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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7)화 (17/177)

17화

두 눈을 뜨자 새하얀 침대 시트가 보였다.

음?

깨끗한 시트를 보자 나는 단번에 이곳이 내 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침대 위에는 새 눈처럼 하얀 시트가 아닌, 유치찬란한 색의 얇은 요만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워있었다.

“윽!”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순식간에 등 뒤로 날카로운 아픔이 닥쳐왔다.

“상처 벌어진다. 가만히 있으렴.”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낯선 음성에 흠칫 놀란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아까 내가 숲에서 본 남색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여자는 자신의 손에 들린 여러 양피지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이미 내 소개를 하지 않았던가?”

여자는 여전히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완강한 태도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얌전히 침대에 엎드린 채, 나는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나는 데클란에게 어떻게든 고기를 먹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와 케쉬키를 데리고 숲에 토끼를 사냥하러 갔었다.

그러다가 큰 멧돼지를 만나게 되었고, 졸지에 인간 vs. 멧돼지 다큐멘터리의 주연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그때 누군가가 혜성처럼 나타나 멧돼지의 머리에 검을 박아버렸다.

“아!”

여자의 정체를 기억해 낸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 남작님!”

“오냐.”

자리에 앉은 여자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짤막이 대꾸했다.

기억났다!

내가 사는 이곳의 이름은 인페르나 영지. 왕국의 가장 변방에 몰려있는 남작령이었다.

인페르나 영지는 거주민이 적은 촌 동네였다.

그 이유는 바로 땅이 비옥하지 못한 데다가, 기후 조건이 좋지 않아 사람이 살기 썩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번에 아빠와 함께 이웃 마을로 가려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

이웃 마을로 이동하는 길에 커다란 낭떠러지가 있었다.

그런 위험한 낭떠러지가 있는 것을 알고도 아빠는 마차를 끌고 이동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아니면 통행하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인페르나 영지는 그 정도로 발전하지 못한 시골이었다.

거주민이 적으니 거둬들여지는 세금도 적었다. 그러니 영지의 관리 상태는 더더욱 악화해 갔다.

듣자 하니 국왕조차 이 영지를 위해 지원금을 내어주기를 거부했다던데.

그 정도로 방치된 영지의 주인이 바로 이 여자라고?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지?”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읽어내리며, 인페르나 남작이 잔잔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이 방에 나와 남작 단둘이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 단둘이?

“데, 데클란은요?”

“데클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남자애 둘 중 어떤 애를 말하는 거지?”

“잘생긴 애요!”

그렇게 냅다 외쳐놓고 나는 아차, 하고 입을 막았다.

말실수했다.

너무 급한 나머지 그만 진솔한 마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

가만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남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데클란을 찾는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네가 말하는 데클란이란 그 아이는 옆방에 있단다.”

“괜찮은 가요? 다친 곳은 없는 거죠?”

“그건 너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지 그러니.”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내게 눈짓을 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 등 뒤로 큰 붕대가 감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원래 입고 있던 낡은 상의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등 뒤가 갈라지는 특이한 형식의 셔츠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붕대를 향해 손을 내밀자 따끔한 아픔이 밀려왔다.

“윽…….”

“하지 말라는 짓 좀 그만 하려무나. 상처가 벌어진다고 말하지 않았니.”

나를 흘낏 바라본 인페르나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향해 다가왔다.

갑자기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 모습에 조금 놀란 나는 움찔거렸다.

그런 작은 움직임을 알아차린 남작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만히 누워있거라.”

“아, 네에.”

나는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기댄 채 엎드려 누웠다. 상처 때문에 등을 댄 채 누울 수 없었다.

“왜, 내가 무서운 거니?”

침대 앞에 선 인페르나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닌데요.”

“그럼 왜 그렇게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지?”

“그냥 귀족 처음 봐서요.”

나는 솔직히 내 생각을 고했다.

사실이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방은 내 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화려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물론 휘황찬란한 고가품의 예술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진 그런 방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미한 꽃무늬가 그려진 벽지와 크리스털 조각으로 장식된 등불, 값비싼 융단으로 만들어진 카펫.

그 외에도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원목의 가구들 따위가 이 방 안을 메꾸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의 남작은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귀족이었다.

‘예전에는 남작은 그냥 별 볼 일 없는 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지금 인페르나 남작을 눈앞에 두니 그 편견이 싹 사라졌다.

내 대답을 들은 인페르나 남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마냥 헤프게 웃는 것이 아니라, 지고지순한 품위를 지키며 자신의 감정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말할 수 없는 고결함과 우아함에 나는 그만 기가 눌려버리고 말았다.

‘평민에 빙의해서 다행이다.’

저건 분명 귀족으로 난 자가 타고난 기질일 테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못 한다.

넋을 놓고 방을 구경하던 내가 인페르나 남작에게 물었다.

“여긴 어디예요?”

“참 빨리도 물어보는구나. 여긴 인페르나 남작가의 저택이다.”

역시나.

“저 얼마나 쓰러져 있었어요?”

“글쎄다. 한 세 시간?”

“데클란은 옆방에 있다고 하셨죠? 만나러 가도 될까요?”

“방금 일어난 주제에 질문도 많구나. 가기 전에 의사 한 번 만나고 가거라.”

