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데클란, 난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아!
—네가 제일 좋아!
—좋아!
온 마을에 내 우렁찬 목소리가 아주 쩌렁쩌렁 울렸다.
“…….”
마을 정중앙에 웅성웅성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얼어붙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머리가 이상한 애를 보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샤 쟤……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냐?”
“쉿! 진짜로 말해버리면 어떡해!”
무리에 뒤섞여 있던 내 또래 아이들이 속닥거리는 게 똑똑히 들려왔다.
나 역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친 건가…….’
나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해버린 걸까.
데클란을 좋아한다니.
그런 낯간지러운 말이 감히 내 입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었다.
‘쥐구멍…… 쥐구멍에 머리 박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인페르나 남작의 마차 앞에 서 있었고, 내 주변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몰려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도망갈 곳이 없다.
그래서 더 부끄럽다!
단언컨대 이건 내 입에서 나온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지금 내 심정이 어떠냐 하면, 당장 한 줌의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싶었다.
당황한 건 내 부모님도, 그리고 데클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본인인 데클란도 같은 반응이었다.
“…….”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데클란은 그 자리에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는 마치 마녀의 저주 주문이라도 들은 것처럼 인상이 굳어 있었다.
갈 곳 없던 내 시선이 스르르 데클란과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데클란이 눈을 치떴다.
그의 눈동자는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데클란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
자기를 괴롭히던 아이가 갑자기 약 먹은 것처럼 달라진 데다가 이제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하다니…….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데클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해…….”
데클란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에 안전 귀가했다.
음, 망했군.
사라진 데클란의 뒷모습을 쫓으며, 나는 그대로 정신을 로그아웃시켜버렸다.
그 뒤로 집에 어떻게 돌아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실성한 사람처럼 핫핫! 웃으며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무작정 다리를 움직였다는 것밖에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간 뒤 부모님이 내게 몸 상태는 어떤지 줄곧 물었다.
나는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괜찮아요! 아주 좋아요! 완벽해요!’라고 연신 외쳐댔다.
결국 나를 걱정한 부모님이 직접 침대에 나를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줬다.
이윽고 방에 혼자 남겨진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빗물이 새어 얼룩이 남아 있는 낡고 더러운 천장이었다.
저게 마치 내 미래 같아 보였다.
‘망했다…… 망했어……!’
그냥 차라리 다시 죽어버리고 인생 리셋할까?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며 진지하게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릴까, 고민했다.
한 번 빙의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할까?
그러나 나는 내가 귀족 영애도 아니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니며, 또한 회귀를 장담할 수 있는 특별한 아이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죽었다간 정말 다시 한번 허무하게 죽게 되는 거다.
‘괜찮아…… 난 이제 겨우 열 살이고, 아직 어리니까…… 어린 시절의 치기로 넘어가면 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 자신에게 더 관대해지자!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면서 이불을 팡팡 걷어찼다.
그러나 등 뒤에 상처가 또 아파져서 그 짓도 오래 하지 못했다.
결국 소심하게 손가락으로 이불을 툭툭 친 뒤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데클란은 어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물론 전부 털어놓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부 털어놓지 못했다.
만일 모든 진실을 말했다간 어머니가 자신에게 크게 실망할까 봐.
사샤가 자신에게 준 닭고기를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닭고기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닭고기를 자주 먹을 수 있는 사샤가 부러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숲으로 사냥하러 갔을 때 멧돼지에게 쫓겨 나무 위로 도망쳤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멧돼지와 홀로 싸우는 사샤를 보며 느꼈던 감정은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어머니가 자신을 더는 예전처럼 봐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
오로지 표면적인 사실만을 담은 담백한 이야기였다.
그 뒤 데클란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했다.
어머니는 데클란의 몸이 아플까 걱정했다.
그러나 데클란은 다친 곳이 없었다.
나무를 급히 올라타느라 살갗이 조금 까인 곳이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저보다는 오히려 사샤가…….”
사샤가 더 다쳤어요. 그 애가 더 걱정이에요.
그런 말을 하려던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중간에 뚝 끊어버렸다.
어머니는 그런 데클란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데클란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아.
또 시작이다.
또 이런다.
사샤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이상했다.
여태껏 데클란은 ‘사샤’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늘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
미움.
더 다채롭게 묘사하자면, 원망. 고뇌. 반항심. 그리고…… 애증.
데클란은 그 아이가 싫었다.
