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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21)화 (21/177)

21화

의사 딘 선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꼬마 아가씨가 걱정되는군요. 그 남자아이가 또 나쁜 짓을 하면 어떨런지…….”

“그래? 난 사샤보단 남자아이가 더 걱정되는데.”

“예?”

인페르나 남작의 말에 딘 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남자아이가 더 걱정된다고 말씀하시는 거지?

“자네 말대로 깊은 상처가 아니었던가. 사샤의 등 뒤에 평생 흉터가 남겠지. 그리고 남자아이는 평생 그 흉터를 보며 후회할 거야.”

“후회라니, 정확히 무슨 후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질문에 인페르나 남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그에게 어서 들어가 쉬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상 축객령이었다.

“남작님.”

딘 선생이 떠나고 난 뒤,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수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명령하신 대로 잡아 온 강도들의 소지품을 모두 압수해 검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물건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그래? 그게 뭔가?”

“그건…… 남작님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꼬리를 흐린 파수꾼은 인페르나 남작에게 두 손으로 무언가를 내보였다.

“이건……!”

매사에 침착하기로 소문난 인페르나 남작도 이번에는 놀란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파수꾼이 그녀에게 선보인 물건은 예상외의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파수꾼의 손에 들린 것은, 붉은 보석이 박힌 브로치였다.

“도대체 이건 어디서 난 거지?”

“출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강도들을 심문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어떤 아이에게서 뺏었다고 주장하더군요.”

“염병할 거짓말을.”

인페르나 남작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강도들은 머리가 상당히 나쁜 게 분명했다. 아니면 남작을 물로 보고 있거나.

어찌 거짓말을 해도 그런 신빙성 없는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한 것일까.

파수꾼도 남작의 말에 동의했다.

“저희도 남작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런 귀한 물건을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함부로 쥐여주겠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분명히 어느 귀족을 털었겠지.”

“왕국의 법률상 귀족의 물품에 손을 대면 손목이 잘리니, 그 형벌이 두려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목이 잘릴 놈들이 별걱정을 다 하고 지랄이야.”

남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사실이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강도들에게서 그동안 납치한 아이들의 행방을 캐묻고 난 뒤 그들을 참수형에 처할 생각이었다.

남작은 브로치를 잡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이 브로치가 진품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커다란 보석 옆에 세세히 박힌 작은 다이아몬드들 역시 모두 진짜였다.

이 영지에는 이렇게 비싼 물건을 소유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혀를 찬 인페르나 남작은 브로치를 뒤집어 보았다.

보통 이런 비싼 장신구 뒤에는 주인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기 나름이다.

빨리 이 브로치의 주인을 찾아주자는 생각에 남작은 브로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자 브로치의 뒷면 정중앙에 어떤 문양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가문의 문장인데…….’

남작은 인상을 쓰며 문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디서 본 문장이더라.

인페르나 남작은 변방에 살다 보니 다른 귀족들과는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가끔 왕국 수도에서 온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가 있을 때 잠깐 얼굴을 비추며 다른 귀족들을 만나는 게 다였다.

잊힐 법할 때 간혹 한 번 만나는 귀족들의 가문 문장을 인페르나 남작이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디서 본 듯한 기억이 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가문의 문장이란 게 아닐까.

인페르나 남작은 사람을 시켜 헤브니아 왕국의 모든 귀족의 정보가 정리된 도감을 가져오게 시켰다.

잠깐 도감을 뒤적거리던 남작은 이내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이쪽 가문 거였어?”

“어느 가문의 물건입니까?”

궁금해진 파수꾼이 남작의 손에 들린 도감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인페르나 남작은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레사 공작 가문.”

“예?”

“정말이지 장난도 이런 장난이 없군. 잘난 수도에 사는 이레사 공작 가문의 물건이 어쩌다 이곳에 내려온 거지?”

인페르나 남작은 붉은 보석 브로치를 올려 빛에 비춰보았다.

브로치 뒷면에 세공된 문양은 확실히 이레사 공작 가문의 것이었다.

물의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이레사 공작 가문.

그 가문의 문장은 뚜렷한 물방울과 별빛이 흩뿌려진 호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브로치의 출처를 알게 된 파수꾼도 할 말을 잃었다.

저 멀리 수도에 사는 이레사 공작 가문의 브로치가 왜 이곳 변방인 인페르나 영지에 있단 말인가?

아니, 거리는 둘째치고.

이레사 공작가라면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가였다.

대대로 친 왕족파였던 이레사 공작 가는 국왕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지금 제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 이레사 공작가라면 당연히 보안이 허술할 리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변방에서 아이나 납치하며 입에 풀칠하던 강도들에게 브로치를 도둑맞았다?

이해가 되지 않은 곳이 너무나도 많았다.

인페르나 남작은 거침없이 파수꾼에게 명령했다.

“그 강도 놈들, 다시 심문해. 아이에게 받았다는 둥 헛소리를 해댈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꺾어버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파수꾼은 군말 없이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그러하면 이레사 공작가로 사람을 보내어 브로치를 찾았다고 알릴까요?”

“아니.”

인페르나 남작이 태연히 대꾸했다.

“네? 어째서……”

“저번에 왕궁에서 있었던 신년 연회 기억나나?”

