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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25)화 (25/177)

25화

다음 날 아침.

“으아아! 아파요!”

해가 밝자마자 내 방으로 올라온 엄마가 내 등의 상처를 봐주었다.

엄마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프니? 엄마도 마음이 아프단다.”

“엄만 마음만 아프지만 전 몸도 아파요!”

어제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받아온 바구니 안에는 연고와 회복제가 들려있었다.

친절하게도 의사인 딘 선생이 약 사용법도 다 알려주셨다.

침대 위에 엎드린 나는 엄마가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것을 그대로 견디고 있었다.

살갗을 뚫고 오는 듯한 통증이 이어졌다.

‘어제 분명히 얕은 상처라고 했는데!’

이게 얕은 상처라고? 그럼 깊은 상처는 도대체 어떤 수준인데? 몸이 창에 꿰뚫리는 건가?

속으로 끙끙 앓던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는 붕대를 다 갈아 주었다.

아마 내가 이렇게 크게 다쳐 본 적이 없어서 엄마도 헤매었던 모양이다.

“붕대 다 갈았다. 이제 회복제 마시렴.”

“네에.”

나는 고통에 훌쩍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옷 뒤의 단추를 잠가준 엄마가 내게 물었다.

“옷은 남작님이 주신 거니?”

나는 회복제를 꿀꺽꿀꺽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하게도 회복제에서 딸기향이 났다.

아무래도 딘 선생이 어린 내가 약을 잘 마실 수 있도록 딸기 향을 추가한 것 같았다.

인페르나 남작가 사람들은 다 친절하구나.

그렇게 속으로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남작님은 참 친절하신 분이지. 이런 비싼 옷을 주시다니…….”

“맞아요. 남작님 엄청 착하세요.”

“그렇지? 그럼 너 그 옷 벗어라.”

“네?”

왜 갑자기 기-승-전-탈의에요, 엄마?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턱대고 비싼 옷을 받을 수는 없잖니. 가서 다시 돌려드리자. 엄마가 새 옷 꺼내 줄게. 갈아입으렴.”

그러면서 엄마는 내 옷장을 열었다.

“어머나.”

탄성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사샤! 너 언제 청소 다 한 거니? 세상에, 네 옷장이 이렇게 깔끔한 건 처음 보네!”

내 옷장을 본 엄마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바닥에 있던 온갖 잡동사니가 사라졌다고 놀라신 게 불과 반 시간 전인데.

이제는 내 옷장을 보고 기겁하시다니.

엄마의 말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봐, 정리하니까 얼마나 좋니? 옷도 금방금방 찾을 수 있고…… 이 옷이 제일 크네. 이거 입으면 상처가 덜 스칠 거다.”

엄마는 후줄근한 셔츠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얌전히 인페르나 남작님에게 받아 온 셔츠를 벗고 내 옷으로 갈아입었다.

남은 회복제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사샤. 네 옷장에 넣어 둔 브로치 어디 갔니?”

“풉!”

나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회복제를 뱉어낼 뻔했다.

그간 잊어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옷장 안에서 발견했던 보석 브로치.

나중에 강도들에게 습격을 당했을 때,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미끼처럼 이용했던 브로치.

‘엄마도 브로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가?’

그 브로치는 옷장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샤만이 아는 비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브로치는 지금…….’

브로치의 행방에 대해 생각하자 그저 한숨만 나왔다.

아이들을 잡아다 팔아먹는 그 강도들을 만났던 그때.

나는 데클란의 안전 탈출을 위해 그놈들에게 잠시 브로치를 쥐여주었다.

나중에 그 자식들의 바지 주머니에서 브로치를 꺼내 회수할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이 빌어먹을 강도 놈들이 그대로 튀어버렸다.

‘가만, 그러고 보니.’

어제 인페르나 남작님이 강도를 쫓고 있다고 말했다.

인페르나 남작님이 강도들을 잡았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영지 일대 마을을 뒤흔들었던 큰 사건이었다. 그러니 만일 강도들이 체포됐다면 다들 소식을 전해 듣지 않았을까?

브로치를 강도에게 빼앗겼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급히 내용물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 넘긴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시치미를 뚝 뗐다.

“무슨 브로치요?”

내 반문에 엄마는 도리어 당황했다.

“무, 무슨 브로치냐니. 그…… 친척 집에서 받아 온 브로치 있잖니.”

어째선지 엄마는 말을 더듬었다.

그나저나.

친척 집에서 받아온 브로치라고?

엄마의 말을 듣자 나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내 부모님은 둘 다 평민 출신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값비싼 보석을 친척에게 받아왔다?

‘말이 안 되잖아.’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석연찮은 그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어서 나는 더 막 나가기로 했다.

“엄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친척 집에서 받아 온 브로치라니요?”

나는 최대한 순진한 척을 하며 그렇게 반문했다.

“사샤…… 너 갑자기 왜 그러니?”

“저희가 귀족도 아니고. 저희 집에 브로치가 있었다고요? 농담하지 마세요.”

“사샤, 너. 설마.”

이에 엄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어제 그 사고 이후로 기억을 잃은 거니?”

예?

엄마의 질문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나, 갑자기 이렇게 기억상실 환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건가?

직선적인 논리에 내가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지.

‘아니,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어차피 난 빙의하기 전 사샤의 기억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엄마가 말하는 보석 브로치가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언젠가 부모님이 나를 의심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천상의 기회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기억 상실인 척하자!

답은 기억상실뿐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일부러 두 눈을 크게 치뜨며 입을 열었다.

“기억……이요? 그러고 보니…… 뭔가 가물가물하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은…… 아!”