그 아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그런 아이와 같은 공간과 시간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 아이의 모든 것이 싫었다.
그 아이의 흑진주 같은 검은 머리카락도.
그 아이의 녹음 같은 녹색 눈동자가.
그 아이의 입가에 매달린 달콤한 미소가.
전부 다 싫었다.
* * *
물론 데클란은 사샤가 처음부터 마냥 싫었던 건 아니었다.
정확히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데클란은 사샤를 좋아했다.
사샤는 다른 동네 아이들과는 달랐다.
“너랑 놀기 싫어!”
“너 뭔데 여기 있어? 저리 가!”
동네 아이들은 항상 데클란을 거부했다.
그들은 아빠도 없는 아이와 놀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샤라는 아이가 나타났다.
사샤가 데클란의 옆집으로 이사 온 것은 데클란이 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모든 것이 깊이 잠들어 있던 조용한 새벽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창밖으로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클란의 두 눈이 절로 뜨였다.
어릴 적부터 마차라면 사족을 못 쓰던 데클란이었다.
마차 소리는 그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리였다.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슬쩍 열어젖혔다.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이었다.
텅 비어 있는 거리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이들은 데클란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옆집에 사는 아줌마랑 아저씨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옥수수를 키우는 부부로 잘 알려진 분들이었다.
데클란은 옆집에 사는 두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데클란의 어머니는 두 사람이 오래전부터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줄곧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옆집에 사는 부부는 늘 데클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
가끔 바쁘지 않을 때 데클란에게 마차도 태워주곤 했다.
‘이른 새벽부터 옥수수를 팔러 다녀오신 건가.’
데클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잠시 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옆집 아저씨가 수레 위에 덮어둔 모포를 걷어냈다.
수레 위에는 한 여자아이가 누워있었다.
‘어?’
데클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일 평범한 아이였더라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테다.
그러나 수레 위에 쓰러져 있는 여자아이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아이의 머리카락 위로 부러진 잔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얼굴을 비롯한 팔과 다리 위에는 온통 흙먼지였다.
아이는 입고 있는 드레스는 찢어지고 불에 탄 흔적이 가득했다.
마치.
‘마치…… 드래곤에게 잡혀간 공주님 같아.’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가 읽어주었던 동화책을 떠올렸다.
못된 드래곤에게 납치당한 공주님이 딱 저런 모습이었을까.
아름답고 섬세한 것이 꼭 인형처럼 보였다. 자칫 잘못했다간 깨질 것 같이 약해 보이기도 했다.
마차를 멈춰 세운 옆집 아줌마가 급히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담요를 가지고 온 아줌마는 그것으로 아이를 감쌌다.
아이를 품에 끌어안은 아저씨는 황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은 불과 몇 분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대체 뭐지?’
데클란은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어쩌면 자신이 잠결에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여자아이는 크게 다친 것 같았다. 게다가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옆집 아저씨가 그녀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는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 여자아이의 부상에도 눈이 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신경이 쓰였던 건 그 아이가 입고 있던 의상이었다.
‘엄청 비싸 보였는데.’
매년 가을에 인페르나 남작령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그때마다 조금 부유한 집의 여자아이들은 레이스와 구슬 장식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여자아이는 그때 데클란이 보았던 드레스보다 훨씬 더 예쁘고 귀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아이는 왜 다쳐있던 거지? 누구 집 아일까? 어디서 온 거야?’
온갖 물음표들이 데클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간 데클란은 말똥말똥 눈을 뜬 채 아침 해가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를 만나면 꼭 물어볼 터였다.
그러나 그날 뒤로 데클란은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 * *
“옆집 아저씨랑 아주머니 어디 갔어요?”
사흘째 되던 날, 데클란이 참지 못하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의 입에서 이런 답이 돌아왔다.
“멀리 있는 친척 집으로 갔다더구나.”
“친척…… 집에요?”
“그래. 안 그래도 나한테 집에 우편물이 오면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갔단다.”
이상했다.
아무리 어린 데클란이라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선가 크게 다친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갑자기 친척 집으로 떠나다니.
그것도 한창 농사일로 바쁠 이 시기에.
그러나 데클란은 자신의 의구심을 굳이 어머니에게 밝히지 않았다.
괜히 어머니에게 쓸데없는 고민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옆집 부부는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둘만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로 데클란의 또래 정도가 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들 부부와 똑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였다.
마차에서 내린 마을 부부는 수줍은 얼굴로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이제 저희 딸이 될 아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