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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24)화 (24/177)

24화

“……뭐?”

“말 그대로야! 앞으로 네가 데클란이랑 놀면, 내가 데클란 그놈 쥐어팰 거야.”

그렇게 외친 케쉬키는 주변의 아이들을 향해 눈짓했다.

자신의 말에 동참하라는 의미였다.

그의 압박에 아이들은 하나둘씩 말을 덧붙였다.

“그, 그래! 사샤 네가 데클란이랑 친구 하면 우리가 데클란 괴롭힐 거다!”

“데클란이 매일 우리한테 맞는 거 보고 싶으면 걔랑 계속 놀던가!”

제아무리 마을 아이들이 사샤를 좋아했어도, 사샤는 마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무리로 몰려다닌 아이들은 케쉬키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

그렇기에 마을 아이들은 그런 케쉬키를 거스르고 사샤를 따를 수 없었다.

계속해서 사샤를 향한 독설과 야유가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데클란을 향한 협박의 수위는 더더욱 높아졌다.

분위기는 점점 격렬해지고 험악하게 흘러갔다.

급기야 흥분한 아이들이 사샤를 붙들고 억지로 무릎을 꿇게 했다.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너야말로 가만히 있어! 마을에 새로 온 주제에 건방지게 굴지 말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데클란은 벌벌 떨면서 수풀 사이의 틈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 덤벼들고 싶었다.

케쉬키의 멱살을 쥐어 잡고 싶었다.

사샤에게 심한 말을 했던 것 모두 사과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고선 사샤의 손을 잡고 이런 아이들 말들을 필요 없다고, 나랑만 잘 지내면 된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날카로운 잎사귀 사이로 아이들에게 붙잡혀 바닥에 쓰러진 사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아이들 아래 짓눌려 있던 사샤의 두 눈이 데클란의 눈과 딱 마주쳤다.

“…….”

데클란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아이들이 사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그 아이를 발로 밟는 모습을 보아도.

그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데클란…… 괴롭히지 마.”

사샤의 말에 케쉬키가 코웃음을 쳤다.

“넌 그런 애가 좋아?”

“네가…… 알 바 아니잖아.”

사샤는 흙을 먹었는지 컥컥 기침해댔다.

사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이래저래 주먹질 당하고 발길질 당한 뒤라 옷이 너덜너덜했다.

게다가 팔과 다리가 긁혀 피가 주륵 나고 있었다.

“대단한 우정 납셨네.”

케쉬키는 그런 사샤를 내려다보며 밉살스럽게 입을 이죽거렸다.

“잘 생각하고, 앞으로 잘 처신해. 안 그러면 데클란도 너랑 같은 꼴 날 거야.”

“……개자식.”

“와…… 너 욕도 할 줄 아는구나? 놀랍네. 근데 앞으로 성깔 죽이고 다녀.”

케쉬키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사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만 봐주는 거다. 앞으로 나한테 잘 보이면 이런 일 없을 거야. 알겠어?”

철썩.

사샤는 케쉬키의 손을 내리쳤다.

그녀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이래 저래야?”

“하…… 그러는 너야말로 네가 뭐라고 이래? 네가 무슨 데클란 수호천사라도 되는 거야? 너희 둘이 사귀냐?”

그 말을 들은 마을 아이들이 큭큭 비소를 흘렸다.

즉석에서 지어낸 노래도 흘러나왔다.

‘데클란과 사샤가

나무 위에 앉아

서로 입을 맞추었다네


처음에는 사랑

나중에는 결혼

끝으로 사샤가

아이를 낳았네’

사샤가 얼굴을 붉히는 게 눈앞에 선선히 보였다.

“데클란은 빼. 여기서 왜 그 애 이름이 나와.”

“어이가 없네.”

케쉬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사샤, 네가 아무리 데클란을 기다려도, 데클란 걘 널 구하러 오지 않아.”

그 말이 데클란의 귀를 때렸다.

툭.

데클란의 손에 들려있던 꽃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데클란은 마을 아이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귀에 대고 있던 손을 떼어낼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데클란.”

데클란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두 눈을 떴다.

사샤였다.

데클란이 숨어있던 수풀로 다가온 사샤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샤의 부르튼 입술에 피가 묻어 있었다.

까진 살갗 위로 채 굳지 못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데클란은 숨이 턱 막혀버렸다.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많이 아프냐고, 걸을 수 있겠냐고.

가서 어른을 불러올까. 네 부모님에게 케쉬키랑 나쁜 애들을 혼내달라고 이를까.

그런 쓸모없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정작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정작 먼저 말문을 뗀 건 사샤였다.

“괜찮아?”

사샤가 데클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클란은 멍하니 그 아이가 자신에게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라니.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정작 그 질문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면서.

“그 애들 다 갔어.”

“…….”

“앞으로 내가 더 조심할게.”

“…….”

“네가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런 말을 남긴 사샤는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왜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만 했느냐고 책망하지도 않았다.

겁쟁이처럼 비겁하게 굴었다고 탓하지도 않았다.

그 뒤로 사샤는 데클란과 같이 다니지 않았다.

데클란은 사샤가 왜 자신을 거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자신과 같이 다니는 모습을 마을 아이들에게 들킨다면…….

그때 괴롭힘을 당하는 건 사샤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래서 사샤는 일부러 데클란을 괴롭히는 척했다.

