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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23)화 (23/177)

23화

별 볼 일 없는 작은 시골 마을은 오래간만에 큰 소식으로 들썩거렸다.

“그거 들었어요? 옥수수 농사하는 그 부부, 드디어 딸이 생겼데요.”

“갑자기? 다 큰 애는 어디서 데리고 왔대?”

“듣자 하니 먼 친척이 아파서 찾아갔는데, 어린 애 하나 남기고 죽었다네요. 그래서 자기들이 키우겠다고 데리고 왔다지 뭐에요.”

“아이고, 그것참 잘됐네요. 물론 친척이 돌아가신 건 안 된 일이지만, 그 두 사람 원래부터 아이 가지고 싶어 했었잖아요.”

마을 사람들은 먼 친척의 딸을 입양했다는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시골 영지에 살다 보면 제때 의사를 만나거나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일이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친척의 손에 길러지곤 했다.

당장 마을에도 그렇게 자신의 친척을 부모처럼 여기며 사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순순히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뭔가 수상해.’

옆집 부부의 딸이라는 아이는 분명히 그날 새벽에 데클란이 본 아이였다.

그렇게 고운 모습의 아이를 어찌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그때 누군가가 데클란의 집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흑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안녕? 나 오늘부터 여기서 살기로 했어.”

여자아이는 옆집을 가리키며 데클란에게 인사했다.

데클란은 넋을 잃고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들판에 핀 한 송이의 들꽃과도 같았다.

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부드럽게 흔들리는 꽃 위에 내려앉는 푸른색 나비와도 같았다.

데클란은 꽃과 나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믿었다.

“난 사샤라고 해.”

“사샤…….”

뭔가 어감이 묘한 이름이었다. 진짜 이름이 아닌 애칭처럼 느껴졌다.

만일 동네에 ‘사샤’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가 있다면 다들 유치하고 이상한 이름이라며 놀렸을 테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사샤라고 하니, 그걸로 족했다.

“……공주님.”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데클란은 자신의 말실수에 얼굴을 붉혔다.

바보 같았다.

아무리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거지?

“넌 이름이 뭐야?”

여자아이가 붙임성 좋게 물었다.

“……데클란.”

단언컨대 데클란은 이름 석 자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처음 깨달았다.

사샤는 데클란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렇구나. 앞으로 잘 지내자!”

그 미소는 너무나도 찬란하고 포근했다.

행복했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행복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샤는 곧 동네 아이들의 마음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샤는 밝고 쾌활했고, 또 씩씩하며 상냥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괴롭히는 나쁜 아이들을 늘 따끔하게 혼내 주었다.

그 아이는 꼭 태양과도 같았다.

그 누구에게나 공평했고, 그 누구에게나 산뜻했다.

데클란도 사샤 덕분에 동네 아이들과 끼어 놀 수 있었다.

행복했다.

아이답게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

데클란이 사샤의 이름을 부르려고 할 때마다.

“사샤! 우리 계곡에 물놀이하러 가자!”

다른 아이들이 먼저 사샤를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사샤에게 친구가 늘어날수록, 데클란은 더더욱 그늘이 지는 기분이 들었다.

식초를 벌컥벌컥 마신 것처럼 속이 찌릿찌릿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사샤를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데클란은 흠칫 놀라곤 했다.

‘뺏기다니, 그 아인 물건이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데클란 스스로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사샤를 빼앗긴 데클란은 혼자 들판을 찾아갔다.

들판으로 간 이유는 간단했다.

그 아이에게 꽃을 주고 싶었다.

동화책에 보면 기사는 항상 공주에게 꽃을 바치곤 했다.

물론 자신은 기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꽃 정도는 구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데클란은 열심히 들판을 뒤졌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들꽃이 보이지 않았다.

데클란은 잔뜩 실망했다.

‘사슴들이 다 먹었나 보다.’

숲속에 사는 사슴들은 밤마다 내려와 들판의 풀을 뜯어 먹곤 했다.

녀석들은 특히 연한 꽃잎과 줄기를 먹는 걸 즐겼다.

그래서 들판에는 꽃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참 동안 들판을 뒤지던 데클란은 사슴들이 채 먹지 못했던 들꽃 한 송이를 찾았다.

‘찾았다!’

꽃을 구한 데클란은 급히 집으로 달려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해가 떨어지려는 시간이었다.

데클란은 내일 그 아이에게 이 꽃을 주고자 다짐했다.

그렇게 물병에 꽃을 꽂아둔 데클란은 다음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튿날.

데클란은 자신이 꺾어 온 들꽃을 들고 사샤를 찾아갔다.

그러나 사샤는 집에 없었다.

“사샤는 아이들이랑 먼저 놀러 갔단다.”

막 옥수수 수확을 끝낸 뒤 집에서 쉬고 있던 사샤의 부모님이 데클란에게 알려주었다.

사샤는 어디로 간 걸까.

꽃을 쥔 데클란은 사샤를 찾아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마을 아이들이 자주 놀러 가는 곳을 위주로 찾아다녔다.

그러나 사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마을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다들 자신만 쏙 빼놓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사샤를 찾다 지친 데클란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 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귀가하던 길에 데클란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고압적인 고함과 다투는 소음이 뒤섞여 있었다.

‘뭐지?’

데클란은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숲속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소리가 더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

“너희들 왜 자꾸 데클란 괴롭혀?”

