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나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내 옆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급히 들고 옮긴 의자였다.
그리고 그 의자 위에는.
“몸은 괜찮아?”
“……어.”
데클란이 앉아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데클란이 내 방에 와있다는 얘기다.
어?
왜? 데클란이 왜 내 방에 와 있는 거야?
‘데클란은 지금까지 날 직접 찾아온 적이 없는데…….’
이불 속에서 몰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데클란과 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데클란은 줄곧 나를 피해왔으니까.
지금까지 나는 매일 아침 데클란의 집에 가서 그를 찾았다.
그럴 때마다 데클란은 멈칫거리며 문을 닫으려고 했고, 나는 억지로 그를 끌고 나왔다.
말하자면 여태껏 내가 데클란을 일방적으로 데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클란이 나를 직접 찾아왔다니.
‘귀신 떼창 할 노릇이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데클란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데클란은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설마 데클란이 나를 보고 있을 줄은 몰랐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평소에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애가, 갑자기 왜…….
‘어제 충격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거 아니야?’
어쩌면 내가 인페르나 남작을 만나 기절하고 난 뒤 데클란이 나무에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게 맞는 것 같다.
내가 기절한 뒤, 케쉬키는 마을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데클란은 나처럼 인페르나 남작의 저택에 있었다.
어쩌면 데클란도 다친 걸지도 모른다.
“저기, 데클란…….”
“몸은 괜찮아?”
데클란에게 ‘혹시 어제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 다쳤니?’라고 물어보려는데, 데클란이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당황했다.
“아? 어? 뭐, 누구, 나?”
“지금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어…… 너?”
“난 괜찮아. 다친 곳 없어.”
“……왜?”
너 머리 다친 거 아니었어……?
그 질문을 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데클란이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말하고 싶은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쨌든, 너 몸은 괜찮아?”
“아…… 어…… 응…….”
그렇게 의욕 없이 답하면서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캐붕!
캐붕! 이거 완전 캐붕이다! 원작 남주가 이상해졌어요!
지금 데클란이 나보고 괜찮냐고 물어본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아는 데클란은 나를 걱정할 아이가 아니었다.
당장 어제 마차 안에서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도대체 과거에 사샤와 데클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데클란이 사샤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내가 사샤에게 빙의한 뒤, 나는 그에게 줄곧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래서 데클란은 혼란스러웠을 테다.
나를 싫어하는 마음과 내 도움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어제 사고로 인한 죄책감이 뒤섞여 괴롭게 느껴졌겠지.
원래 사람들은 단순하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데클란도 사람이니 마찬가지일 테다.
사샤를 향하던 악감정이 점점 호감으로 물들어가자, 데클란은 겁이 났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더더욱 미워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가 사샤에게 느꼈던 감정은 줄곧 미움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데!
그런 데클란이…… 지금 내게 이렇게 다정하게 몸 상태를 묻고 있다니.
‘도대체 간밤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야?’
이제 혼란스러운 건 나였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윽고 데클란이 더 놀라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줄게.”
의자에서 일어선 데클란이 내가 누워있던 침대로 다가왔다.
그가 내게 내민 것은 유리병이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는 짙은 청록색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지난번에 데클란이 내게 준 것과 똑같은 약이었다.
“등 돌려 봐.”
“어?”
“약 발라 줄게.”
“어어?”
데클란의 말에 내 입에서 자꾸만 바보 같은 발음이 튀어나왔다.
지금 시방 얘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등에 상처 아직 안 나았을 거 아니야. 이걸 바르면 상처가 조금 더 빨리 회복될 거야. 내가 발라 줄게.”
데클란이 유리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며 말했다.
나는 순식간에 피가 빨린 듯이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 발라 주겠다고?”
얘가 지금 뭐라는 거지?
남녀칠세부동석 사상에 찌든 나에게 데클란의 발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물론 데클란이 파렴치한 아이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나쁜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닐 테다.
게다가 내 상처는 어깨 바로 아랫부분에 나 있었다.
그러니 옷깃을 살짝만 내리면 됐다. 약을 발라준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왠지 모르게 무섭잖아!’
진짜였다.
당장 하룻밤 전까지만 해도 내가 싫다고 소리치던 애가 갑자기 상냥해졌다.
현실적으로 이게 말이 돼?
‘뭐지? 신종 괴롭힘인가?’
혹시 내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고 해놓고 일부러 상처를 짓누를 계획인가?
아니면 저 약에 이상한 약초를 섞은 건 아닐까?
자격 없이 받는 친절함은 고맙기는커녕 고압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돼, 됐어. 아침에 엄마가 벌써 약 발라 주셨는걸.”
“그렇구나.”
다행히도 내 말을 들은 데클란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래, 내가 만든 약보다 남작님이 주신 약이 더 좋겠지.”
“아니야! 네가 저번에 발라준 약도 효과가 좋았어. 다만 약을 한 번에 너무 많이 바르면 안 좋을 것 같아서…….”
괜히 데클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아닐까 싶어 내가 급히 덧붙였다.
그러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
나 정말 데클란에 대해서 많이 신경 쓰고 있구나.
행여나 데클란이 속상해할까 봐 이렇게 굳이 구질구질한 변명을 덧붙이다니.
