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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27)화 (27/177)

27화

비주얼이 번쩍번쩍 빛나는 요리를 보며,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데클란이 내어온 요리는 마치 미슐랭 3스타급 레스토랑 메뉴처럼 보였다.

“엄청 비싸 보여…….”

“하나도 안 비싸.”

내 넋이 나간 혼잣말을 들은 데클란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데클란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그럼 어느 집에서 훔쳐 왔겠니?”

데클란이 멍청한 질문 좀 하지 말라는 듯이 핀잔을 줬다.

“부담 갖지 마. 어제 네가 잡은 토끼로 만든 거니까.”

오븐 장갑을 벗은 데클란이 가볍게 대꾸했다.

“버섯은 오늘 아침에 내가 숲에 가서 채취한 거고, 당근은 우리 집에서 조금 가져왔어.”

“……아침부터 버섯을 직접 구해왔다고?”

“그래. 토마토랑 옥수수는 너희 집 꺼야. 허브는 너희 집 뒤에 있는 텃밭에서 뜯어왔고.”

데클란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내 맞은편의 의자를 잡아당겼다.

세상에!

나는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 유기농이야! 게다가 엄청 신선하기까지 해!

편의점 도시락과 냉동식품에 길들어 있던 현대인의 뇌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독 같은 거 안 넣었으니까, 어서 먹어.”

데클란은 나무로 된 주걱으로 접시에 담긴 요리를 내 그릇에 덜어주었다.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김이 확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향긋한 허브와 푹 끓은 토마토의 부드러운 향이 코를 다시 한번 찔렀다.

군침이 절로 돌았다.

“이거, 이름이 뭐야?”

얌전히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올린 내가 물었다.

“이거? 래빗 카차토레.”

카차토레?

요리의 이름을 들은 나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카차토레라면 전생에 딱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다.

우연히 방문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메뉴의 이름이 신기해서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 그 카차토레는 본래 사냥꾼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했다.

사냥꾼들은 잡은 사냥감을 각종 채소와 토마토소스에 버무려 즉석에서 조리하여 먹었다고 한다.

‘데클란이 직접 요리한 걸 대접받다니!’

나는 포크로 고기 한 점을 쿡 찔렀다.

어찌나 부드럽게 익었는지 포크가 절로 쑥 들어갔다.

고기 조각에 토마토소스를 쓱쓱 바른 나는 냠, 하고 한입 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맛있어!’

두 눈이 크게 번쩍 뜨였다.

고기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흘러나온 육즙이 입안을 장악했다.

적당히 간이 맞춰진 토마토의 향기 뒤로 감춰진 허브향이 혀끝을 감돌았다.

연이어 버섯을 쿡 찔러 입에 넣었다.

숲에서 버섯을 갓 따왔다는 데클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버섯에는 싱긋한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오물오물 씹는 감이 아주 신선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먹는다는 암브로시아가 이런 느낌일까?

포크를 쥔 나는 행복한 미소와 함께 두 눈을 꼭 감았다.

맛있어! 아름다운 맛이야!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속으로 감탄하고 있던 내게, 데클란이 빵 한 조각을 내밀었다.

“치아바타에다가 토마토소스 찍어 먹어.”

그 훌륭한 제안을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오븐에서 갓 나온 치아바타는 아직도 따끈따끈했다.

겉이 바삭바삭하고 속이 촉촉한 치아바타를 토마토소스에 쿡 찍자, 새하얀 속살이 먹음직스러운 빛깔로 물들어갔다.

나는 거침없이 빵을 입에 넣었다.

“맛있어?”

맞은편에 앉아있던 데클란이 물었다. 그는 아직도 앞치마 차림이었다.

요리에 홀린 나는 그에게 진심과 사심이 뒤섞인 답을 돌려줬다.

“너무 맛있어! 매일매일 먹고 싶어!”

“……매일매일 먹을 정도로 맛있진 않을 텐데.”

“아니야! 내가 여태까지 먹었던 거 중에서 제일 맛있어!”

“너희 부모님 요리 못하나 보다.”

“그게 아니라, 네가 한 요리가 정말 맛있다니까!”

그러면서 나는 주걱으로 카차토레를 퍼서 데클란의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너도 어서 먹어. 식기 전에 다 먹어버리자.”

“응.”

짤막이 대꾸한 데클란도 포크를 들어 올렸다.

“데클란 너 요리 잘하는 줄 몰랐어.”

쉴 틈 없이 요리를 오물오물 씹으며, 내가 데클란에게 말했다.

그러자 데클란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익숙한 거야. 엄마가 바쁘면 내가 요리하거든.”

“그렇구나. 너 진짜 팔방미인이다. 요리 잘하는 미남 찾기 참 힘든데…….”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헤헤, 하고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데클란 너 정말 대단하다. 이러다가 레스토랑 차려도 되겠어.”

그건 과장이 아니었다.

데클란이 식탁 위에 내놓은 음식은 수준급 요리였다.

당장 도시로 가면 돈을 지불하고 이 음식을 맛보겠다는 사람들이 많을 테다.

내 칭찬을 들은 데클란은 홱 고개를 돌렸다.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먹어.”

어째선지 그의 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응.”

나는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주걱을 다시 들었다.

점심 식사는 내가 무려 세 접시나 깨끗이 비운 뒤에야 막을 내렸다.

“접시는 내가 씻을게!”

데클란에게 식사를 대접받았으니, 뒷정리는 내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내가 식탁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디저트 먹어야지.”