괴롭히는 ‘척’만 했다.

사샤는 데클란을 절대로 세게 때리지 않았다.

데클란은 알았다. 그 아이에게는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다는 것을.

행여나 마을 아이들이 데클란을 못살게 굴까 봐, 사샤는 일부러 데클란을 괴롭히는 척한 거다.

그리고 데클란은 기꺼이 그 어설픈 연극의 주연이 되어주었다.

가끔 아이들이 사샤가 데클란을 심하게 괴롭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의심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데클란은 일부러 심하게 넘어져 자신을 스스로 다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사샤가 얼마나 심하게 자신을 괴롭혔는지 말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곧 사샤의 부모님께 달려가 그들에게 항의했고, 곧 온 마을 사람들에게 사샤가 얼마나 데클란을 싫어하는지 소문이 퍼졌다.

어머니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이 싫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사샤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데클란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결심했다.

사샤가 없던 옛날로 다시 돌아가 살아가기로.

그렇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잘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줄곧 암울하고 막막한 세상에서 처음 만난 빛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줄곧 세뇌하며 살아왔던 데클란이었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민 것이 바로 사샤였다.

데클란은 사샤로부터 어머니를 제외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데클란은 사샤로부터 허허벌판에서 뛰어노는 것이 그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데클란은 사샤로부터 음식을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눠 먹으면 더 맛있는 것을 배웠다.

데클란은 사샤로부터 매일 아침 두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데클란은 사샤로부터 누군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데클란에게 사샤는 모든 것이었다.

그가 여태껏 모르고 있던 행복감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사샤였다.

데클란은 더 이상 사샤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괴로웠다.

시꺼먼 어둠 속에 갇혀 살던 그에게 다가왔던 한 줄기의 빛.

늘 수렁 속에 잠겨 살던 그에게 유일하게 비쳤던 햇살이 사라졌다.

아무리 두 눈을 감고 다시 어둠으로 숨어들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이 세상에 그토록 찬란하고도 화사한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자신을 다정하게 감쌌던 그 빛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랬기에 사샤라는 아이의 존재는 데클란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매일 밤, 자신에게 익숙한 어둠에 몸을 맡기기 전, 데클란은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그 아이를 없애주세요.

만일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아이를 없애주세요.

자애와 사랑의 이름을 지닌 신에게 감히 그런 불손한 기도를 드렸다.

그 아이가 미웠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럭저럭 잘 살아가던 자신에게 온정을 가르쳐 준 그 아이가 너무나도 미웠다.

죽지 못해 살아가던 자신에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가르쳐 준 그 아이가 너무나도 미웠다.

만일 애초에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일 처음부터 그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랬더라면…….

매일 밤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이 공허감이 조금이나마 덜 쓰게 느껴졌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만일 사샤를 처음 만났던 그 날로 돌아가더라도, 데클란은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리는 그 아이를 반갑게 맞이했을 테다.

자신을 소개하는 그 아이를 바라보며, 그 싱그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을 테다.

그 아이가 이름을 물었을 때, 아무런 스스럼 없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을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가 꺄르르 웃으면서.

‘데클란.’

하고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줬을 테니까.

그 짧은 찰나의 따스함이 너무나도 그리워서.

목숨을 잃게 될 줄도 모르고 모닥불로 몸을 던지는 나방처럼, 데클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다.

설령 그 선택이 자신의 목을 죄어 천천히 중독시키는 저주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결코 그날 사샤에게 문을 열어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 * *

회상에서 깨어난 데클란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깊은 밤이었다.

인페르나 남작가의 마차가 떠나자, 구경거리를 위해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마을에는 싸늘한 적막만이 남아 있었다.

창문으로 걸어갔다.

사샤의 방이 있는 2층은 불이 꺼져있었다.

사샤는 잠든 모양이다.

다행이다.

‘다행?’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생각에, 데클란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은 분명히 사샤의 머리를 노렸다.

사냥에 대해 조예가 전혀 없었지만, 인간이 머리를 다치면 즉사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화살로 사샤의 머리를 쏴버리자.

그 애가 죽어버리면 좋겠다.

날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애가 죽어버렸으면 정말 좋겠다.

내 마음을 잔뜩 간질간질하게 만들어 놓고선 날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 아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짐한 데클란은 결연히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히 늘어난 시위를 잡아당기려던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사라지면, 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마을 아이들에게 옷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얻어맞아도.

마을 어른들에게 더러운 사생아 취급당하며 멸시당해도.

그 누구도 내게 상냥하게 웃어주지 않아도.

그 모든 걸 너무나도 당연히 여겼던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너무 늦었다.

그 아이는 이미 내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 추악한 세상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더럽고 천박한 진창에서 뒹굴던 내게도 빛이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본 별이 가장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그 모든 걸, 전부 다 너에게서 배웠다.

그런 너를 죽인다고, 내게 빛이 닿았다는 사실이 과연 사라지게 될까?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사샤.

나는, 아무래도 너를…….

그 순간.

손이 미끄러졌다.

데클란은 자신의 손을 떠나간 화살이 사샤의 등에 박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날뛰었다.

옆에서 케쉬키가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들려오지 않았다.

우습게도 데클란을 가장 먼저 장악한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다행이다.

내 활 솜씨가 정말 형편이 없어서 참 다행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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