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딘 선생의 말을 들은 인페르나 남작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남작은 그의 말뜻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다.
사샤와 데클란은 모르고 있었지만, 인페르나 남작은 모든 것을 목격했다.
아이들이 어떻게 멧돼지에게 뒤쫓기에 되었는지, 그리고 사샤가 어떻게 화살을 맞게 되었는지.
인페르나 남작이 그 숲에 있던 건 순 우연이었다.
그녀는 최근 영지의 여러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강도들을 뒤쫓고 있었다.
아이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버린다는 그 극악무도한 강도들을 말이다.
영지를 다스리는 남작이 왜 직접 강도를 잡으려고 나섰는지 묻는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말을 짧게 줄이자면, 인페르나 남작은 결혼 전에는 본래 기사 집안으로 유명한 백작가 출신의 영애였다.
남편과 첫눈에 반한 그녀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그리고 그 해, 그녀는 남편이 본래 다스리던 이 변방의 영지로 내려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남편은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인페르나 남작 작위와 어린 아들 한 명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좋지 않은 그녀의 아들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인페르나 영지에서 잘 자라지 못했다.
이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아직 어린 제 아들을 친정인 백작가로 보냈다.
비록 몸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시시각각 자신의 어린 아들을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을 노예로 파는 강도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비열한 자식들.’
다른 범죄라면 파수꾼들을 내보내 처리하라고 했을 테지만, 이 강도들은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도시에 있는 자기 아들이 생각나서일까. 인페르나 남작은 자신이 직접 그 강도들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인페르나 남작은 강도들이 인적이 드문 숲에 숨어 아이들을 노린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마을 사이에 있는 숲들을 배회하며 강도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오늘이 잠복 수색에 나선 지 딱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찾았습니다.”
인페르나 남작이 동행한 파수꾼 한 명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인페르나 남작은 파수꾼들과 함께 바위 위에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었다.
파수꾼에게서 망원경을 건네받은 그녀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의 말이 맞았다.
저 멀리 보이는 녹음이 짙은 나무 아래에 꾀죄죄한 차림의 두 남자가 앉아있었다.
빼빼 마른 남자 하나와 뚱뚱한 대머리 남자.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초상화와 매우 흡사했다.
“어떻게 할까요? 저희가 포위망을 만들어 덮칠…… 엇? 남작님!”
파수꾼들이 그녀에게 포획 작전에 대해 의논할 틈도 없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냈다.
서슬이 푸른 검날이 나무 사이로 흘러나온 햇빛을 반사하는 것도 잠시.
남작은 순식간에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과연!’
숨을 죽이고 남작을 지켜보던 파수꾼들이 속으로 감탄했다.
인페르나 남작은 뛰어난 기사였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대로 왕실 기사를 배출한 백작 가문 출신이었던 인페르나 남작은 어릴 적부터 검술을 익혔으니까.
그렇지만 그녀가 뛰어난 기사라는 평가를 받는 건 단순히 검술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으아악!”
“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난데없는 남작의 등장에 강도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혼비백산이었다.
조금 전까지 바위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인페르나 남작은 공간의 법칙을 무시하기라도 한 듯 강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
초대 국왕의 피를 희미하게나 이어받은 귀족인 인페르나 남작은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저, 저리 가! 죽여버릴 거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강도들이 남작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가볍게 피한 남작은 그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악!”
찌릿한 고통을 느낀 강도들이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여자라고 물로 봤더니, 보통 실력이 아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강도들은 급히 줄행랑을 치기 위해 도주로를 찾았다.
“꿇어.”
허둥지둥하는 강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작이 명령했다.
“뭐, 뭐라고?”
“머리랑 영영 이별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꿇어.”
그렇게 말한 남작은 그들을 향해 턱짓했다.
그 순간, 강도들은 그제야 뜨겁고 비릿한 무언가가 자신들의 목에서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였다.
남작이 휘두른 검은 강도들의 목을 정확히 스치고 지나갔다.
딱 목이 베어지지 않을 정도로.
“…….”
강도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꼼짝 마! 움직이면 벤다!”
“반항하지 말고, 그대로 손을 등 뒤로 올려!”
뒤늦게 남작 뒤를 따라온 파수꾼들이 강도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인페르나 남작은 파수꾼들에게 강도들을 남작가 저택 지하에 있는 감옥에 가둬놓으라고 했다.
파수꾼들을 먼저 보낸 남작은 천천히 현장을 둘러보았다.
행여나 강도들이 숨겨놓은 물건들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도들이 납치한 아이들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증거물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강도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주변을 뒤지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남자아이의 고함이 들려왔다.
“사샤, 내가 도와줄게!”
