 읽어줄 것 같았다.
요리도 잘하지, 설거지도 하겠다고 나서지, 거기다가 동화책도 잘 읽지.
데클란은 참 가정적인 남자구나.
‘그래, 내 최애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괜히 흡족해진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한 데클란이 고개를 삐딱하게 넘겼다.
“왜 웃어?”
“이, 입가의 근육이 말을 안 듣네. 하하!”
괜히 찔린 나는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이에 데클란은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왜 쳐다봐?”
“너…….”
“내가, 뭐?”
“너 말이야, 그렇게 웃으니까 예…… 아니다.”
데클란이 하던 말을 툭 끊어버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엥? 뭐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예, 그 뒤에 뭐? 예쁘다고?”
“……자기 입으로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 처음 보네.”
그렇게 중얼거린 데클란은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 뒤로 데클란은 정말 책만 열심히 읽어주었다.
책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다.
어느 날 못된 드래곤이 공주님을 잡아간다.
드래곤이 공주를 납치한 이유는 단 하나.
공주가 반짝반짝 빛나서!
공주의 미모가 빛난다는 뜻이 아니었다.
공주는 말 그대로 반짝거렸다. 왜냐하면 그녀는 온몸에 온갖 화려한 보석을 지니고 다녔으니까.
덕분에 그녀는 썬 캐처처럼 사방에 빛을 뿜어댔다.
덕분에 드래곤은 공주가 걸어 다니는 보석이라고 착각하고 만 것이다.
‘진짜 어이가 없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그 뒤로 국왕은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온 왕국에 공고를 붙인다.
그리고 제목에 걸맞게 드래곤에게 잡혀간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그냥 기사님도 아니고 무려 용.감.한. 기사님이 납신다.
기사는 용이 사는 레이어로 숨어들어 간다.
그곳에서 기사는 공주에게 몸에 지닌 보석을 전부 벗어 던지라고 말한다.
공주가 몸에 치장하던 보석을 전부 버리자, 드래곤은 그녀에게 흥미를 잃고 만다.
그렇게 기사와 공주는 드래곤의 레이어에서 도망치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그 뒤로 왕궁으로 돌아온 기사님은 프린스 공주님에게 영원한 기사의 맹세를 하였습니다. 기사님은 평생 프린스 공주님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 문장을 끝으로 데클란이 책을 덮었다.
“그게 끝이야?”
가만히 데클란의 낭송회를 감상하던 내가 대뜸 물었다.
뭔가 찜찜한 엔딩이었다.
해피 엔딩이긴 한데, 뭔가 싱거웠다.
보통 드래곤에게서 구출된 공주는 기사와 결혼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 내가 데클란에게 물었다.
“기사랑 공주 결혼 안 해?”
그러자 이런 반문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기사랑 공주가 어떻게 결혼해?”
음?
데클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돼. 사랑하는 사이니까 결혼하면 되지.”
“사샤,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랑한다고 무조건 다 결혼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으으음?
처음에 나는 데클란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천천히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자,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맞아, 여긴 신분제가 있는 봉건주의 사회였지!’
너무 현대인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공주는 기사와 결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공주는 왕족이고, 기사는 왕족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니까.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데클란은 이레사 공녀가 같이 도망치자고 할 때 계속 안 된다고 했었지.’
이렇게 보면 데클란은 참 우직하고 고리타분한 면이 있다.
“물론 신분을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사랑하면 괜찮다고 생각해. 만약에 내가 공주였으면 공주 자리를 버리고 기사와 결혼했을 거야.”
“너 되게 이상한 말 한다.”
데클란이 나를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너 어디 두고 보자.’
기다려 봐. 나중에 이레사 공녀가 너에게 사랑의 도피를 권할 때도, 넌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중에 전개될 원작 소설의 흐름을 떠올리고 있는데, 데클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 부모님 곧 돌아오시겠다.”
데클란의 말에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붉은색과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느샌가 해가 지고 있었다.
데클란이 읽어주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렇게 빨리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니.
“너 목 안 아파?”
데클란이 장장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내가 물었다.
