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9)화 (19/177)

19화

어?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데클란이 뭐라고 한 거지?

“만약에 내가 일부러 널 쏘려고 했던 거라면 어쩔 건데?”

“데클란, 난 네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네가 뭔데?”

내 말에 비웃음이 섞인 날카로운 반문이 되돌아왔다.

“사샤, 네가 뭔데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너랑 나랑 그렇게 친했었어?”

“데클란…….”

“만약 내가 일부러 널 죽일 생각으로 화살을 쏘았다고 하면, 그래도 이렇게 멍청하게 웃고 있을 생각이야?”

데클란이 냉담한 조소를 흘렸다.

“내가 멧돼지가 아니라 네 머리를 노리고 활시위를 당겼다고 하면? 그래도 나한테 울지 말라고 말할 생각이야? 이런 식으로 계속 착한 척하면서 나한테 접근할 생각이냐고!”

데클란의 음성은 이제 모래가 뒤섞인 듯 갈라지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데클란은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당장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이 순간 한 자락의 연기로 변해 사라지고 싶어 하는, 그런 자학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늑하게만 느껴졌던 마차 안은 휑뎅그렁한 황무지처럼 느껴졌다.

은은하게만 보였던 등불의 빛은 흉물스러운 괴물의 눈빛으로 보였다.

“…….”

데클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그런 신랄한 말들을 들으면서도, 나는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어리석었다.

데클란에게 무작정 잘 대해준다면 그가 날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너무나도 쉽게 생각했다.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고, 그의 즐거운 놀이 상대가 되어주고, 그를 위해 마음에 들만한 선물을 주면 되리라 생각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데.

그에게 내가 베푼 건 친절이었나?

그에게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은 즐거운 시간이었나?

그에게 내가 준 선물은 달가운 선물이었나?

내 편한 대로, 내 멋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너무나도 간단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어째서 난 깨닫지 못했던 걸까.

지금의 내가 아무리 데클란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과거의 사샤가 데클란에게 남긴 끔찍한 기억이 사라진다는 게 아닌데.

도대체 난 무엇을 바랬던 걸까.

어째서 나는 단 며칠 간의 친절로 모든 관계의 장벽이 사라질 거라고 착각했던 걸까.

사람 간의 관계를 너무 쉽게 본 잘못이다.

내가 투자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내가 이만큼이나 너에게 잘해줬으니, 너도 나를 이 정도는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클란에게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데.

“난 네가 정말 싫어.”

데클란의 싸늘한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너는 왜, 왜 매번 나더러 미안하다고 말하게 만들어? 난 너 같은 못돼먹은 애한테 미안해지고 싶지 않아! 네가, 네가 그동안 얼마나 날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데클란…….”

“차라리 전처럼 날 괴롭혀! 네 주먹으로 날 때려! 발로 날 걷어차고, 내가 쓰러지면 내 위에 올라타서 내 얼굴을 할퀴고 손으로 뺨을 갈겨! 그러다가 지겨워지면 네 목검으로 날 내리치라고!”

“…….”

“나 같은 놈이 옆집에 사는 게 너무 싫다고 말해! 내 아빠가 날 보기가 끔찍해서 도망친 거라고 놀려! 그것도 모자라면 전처럼 엄마가 남의 집 옷이나 기워주는 거지새끼 주제에 잘도 빌어먹고 산다고 비웃던가!”

이제는 데클란이 말을 하는 건지 울부짖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느새 산 고개를 넘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네가…… 정말 싫어…….”

희미한 빛만이 자리 잡은 마차 안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용하여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잠긴, 그렇기에 더더욱 인간답게 느껴지는, 그런 음영 있는 음성이었다.

“…….”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데클란이 느끼고 있을 감정을, 경험하고 있을 정서를.

단언컨대 나는 일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느끼고 있을 고독함, 쓰라림, 그리고 비참함을.

단 하나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마음에 공감할 수 없는 이런 내가 너무나도 싫어서, 그래서 한 치의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차마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데클란.”

“…….”

“만일 내가 죽으면…… 넌 행복해질까?”

줄곧 묻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원작 소설에서 훗날 장성한 데클란은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동네 불량배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그 대목을 활자로 읽을 때는 그저 ‘남주 사이다 통쾌하다!’라고 치부하며 쉽게 넘어갔었다.

하지만 데클란은 행복했을까?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복수를 완성한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만일 정말 그것으로 행복해졌더라면, 그는 어째서 자신의 고향과 어머니를 버려두고 왕성으로 향했던 것일까.