일부러 상상의 여지를 주기 위해 띄엄띄엄 틈을 주며 천천히 말을 이어가던 나는 갑자기 악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붙잡았다.

“사샤!”

화들짝 놀란 엄마가 내가 앉아있던 침대로 달려왔다.

미안해, 엄마.

속으로 엄마에게 미리 사과한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그리고 괜히 엄살을 부리며 소리쳤다.

“아야! 엄마, 머리가 아파요!”

사실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그렇지만 약간의 신빙성을 더해주기 위해 아픈 척을 하면 좋겠지?

“세상에, 사샤! 어떻게 된 거니!”

과연.

당황한 엄마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왕좌왕했다.

“회복제, 회복제를 마시렴! 이를 어쩌면 좋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엄마는 내 손에 회복제를 쥐여주고는 방으로 뛰쳐나갔다.

“여보! 여보! 빨리 사샤 방으로 올라와 봐요! 큰일 났어요!”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아빠가 급히 계단을 달려 올라왔다.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아빠는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사샤,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거니?”

그러면서 엄마와 아빠는 예전에 있었던 일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에 같이 눈사람을 쌓았던 이야기.

봄이 오자 온 가족 셋이서 도시락을 싸고 소풍을 하러 갔던 이야기.

옥수수밭에 오소리가 나타나 함께 오소리를 쫓아냈던 이야기.

지난여름에 영지 축제에 갔던 이야기.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 등등.

“기억나니……?”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엄마와 아빠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 답은 견고했다.

“기억 안 나요.”

당연했다.

부모님이 예시를 들었던 이야기는 전부 다 내가 사샤에 빙의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사샤는 소설 속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엑스트라의 성장배경을 내가 어찌 알까.

내 대답을 들은 부모님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씌워졌다.

암울해진 부모님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미안했지만, 나도 내 살길을 찾아야 했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라.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내가 진짜 사샤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기로 결심했다.

다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축 늘어진 부모님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어졌다.

“그래도…… 엄마랑 아빠가 내 진짜 엄마와 아빠라는 건 기억 나요. 그리고 엄마랑 아빠를 사랑한다는 것도요.”

조금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그래도 꼭 말하고 싶었다.

나는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진짜 사샤는 그들을 정말 많이 사랑했을 거라고.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그렇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말을 들은 부모님의 얼굴은 겨울 하늘처럼 더더욱 창백히 변했다.

왜 이러지?

“사샤…… 너…….”

내 손을 꼭 잡은 엄마가 더듬더듬 말머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엄마는 차마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엄마 대신 아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샤,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렴.”

“네.”

뭐지?

갑자기 진중해진 분위기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난 그냥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착한 딸이 되고 싶었던 건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나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 역시 내 손을 힘껏 잡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후우, 하고 짙은 한숨이 들려왔다.

엄마와 아빠 모두 내 손을 꽉 잡은 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가 된 기분이 들었다.

뭐야? 도대체 뭔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빠가 천근만근 무거운 자신의 입술을 드디어 열었다.

“사샤, 너 혹시…… 네가 우리 친딸이 아닌 것도 기억나지 않니?”

“……네?”

상상도 못 한 발언에 나는 부모님의 손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출생의 비밀이 이렇게 밝혀지다니!

깜빡이 없이 들어온 갑작스러운 전개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친딸이 아니라니요?”

나는 진심으로 놀란 상태였다.

단순히 ‘와 그렇군요! 신박한 사실이네요!’라고 말하며 웃고 넘길 수 없었다.

그저 이름 없는 엑스트라인 줄 알았는데, 이런 충격적인 과거가 있을 줄이야.

나…… 정말 엑스트라 맞나?

엑스트라치고 서사가 너무 장황하고 광대한데……?

“잠깐만요. 전 그럼 누구 딸이에요? 엄마랑 아빠는 또 누구고요? 전 왜 여기 있는 건데요?”

당황한 나머지 입에서 말이 절로 콸콸 쏟아져 나왔다.

“…….”

그러나 부모님은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 대답하지 못했을 터이다.

부모님은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사샤. 없던 일로 하자꾸나.”

“네?”

잠깐만요. 갑자기 없던 일로 하자니, 그게 말이 돼요?

“엄마, 아빠! 무슨 말이세요! 제대로 말해주세요!”

나는 내게서 등을 돌린 부모님의 소매를 잡았다가, 이윽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 부모님은…… 둘 다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사샤. 네가 우리 딸이란 사실은 영원할 거다.”

“그래, 넌 언제까지나 우리 딸이야, 사샤…….”

아…….

나는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부모님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더 꼬치꼬치 캐물을 수 있을까.

“……알았어요.”

나는 이내 입을 닫기로 결심했다.

이건 내가 사샤의 부모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다.

“……내려가서 밥 먹자꾸나. 배고프겠구나.”

“네…….”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는 이미 아침 식사가 모두 세팅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의 몫의 식사였다.

아침 식사 내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숨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제의 사고보다 오늘 들은 폭탄선언이 더 충격적이었다.

‘내가…… 친딸이 아니라고?’

그럼 난 도대체 어디서 나온 애야?

나는 부모님에게 흘끔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두 분은 내게 어색한 웃음을 보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침묵 속의 아침 식사를 마쳤다.

“……저 올라갈게요.”

처음으로 즐겁지 않았던 아침 식사를 마친 내가 방으로 올라가려던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연 엄마가 감탄을 내질렀다.

“어머나, 데클란!”

데클란?

화들짝 놀란 나는 문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사실이었다. 문밖에는 데클란이 서 있었다.

나를 단 한 번도 직접 찾아와 본 적이 없는 그 데클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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