사샤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이름을 들은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 뒤로 아이들의 항의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샤 너야말로 왜 자꾸 우리한테 이래?”

“그래, 데클란이랑 놀기 싫다고 했잖아!” 

“왜 자꾸 우리한테 그 애랑 놀자고 강요해? 짜증 나!”

데클란은 앞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동네 아이들이 사샤에게 비명을 지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스르륵.

꽃을 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힘없이 늘어졌다.

데클란은 인근에 있던 수풀 뒤로 몸을 숨겼다.

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데클란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앞으로 더 나아갔다간, 동네 아이들이 자신을 곱게 보내지 않을 것을.

심장이 쿵쾅쿵쾅 날뛰었다.

그간 사샤 때문에 동네 아이들은 반쯤 강제로 데클란을 자신의 무리에 끼워주었다.

동네 아이들과 같이 놀면서도 데클란은 무언가 불편하다고 느꼈었다.

그건 단순히 그의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자기들 그룹에서 데클란을 환영한 적이 없었다.

다만 사샤 때문에 억지로 끼워 준 것이었다.

“사샤, 너 데클란 좋아해? 왜 자꾸 걔랑 놀자고 해?”

누군가가 사샤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데클란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케쉬키.

사샤가 이 마을에 왔을 때부터 케쉬키는 늘 사샤에 대해서만 말했다.

누가 봐도 케쉬키는 사샤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데클란은 케쉬키가 자기는 커서 사샤와 결혼할 거라고 남자아이들에게 으스대는 걸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데클란은 기분이 나빠졌다.

망언도 그런 망언이 없다.

케쉬키처럼 못생긴 애가 감히 사샤와 결혼하겠다니.

사샤의 섬세한 망막이 케쉬키의 추한 외모 때문에 손상될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그런 케쉬키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케쉬키는 이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남자아이였으니까.

아이들은 계속해서 사샤를 향해 소리쳤다.

“그래, 아무래도 사샤가 데클란 좋아하는 것 같아!”

“말도 안 돼! 데클란 걔는 아빠도 없는 애잖아! 더러워!”

쿵.

데클란의 마음이 그대로 얼음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데클란의 귀청을 때렸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데클란 걔 엄마는 아마 어느 귀족 정부였을 거래!”

“정부? 그게 뭔데?”

“이 바보야, 정부도 몰라? 돈만 주면 아무 아저씨나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 말이야!”

거짓말.

거짓말이야!

데클란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저 아이들이 멋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두 손으로 두 귀를 틀어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데클란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어제 꺾어 온 들꽃이 들려있었다.

어렵게 찾은 꽃인데.

그 아이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는데.

“너 혹시 데클란 좋아해? 그런 근본도 모르는 사생아가 좋아?”

케쉬키가 사샤에게 신랄하게 밀어붙였다.

“케쉬키, 너 어떻게 그런 더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어?”

사샤가 분노 찬 목소리로 항의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아이들의 힐난이었다.

“더러운 말이라니? 사샤 네가 우리 마을에 온 지 얼만 안 돼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여기서 데클란이 더러운 잡종인 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

“맞아. 어른들이 다 그랬어. 그러니까 사샤 넌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수풀 아래 몸을 숨긴 데클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귀를 막고 싶다.

그런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손에 들린 들꽃을 놓을 수 없었다.

사샤에게 주고 싶었다.

이 꽃을 받고 기뻐하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대답하라고! 사샤, 너 데클란 좋아해?”

케쉬키가 재차 사샤를 추궁했다.

데클란은 어렴풋이 왜 케쉬키가 사샤에게 이 질문을 강요하는지 알 수 있었다.

케쉬키는 사샤가 데클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다.

케쉬키는 사샤를 좋아했다.

그건 사샤를 제외하고 모든 아이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케쉬키는 알고 있었다.

사샤가 데클란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케쉬키는 일부러 꼬투리를 잡고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거다.

기어코 사샤의 입에서 데클란이 싫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그렇지만.

사샤는 순순히 케쉬키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하면 또 어쩔 건데?”

당당히 반문하는 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떴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흉골을 새장 삼아 갇혀있는 심장이 제멋대로 무자맥질을 했다.

사샤가 날 좋아한다고?

많고 많은 동네 아이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나를.

사샤가…… 좋아한다고?

순간 입가가 간지러워졌다.

무언가가 묻은 것처럼 자꾸만 입꼬리가 간질간질했다.

데클란은 손등으로 급히 그것을 닦아보려 했다.

그러나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사샤 너 진짜 멍청하다.”

화가 잔뜩 난 케쉬키가 씨근덕거렸다.

“잘 들어. 너 앞으로 데클란이랑 놀면, 우린 너랑 안 놀 거야! 절대로!”

“그러든지.”

사샤는 그 협박에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어?

아이들은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사샤가 당연히 데클란과는 놀지 않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야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였다.

고작 친구 한 명보다 마을 전체의 아이들을 친구로 두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

“난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너희 같은 애들이 제일 싫어.”

사샤의 직설적인 말에 아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으드득.

케쉬키는 이를 갈았다.

이게 아닌데!

고작 데클란 그놈에게 사샤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데!

“그럼 앞으로 네가 데클란이랑 놀 때마다 내가 데클란 때릴 거야!”

케쉬키가 홧김에 그렇게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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