그는 어째서 마지막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레사 공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걸까.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고향이 그립지 않았을까.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했던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았을까.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준 왕국 부대의 명예를 갈망하지 않았을까.

그는 정말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걸까?

아니면.

그 외에 행복할 수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어서, 당장 자신 눈앞에 보이는 그 확고하고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걸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행복해질 리가 없잖아.”

유리 조각이 뒤섞인 듯한 데클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심장이 차가운 수면 아래로 철렁 내려앉았다.

“난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사샤.”

뚝, 뚝.

데클란의 손을 잡은 내 손등 위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네가 내게 준 상처를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내게 했던 일을 평생 후회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내게 빌어도 난 널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런 지독한 감정을 고하는 데클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살얼음 위를 걷는 사람처럼 위태롭고도 불안정했다.

그런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어째서 날 저주하는 것이냐며 비난할 수도 없었다.

내가 지금이라도 개과천선하겠다는데 왜 그런 독설을 퍼붓고 있는 거냐며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하물며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할 수도 없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사과해도,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도, 그건 도리어 데클란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를 미워하는 마음. 나를 향한 고마움.

그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서 혼란스러운 것이다.

“데클란.”

나는 차분히 데클란의 두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난……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내가 아니면 좋겠어.”

“…….”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고작 나라니, 그건 너무 슬프잖아.”

덜컹, 덜컹.

나와 데클란이 사는 마을이 가까워졌는지 마차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달빛이 스르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나도 내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

“행복은 상대적이란 거잖아. 네가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네가 아주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볼 때, 내가 아주 불쌍해 보였으면 좋겠어.”

“…….”

묵묵부답.

데클란에게서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런 그를 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줄곧 해주고 싶었던 말을 속삭였다.

“데클란, 난 네가 아주 아주 행복해지면 좋겠어.”

그 뒤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데클란의 두 팔이 나를 순식간에 휘어 감았다.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윈 체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 어깨 위로 숙인 그의 머리가 느껴졌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내 볼을 할퀴듯 간지럽히고 있었다.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은 공허한 그 몸뚱이가 내게 기대어 있었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공기에 뒤섞여 피어올랐다. 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흐느낌이 깊어질수록 그는 나를 더 꽉 껴안았다.

마치 자신의 음성을 감추려고 하는 것처럼.

“…….”

순간 숨이 턱 하니 막혀왔다.

그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고작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온통 난도질 된 마음을 끌어안고 살아왔다.

그는 목을 놓아 울지 않았다. 제 나이에 맞게 아이처럼 엉엉 울지도 않았다.

그는 아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자신을 위로할 수 없음을.

그나마 이렇게 어설픈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여자아이라니.

그런 그가 너무나도 가여워서,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고 말았다.

뚝.

말로 표출해내지 못한 지독한 감정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 * *

창가에 서 있던 인페르나 남작은 아이들이 탄 마차를 지켜보았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이 마차를 완전히 삼킨 것을 확인한 인페르나 남작은 다시 한번 침대 곁에 매달린 설렁줄을 울렸다.

“딘 선생을 불러오게.”

자신을 찾아온 하인에게 인페르나 남작이 짤막이 고했다.

잠시 뒤 의사 딘 선생이 다시 남작의 침실을 찾았다.

“남작님, 저를 다시 찾으셨……”

“어떻게 생각하나.”

인페르나 남작이 그의 말을 자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엇 말씀이십니까?”

“아까 그 사샤라는 이름의 여자애 말이야.”

손등으로 한쪽 턱을 괸 남작이 딘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봐. 등 뒤에 난 상처, 아무래도 쉽게 없어지지 않겠지?”

“아, 그 말씀이십니까…….”

인페르나 남작의 말을 들은 딘 선생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마 큰 흉터가 남겠지요.”

딘 선생은 이내 자신이 아는 진실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듣고도 남작은 평온한 기색을 유지했다.

“그래? 그런데 왜 깊은 상처가 아니라고 했지?”

“……그 꼬마 아가씨가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 봐 그랬습니다.”

“마음의 상처? 하긴, 그 아인 아마 평생 흉측한 흉터를 안고 가야 하겠지. 그게 그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봐 말을 안 한 건가?”

“아닙니다.”

딘 선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꼬마 아가씨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친구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애가 자기를 해할 생각으로 화살을 쏘았다는 말을.”

그 말을 하는 딘 선생의 얼굴 위로는 짙은 어두움이 내리깔려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