데클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디저트? 디저트까지 준비했다고?

호화로운 코스 요리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혼란에 빠진 나를 뒤로 둔 채, 데클란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먹어.”

트레이를 든 데클란이 유유히 돌아왔다.

트레이 위에는 케이크 한 조각과 두 개의 찻잔이 놓여있었다.

트레이를 식탁 위로 올린 데클란이 능숙하게 디저트를 세팅했다.

캐서롤 접시가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서 사라졌다.

대신 테이블 중앙에는 케이크가 담긴 접시 하나가 놓였다.

초콜릿이 군데군데 콕콕 박혀 있는 고운 베이지색의 케이크였다.

“이것도 설마 네가 만들었어?”

“응.”

딸깍.

데클란이 내 앞에 찻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어제 남작님이 주신 쿠키가 오는 길에 다 부서졌더라고.”

“아.”

“그래서 쿠키를 아예 잘게 분질러서 밀가루랑 달걀, 우유 등등 섞어서 구운 거야. 버터도 넣었으니까 부드러울 거야.”

“데클란…….”

징하게 감동 받은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내가 읽었던 로판 소설의 남주들은 십중팔구가 귀족이었다. 그래서 소설 속에는 그들이 삼시세끼를 해결하는 묘사 따윈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찬실에 앉으면 맛있는 요리가 뚝딱 나왔으니까!

그러나 데클란은 무려 평민 출신의 남주였다.

그러니 그가 스스로 직접 밥을 해 먹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데클란은 단지 식용이 가능한 음식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는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이런 아름다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자였다.

도대체 이 남주는 어디까지 완벽해질 생각인 건가!

‘이레사 공녀 좋겠다. 이렇게 집안일도 잘하고 밤일도 잘하는 남주를 얻어서…….’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아쉬움에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왜 하필이면 여주인 이레사 공녀가 아닌,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엑스트라에 빙의한 걸까.

‘그래도 남주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지!’

그렇게 긍정 회로를 돌린 나는 데클란이 내민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색조가 닳고 이가 빠진 낡은 찻잔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은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멍하니 찻잔 안을 구경하고 있던 나를 본 데클란이 설명을 덧붙였다.

“장미꽃 차야. 올해 봄에 꺾어다가 말린 거야.”

“장미꽃 차라니…….”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기 시작했다.

꽃잎으로 우려진 차라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이제야 로판에 빙의한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두 눈을 반짝거리며 차를 구경하는 나를 본 데클란이 물었다.

“사샤 너, 꽃 좋아해?”

“당연하지. 예쁘잖아.”

차를 구경하며 삼매경에 빠져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도 않고 냉큼 대꾸했다.

“다행이네. 어서 마셔.”

“왜 자꾸 먹으라고만 해?”

아름다운 것들을 조금 더 오래 눈에 담아두고 싶었던 내가 어울리지 않게 칭얼거렸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많이 먹어야지 네가 빨리 회복할 거 아니야.”

“빨리 회복해봤자 뭐가 좋은데?”

내가 데클란을 놀려먹듯이 반문했다.

데클란은 케이크 접시 옆에 놓인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그야…… 네가 빨리 나아야지 나랑 또 놀러 갈 수 있잖아.”

우뚝.

그 말을 들은 나는 자신도 모르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찻잔에서 시선을 뗀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기름칠이 덜 된 경첩처럼 목이 뻣뻣이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나랑 놀고 싶다고?”

“그래.”

“그렇지만, 데클란 너…….”

너는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라고 반문하려던 것을,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문득 어젯밤 데클란과 함께 마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만일 내가 죽으면…… 넌 행복해질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행복해질 리가 없잖아. 난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사샤.’

설마.

설마!

찻잔을 쥔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 내가 다 나으면 실컷 괴롭히겠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이게 맞는 듯했다.

데클란은 아침부터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 집에 마음대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갑자기 내 상처에 약을 발라주겠다고 권했다. 아무래도 내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완곡히 거절하자 나중에 점심때 오겠다며 또 돌아왔다.

내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커튼을 확 걷어내어 내 눈을 아프게 했다.

거기다가…… 갑자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였다.

‘혹시 날 맛있는 걸로 길들인 다음 하녀처럼 부려 먹으려고……?’

고심에 잠긴 나는 끙, 하고 소리를 내며 두 눈을 감았다.

‘저번에 먹었던 걸 또 먹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고 외치는 데클란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말이 안 되잖아!’

그렇지만 그 외에 다른 설명은 없었다.

데클란이 갑자기 죽었다가 깨어난 것도 아니고, 이렇게 180도 달라질 리가 없잖아!

‘아니면…… 원래부터 좋아하던 사이었나?’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여기에 빙의한 이후로 데클란이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귀에 딱지가 내려앉도록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장미꽃 차를 홀짝 마신 내가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입가에 씩 미소가 걸렸다.

순간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으아아! 갑자기 웃지 마!’

평소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아이의 얼굴 위로 웃음꽃이 피는 건 가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당황한 나는 급히 아무런 말이나 내던졌다.

“데, 데, 데클란! 너 꽃 좋아해?”

“뭐? 나?”

데클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전후 상황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무척이나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러나 데클란의 꿍꿍이를 알 수 없는 나에게 그 웃음은 미지의 공포를 안겨주었다.

“응.”

잠시 뒤, 여전히 미소가 걸린 데클란의 입술에서 조곤조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해.”

그런 말을 하는 데클란의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오롯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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