인페르나 남작은 내가 누워있던 침대 옆에 매달린 설렁줄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잠시 뒤 한 하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남작님.”

“아이가 깨어났다. 딘 선생을 부르도록.”

명령을 받은 하인이 남작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다시 방 밖으로 퇴장했다.

“몸은 괜찮으냐?”

내 침대 앞에 선 인페르나 남작이 내게 물었다.

“네. 그리고……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작님.”

나는 인페르나 남작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했다.

물론 여전히 침대 위에 엎드려 누운 자세였기 때문에 똑바로 인사를 올릴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래. 고마운 걸 알면 됐다.”

인페르나 남작이 천천히 화답했다.

“네 이름이 뭐지?”

“사샤요.”

“사샤? 애칭 같은 이름이구나. 진짜 이름이니?”

“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아마 그럴걸요…….’ 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나도 내 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사샤’라니.

어째선지 어린아이들에게 지어주는 별명과도 같은 어감이었다.

“그렇구나. 사샤. 숲에서 뭘 하고 있던 건지 네 친구인 데클란이란 아이에게 전해 들었다. 토끼를 사냥하고 있었다지?”

인페르나 남작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를 잡으려면 굳이 숲 깊은 곳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단다. 앞으로 마을이 보일 정도로만 숲에 들어가거라.”

“네.”

남작의 말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숲에 깊이 들어가 데클란을 위험에 몰아넣은 건 내 잘못이었다.

‘데클란이 너무 깊게 들어온 거 아니냐고 물어볼 때 다시 돌아갈걸.’

지금 뒤늦게나마 그런 후회가 들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렇게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하던 그때였다.

“내가 그 숲에 간 건 우연이었다. 아이들을 납치해간다는 강도들을 잡으려고 숲을 순찰하고 있었거든. 만일 내가 그곳에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구나.”

“……강도들이요?”

남작의 말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반문했다.

불과 얼마 전에 강도 놈들을 만났던 터라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남작은 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이런, 내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넌 신경 쓸 필요 없단다.”

인페르나 남작은 괜히 어린아이에게 무서운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사실 며칠 전에 바로 그 강도들을 만났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남작님, 딘입니다.”

똑똑똑, 하고 방문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지요.”

남작의 허락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 뒤로 새하얀 의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이분은 인페르나 남작가 저택에 상주하는 의사인 딘 선생이라고 한단다. 네 상처를 보러 왔다.”

낯선 얼굴에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위해 인페르나 남작이 그를 소개해주었다.

“안녕하십니까, 꼬마 아가씨.”

나와 눈이 마주친 의사 딘 선생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람 좋은 아저씨처럼 보였다. 

“아가씨, 등에 왜 화살이 꽂혀있던 겁니까?”

“음, 그런 사정이 있어요…….”

“많이 아팠을 텐데, 잘 참아내셨군요.”

딘 선생이 나를 다독였다.

딘 선생은 어린 나에게도 존댓말을 썼다.

온화한 목소리만큼이나 푸근한 인상을 심어주는 남자였다.

그는 상처 부위 위의 솜을 걷어내고 소독약과 연고를 발라주었다.

차갑고 뜨거운 감각이 교차하며 피부 위로 내려 앉았다.

“……!”

아팠지만 일부러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옆방에 데클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내가 아파하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괜히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데클란이 쏜 화살이 하필 내 등에 박혀버린 건 유감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화가 난다거나 나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데클란은 분명 나를 도우려고 했었다.

무기 한 번 제대로 다뤄본 적 없는 주제에, 멧돼지에게 쫓기는 나를 돕겠다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활시위를 당겼을 것이다.

나를 구해주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 한쪽이 아련해졌다.

그에게 미움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어쩌면 그와 나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니, 며칠 지나면 회복될 겁니다.”

딘 선생이 내게 말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솜을 갈아주십시오. 부모님에게 부탁하도록 하세요.”

“넵.”

“무리한 활동은 하지 마시고, 되도록 쉬세요. 몸을 씻을 때는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시고요.”

“넹.”

“바르는 연고와 입으로 마시는 회복제도 같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치료는 이대로 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치료가 끝나자 나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잠깐.”

곁에서 치료를 지켜보던 인페르나 남작이 나를 가로막았다.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인 그녀는 내 셔츠 뒤의 버튼을 친히 잠가주었다.

“친구에게 상처를 보여줄 셈이냐?”

그녀는 가볍게 타박하며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다행히 걷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만 등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딘 선생, 나가는 김에 사샤를 친구에게 안내해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남작님.”

“고맙네. 집사에게 아이들 간식거리 좀 챙겨달라고 하고, 마차에 태워서 집에 보내주라고 전달해주게. 미드턴 마을에서 온 아이들이란다.”

그 말을 뒤로 인페르나 남작은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를 들어 책상 앞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내가 깨어나기 전까지 읽고 있던 서류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이곳이 인페르나 남작의 침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맙습니다, 남작님.”

딘 선생과 함께 방을 나서기 전, 나는 인페르나 남작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이 은혜 언젠가 꼭 갚을게요. 진짜예요.”

그 말을 들은 인페르나 남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귀족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서원하다니, 간도 참 크구나. 꼭 기억해두도록 하지.”

그런 말을 하는 인페르나 남작은 서류가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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