정작 데클란 본인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침 먹었어?”
“응.”
“잘했어. 아프다고 밥 거르면 안 돼.”
“그럴 일 없어.”
내 끼니를 걱정해주다니.
갑자기 데클란에 대한 내 경계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처 나을 때까지 밖에 못 놀러 가겠다.”
“걸을 수는 있어.”
데클란의 말에 내가 엄지를 척 올리며 답했다.
만일 데클란이 같이 놀고 싶다고 하면 당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막 나돌아다니지 마. 그러다가 상처가 더 벌어지면 어떡해.”
그렇게 말한 데클란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손짓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긴장된 내 몸은 이내 팽팽히 당겨졌던 실을 풀었다.
“낮잠이라도 자. 푹 쉬어.”
데클란은 이불을 끌어다가 내 턱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마치 아기를 돌보는 것처럼 섬세한 손짓이었다.
“…….”
나는 정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데클란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단순히 예의상 스쳐 지나가듯 묻는 게 아니라, 정말 내 몸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너도 빙의한 거니……?’
슬슬 그런 우스꽝스러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점심때 다시 돌아올게. 잘 쉬어.”
방의 커튼까지 손수 쳐준 데클란이 내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나는 멍하니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사라진 데클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금…… 데클란이 돌아온다고 했나?
‘왜…… 왜 돌아와? 여긴 내 방이고, 네가 있어야 할 공간이 아닌데……?’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상대방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는 수 없지.
어두컴컴한 방안에 남겨진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모래가 뿌려진 것처럼 뻑뻑했던 두 눈꺼풀이 시야를 덮었다.
나는 이윽고 수렁에 잠긴 것처럼 스르르 잠들었다.
* * *
데클란은 약속을 지키는 아이였다.
해가 머리 위로 떠 오른 정오.
끼이익—.
내 방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상처 때문에 깊은 잠에 들 수 없었다. 덕분에 얕은 잠에 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던 중이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잠을 자는 데에도 꽤 많은 체력이 소비됐다.
슬슬 배가 고파진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에서 먹을 것을 주워 먹을 참이었다.
“잠은 잘 잤어?”
내 방으로 들어온 데클란을 바라보며,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너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왔어?”
“너희 부모님이 문 안 잠그고 밭에 가셨어.”
“왜?”
“너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나더러 같이 놀아달라고 하시더라.”
데클란의 말을 들은 나는 맥이 탁 풀렸다.
어머니…… 아버지…….
아무리 서로가 다 아는 작은 시골 마을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그냥 안전 불감증이다.
당장 숲속에 아이들을 잡아다 파는 강도들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데! 문을 안 잠그고 나가셨다니!
그렇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데클란이 창문의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밝은 햇살이 내 두 눈을 직선으로 내리 찔렀다.
“으악! 내 눈!”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창문을 드르륵 연 데클란이 태연스럽게 말했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밥까지 챙겨주겠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데클란을 향해 슬쩍 곁눈질을 했다.
“……우리 엄마랑 아빠가 너랑 같이 밥 먹으라고 했어?”
“응. 집에 있는 거 마음껏 먹으라고 했어.”
침대에서 일어선 나를 향해, 데클란이 한 손을 내밀었다.
“업어줄까?”
나는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요행일까나.
“……데클란, 미안하지만 나에게도 두 다리가 있어.”
“그래도 상처 벌어지면 어떡해.”
“계단 내려간다고 상처 안 찢어져.”
그렇게 데클란의 호의를 재치 있게 거절한 나는 방문을 나서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데클란이 잽싸게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데클란의 도움을 받아 부엌으로 내려갔다.
사실 크게 도움받을 부분도 없었지만.
“점심 가져다줄게.”
나를 먼저 식탁에 앉힌 데클란이 총총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점심 먹자.”
데클란이 양손으로 커다란 캐서롤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헉.’
그를 향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나는 숨을 거꾸로 들이켰다.
앞치마를 두른 데클란은 두 손에 오븐 장갑을 끼고 있었다.
저, 저기요, 남주님?
본격 요리사로 변한 데클란의 모습을 보고 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데클란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네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데클란이 내 앞에 놓은 캐서롤 접시의 뚜껑 아래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막 오븐에서 꺼낸 건지 따끈따끈한 열기가 내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느껴졌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그런 말을 하며 데클란이 접시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세상에!’
가장 먼저 코끝을 찌른 건 신선한 바질과 타임 허브의 향이었다.
은은하면서도 톡 쏘는 향기가 뒤섞여 군침을 절로 돌게 했다.
접시 위에는 선명한 토마토소스에 푹 익혀진 당근과 버섯, 그리고 옥수수가 보였다.
채소들은 흠집 하나 없이 곱게 썰어져 있는 것이 무척이나 고급스럽게 보였다.
접시의 정중앙에는 진한 주홍색으로 푹 익은 고기가 놓여있었다.
향초의 맛이 푹 밴 고기는 먹음직스러운 크기로 썰어져 있었다.
살코기 위로는 윤기가 잘잘 흐르고 있었는데,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고기가 얼마나 부드러울지 절로 상상이 갔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그 요리를 보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데클란, 이게 도대체 뭐야?”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네 점심.”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천상계 요리는 도대체 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