인페르나 남작의 말에 파수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온 왕국의 귀족들이 모두 초대된 연회였지요. 남작님께서도 도련님과 함께 갔던 걸로 기억납니다만, 그게 왜…….”

“거기서 이레사 공작을 만났어.”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인페르나 남작은 두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아직도 이레사 공작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 콧대 높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

“아, 친분이 있으신 분이시군요. 그런데 왜…….”

이런 남작의 속마음을 모르는 파수꾼은 마침 잘 됐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레사 공작 그 새끼가 내 아들 인사 씹었거든.”

“네?”

“그래서 딱히 그놈 좋은 일 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남긴 인페르나 남작은 유유히 브로치를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말문이 막힌 파수꾼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맞는 건가?

이레사 공작이 도련님의 인사를 무시했다고, 브로치를 돌려주지 않겠다?

그렇지만 인페르나 남작도 알고 있을 텐데. 귀족의 물건에 손을 대면 신분과 나이에 막론하고 손을 자른다는 것을.

“하지만 남작님, 이건…….”

“난 말 많은 사람이 싫다.”

“네.”

파수꾼은 입을 다물었다.

남작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녀를 섬겨온 파수꾼은 남작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잘 알고 있었다.

남작에게 꾸벅 인사를 올린 파수꾼은 다시 지하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강도들이 이레사 공작가의 물건을 입수한 경로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동네 아이에게 뺏었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파수꾼은 당장 사형에 처해질 강도들이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상당히 괘씸했다.

그는 물론이고 인페르나 남작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이에게서 브로치를 뺏었다는 강도들의 말은 거짓이 아닌 참이라는 것을.

* * *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다.

나와 데클란이 사는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세상에, 인페르나 남작님의 마차에요.”

“남작님이 어째서 이런 누추한 곳에……!”

마차의 문을 열기도 전에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나귀가 끄는 수레가 아닌, 제대로 뚜껑이 달리고 장식된 마차가 나타났다.

구경거리 하나 없는 마을에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문 여는 게 부담되는데?’

마을 사람들은 분명히 이 안에 인페르나 남작이 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문이 열리면서 내가 ‘짜잔! 사실 접니다!’하고 뛰쳐나오면 얼마나 실망할까.

“데클란,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 우리가 남작님인 줄 아나 봐.”

나는 데클란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그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

데클란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매달려 울던 데클란은 잠시 뒤 팔을 거둬드렸다.

입을 꾹 다문 그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눈물을 훔쳐냈다.

그러고선.

“미안해.”

다시 한번 내게 사과를 올리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마을로 돌아오는 마차 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도 데클란은 입을 뻥긋거리지도 않았다.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있는 꼴이었다.

그런 그에게 뭐라도 말하려던 그때.

“자, 도착했단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부가 나와 데클란을 내려주기 위해 마차의 문을 연 것이다.

“사샤야!”

“데클란!”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내 부모님과 데클란의 어머니가 달려들었다.

“어? 저거 옥수수밭 하는 딸내미랑 옷 수선하는 댁 아들이잖아?”

“왜 남작님의 마차에서…….”

오늘 오후에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소식을 채 전해 듣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케쉬키가 동네방네 이리저리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고, 우리 딸. 왜 이렇게 많이 다쳐서 우리 속을 썩여!”

“켁.”

부모님의 품에 갇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등에 난 상처가 아려왔다.

내 찌푸린 인상을 본 부모님은 그제야 내가 다친 환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를 놓아주었다.

“아 참, 우리 정신 좀 봐! 사샤 너 다친 곳은 안 아프니?”

“하나도 안 아파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 시선은 옆으로 향하고 있었다.

데클란은 자신의 어머니와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괜찮은 거니, 데클란? 대충 전해 들었다! 멧돼지를 만났다면서? 많이 놀랐지? 미안하다, 엄마가 널 지켜줬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데클란의 어머니는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녀를 데클란이 위로했다.

“아니에요, 엄마. 저 괜찮아요. 저보다는 사샤가…….”

데클란의 말이 뚝 끊겼다.

나와 두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샤가? 사샤가 왜?”

영문을 알 수 없는 데클란의 어머니가 그를 재촉했다. 그러자 데클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선을 아래로 돌린 데클란은 결국 그렇게 애매하게 말문을 맺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데클란은 제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궁금해하는 마을 사람들이 그와 그의 어머니에게 연달아 질문을 던졌지만, 데클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데클란은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다시는 내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스크램블 에그처럼 마구 휘저어진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어떤 예감이 들었다.

이제 데클란과 다시는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란 예감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떠올랐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평생 벽을 지고 사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안면이 트였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관계를 끝내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꾹 들어갔다.

“데클란!”

나는 온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데클란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외친 뒤에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왁자지껄 시장통처럼 떠들던 모든 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화제의 주인공인 내가 소리를 높이니, 자신들도 모르게 조용히 굳어버린 것이다.

모두의 이목이 쏠리자, 잔뜩 긴장한 몸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망했다.’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뭐라고 해야 하지?

깊게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모두들 암묵적으로 내게 어서 할 말을 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집 문 앞에 선 데클란도 마찬가지였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데클란, 난……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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