그 뒤로 무언가 팅팅 발사되는 소음이 들려왔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뒤따랐다.
뭐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인페르나 남작은 신속히 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기묘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멧돼지였다.
수차례 공격을 당한 건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그런 멧돼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검은 단발머리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너덜너덜한 낡은 옷차림으로 미뤄보아 인근 마을에 사는 평민 아이가 분명했다.
남작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여자아이의 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총을 가지고 있잖아?’
총은 검술을 익히지 못한 평민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였다.
소지가 간단하고, 방아쇠만 잡아당기면 바로 발포되는 무기였기에 검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이 호신용 혹은 사냥용으로 가지고 다녔다.
수도에 가야 볼 수 있는 무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어느샌가 이곳 인페르나 영지에도 넘어오게 됐구나.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남작은 천천히 허리춤의 검집에서 검을 빼어들었다.
멧돼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동해 여자아이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여자아이 뒤에 있는 나무 위에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인페르나 남작의 시선이 절로 움직였다.
그리고 남작은 그제야 나무 위에 남자아이 두 명이 올라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명은 석궁을 들고 있는 뼈가 굵은 남자아이였다. 겁에 질린 나머지 당장 기절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몰골이었다.
이가 딱딱딱 울리고 있는 게 퍽 불쌍해 보였다.
갈색 머리를 가진 다른 아이는 손에 활과 화살을 쥐고 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활시위에 화살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이윽고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졌다.
친구를 도와주려는 건가.
그 모습을 본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힘도 기술도 없는 어린 녀석들이 그래도 우정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어?’
갈색 머리의 남자아이가 화살을 겨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작은 그만 인상을 찌푸렸다.
활을 당기는 힘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활시위를 당긴 남자아이의 손가락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시선이 빗나가 있었다.
남자아이는 멧돼지가 아닌, 여자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살의 촉은 그의 시선을 따라 마찬가지로 여자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인페르나 남작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당연히 남자아이가 화살로 멧돼지를 쏴 여자아이를 구하려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남작이 당혹감에 휩싸이던 순간, 그 일이 벌어졌다.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밑물의 물고기처럼 잽싸게 달아났다.
화살은 궁수가 머릿속에 그렸던 궤적을 그대로 따라 날아갔다.
“윽!”
멧돼지와 대치하고 있던 여자아이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 뒤로 이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대화는 남작의 관심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통통한 남자아이가 갈색 머리 남자아이를 나무라자, 여자아이는 한사코 괜찮다고 말했다.
‘전혀 괜찮지 않을 텐데.’
물론 인페르나 남작 자신이야 화살 하나에 맞아봤자 그다지 아프지 않을 테다.
하지만 지금 화살을 맞은 이는 여자아이였다. 이제 막 그림이 없는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듯한 나이의 어린 꼬마.
그러나 그 아이는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울며 고통을 호소할 법도 한데, 앓는 소리 한 번 터뜨리지 않았다.
도리어 손에 든 총의 방아쇠를 연신 잡아당길 뿐이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멧돼지를 향해 자신의 검을 내던졌다.
여자아이는 곧 기절했다.
예상한 결과였다. 멧돼지에 쫓기고, 등에서는 화살 때문에 피가 나고 있는데.
이 나이에 이 정도면 잘 버텼다—라고 생각하며, 남작은 여자아이를 안아 들었다.
마을에는 제대로 된 의원이 없을 테다.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까지 보내는 것보다 자신의 저택으로 데리고 가 치료해주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남작은 남자아이들에게 먼저 마을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자 덩치가 큰 남자아이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로 달려갔다.
그러나 갈색 머리의 남자아이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너도 따라올 테냐?”
충동적으로 물었다. 자신의 두 손으로 직접 상처 입힌 이 여자아이를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남자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
남자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휘감겨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간 인페르나 남작은 딘 선생에게 여자아이의 치료를 맡겼다.
“왜 쐈느냐.”
남자아이와 단둘이 남게 되자, 남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남자아이는 변명하지 않았다. 사실 멧돼지를 쏘려고 했는데 빗나간 것이라는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남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도대체 왜 네 친구를 쏜 거지?”
어찌 보면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다.
자기 또래 여자아이를 활로 쏘고도 태연한 꼴이라니.
그러나 인페르나 남작은 그 남자아이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정의감에 서린 분노도 없었다. 혹은 다른 인간에게 해를 가했다는 사실에 느껴지는 두려움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미웠었거든요.”
돌아오는 남자아이의 대답에는 처절한 회한이 서려 있었다.
남작이 조용히 이어 물었다.
“그래서, 이젠 밉지 않으냐?”
“…….”
이번에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