“아니. 그러는 넌 등 안 아파?”
“등? 아, 상처 말이야? 별로 안 아파.”
나는 데클란에게 내가 정말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씩씩하게 답했다.
그러자 데클란의 얼굴 위로 잠시 그늘이 지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나 거짓말 안 해. 내 성씨 걸고 맹세할게.”
“너 평민이라 성씨 없잖아.”
아, 맞다.
데클란의 현실적인 지적에 나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런 나를 흘끔 쳐다본 데클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쨌든 알았어. 그럼 내일도 또 올게.”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멘 데클란이 내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또 온다고?”
“왜, 싫어? 언제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면서?”
“아니, 그게 아니라…….”
데클란의 반문에 나는 우물쭈물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오늘 종일 데클란이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좋았다.
그렇지만 그 다정함 뒤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악의가 두려웠다.
비록 나는 겉으로 하하 호호 깔깔하고 있었지만, 사실 속이 조금 불편했다.
갑자기 애가 달라진 것처럼 친하게 구니까, 그건 그거대로 껄끄러웠다.
참 아이러니했다. 분명 데클란이 나를 친구로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데클란이 내게 잘해주기 시작하니, 마음 한구석이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잘해주는 거니, 나의 잘생긴 사망 플래그?
애매한 건 질색이다.
좋은 건 좋은 거고, 싫은 건 싫은 거다.
흑이면 흑이고, 백이면 백이라고 확정을 짓자.
만일 데클란이 아직도 나를 싫어하고 있어도 좋다. 아니면 데클란이 어제의 일 이후 나를 용서해 준 거라도 상관없다.
나를 향한 데클란의 시선이 어떠하든, 일단 알고는 있어야겠다.
데클란의 속마음도 모르게 나만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건 싫었다.
‘그래, 아예 물어보자.’
미움 받고 있는 거라도 알고 미움받도록 하자!
그렇게 마음을 굳힌 나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채비하던 데클란을 말로 붙잡았다.
“데클란, 잠깐만!”
방문을 막 나서려던 데클란이 고개를 돌아보았다.
찬란한 석양 아래에 데클란의 갈색 머리카락이 빛나고 있었다.
순간 그의 금빛 눈동자가 참 오묘하고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너 나 좋아해?”
에둘러 말하는 게 싫었던 내가 그렇게 대놓고 물었다.
사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 외에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너는 나와 깊은 우정의 교류를 두고 싶어 하니?’ 따위의 말로 물어볼 수도 없는 거 아닌가.
“…….”
내 질문이 너무 정곡을 찔렀는지 데클란의 얼굴에 당혹감이 내비쳤다.
이윽고 내 방 안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이제 곧 여름이 끝나가는 계절이었지만, 이 방 안에는 당장 눈보라가 몰아칠 것만 같았다.
방문 손잡이를 잡고 선 데클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물어봤나, 생각하던 그 찰나.
“……좋아한다고 하면.”
자물쇠처럼 꾹 잠겨 있던 데클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만약에 널 좋아한다고 하면…… 네가 뭐 어쩔 건데?”
“어……?”
데클란의 말에 나는 황망해졌다.
이건 도대체 무슨 답이지? 게다가 왜 시비조인 건데?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또다시 용기를 낸 내가 집요하게 물었다.
이건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알고 싶었다. 데클란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과연 내가 사망 플래그를 벗어나 엑스트라 감인지.
꼭 알고 싶었다.
그런 내게 돌아온 답은 썩 만족스럽지도, 그렇다고 불만스럽지도 않은 답이었다.
“……싫지는 않아.”
끼이익—.
그런 애매한 답을 남긴 데클란이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이윽고 쾅,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
방에 홀로 남은 나는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싫지 않다는 건…… 좋아함의 동의어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데클란이 나를 설마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개연성이 없는 일이잖아.’
당장 해리포터 시리즈에 빙의했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볼드모트 추종자인데, 해리포터가 갑자기 나한테 반했다고 하면 얼마나 터무니가 없겠는가.
그건 완전 팬픽에서야 볼 수 있는 내용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