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러다 멧돼지가 내가 쓰러진 곳까지 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젠장!”
이판사판이었다. 가까스로 상반신을 일으킨 나는 BB탄총을 잡아들었다.
탕! 탕!
다행히 BB탄총에는 총알이 충분히 장전되어 있었다.
나는 총의 반동에 의해 어깨가 나가지 않도록 두 손으로 총을 쥐어 감싸고 멧돼지를 향해 발포했다.
“꾸엑!”
내가 쏜 총알이 멧돼지의 머리에 정중했다. 이마 한가운데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처치했나?”
나무에 매달린 케쉬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이마를 탁 때리고 싶어졌다.
‘이 새끼가 생존 플래그를……!’
참고로 적과의 사투 이후 ‘해치웠나’나 ‘처치했나’는 결코 입에 담아선 안 되는 대사였다. 그건 상대편의 HP를 채워주는 부활 마법이었다.
“크르륵…….”
멧돼지는 죽지 않았다.
잠시 발걸음을 주춤할 뿐, 쓰러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는 이를 꽉 악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BB탄총은 애초에 소형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만든 무기였다.
“안 죽어?”
혀를 찬 나는 남은 총알을 꺼내 탄창에 장전했다. 어릴 때 많이 해봐서 능숙한 솜씨였다.
“그럼 뒈질 때까지 해주지.”
나는 방아쇠를 연신 잡아당겼다.
탕! 탕! 탕!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내 총알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럴수록 멧돼지는 괴성을 내지르며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래도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고 있어!’
제아무리 콩알처럼 작은 총알이라도, 일단 금속으로 만들어진 총알이었다.
그런 물건이 살에 박히는 꼴이니, 사나운 멧돼지라고 해도 오래 견디지 못할 테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은근슬쩍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조금 더 접근해 제대로 머리를 노릴 계획이었다.
그때였다.
“사샤, 내가 도와줄게!”
하늘에서 돌연 데클란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응? 뭐라고?
한창 멧돼지와 대치하고 있던 나는 미처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등 뒤로 무언가가 팍 내리쳤다.
“윽!”
뇌리를 찌르는 고통에 입에서 기함이 절로 흘러나왔다.
‘뭐, 뭐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등 뒤에 박힌 기분이었다. 등 뒤로 뜨거운 피가 주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무 위에 매달려 있던 케쉬키가 숨을 헉, 하고 거꾸로 삼켰다.
“데클란! 사샤한테 화살을 쏘면 어쩌자는 거야! 너 미쳤어?”
화살? 화살이라고?
그 말을 듣자 나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제야 내 등 뒤에 박힌 이 날카로운 감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데클란……!’
추측건대 데클란이 멧돼지를 향해 화살을 쏘려다 실수로 나를 맞춘 모양이다.
마음은 고마운데, 결과물이 전혀 고맙지 않았다.
뒤쪽에서 황망해 하는 케쉬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샤! 괜찮아? 데클란 이 멍청이가!”
“나,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데클란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밝게 외쳤다.
“응, 알아. 어렸을 때 실수도 할 수 있지, 뭐!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탕, 탕, 탕!
총알이 연쇄 발포되는 소음 너머로 내가 크게 외쳤다.
억지로 괜찮은 적 목소리를 쥐어 짜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파! 아프다고!’
당장 손을 뻗어 내 등에 박힌 화살을 빼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총알 한 발이라도 놓치면 멧돼지가 당장 날 향해 돌진할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데클란을 지켜야 해!’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죽을 정도로 아프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참을 수 있는 고통은 아니었다.
고작 멧돼지 따위에 남주가 죽는 처참한 상황이 발생하도록 둘 수 없다. 그건 로판 역사상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겼다.
탕!
금속 탄알이 날아가는 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 울렸다. 탄격의 진동이 근육을 마비시켰다.
그러나 나는 총구가 쉴 틈이 없이 방아쇠를 한 번 그리고 두 번 잡아당겼다.
그렇게 얼마나 방아쇠를 당겼을까.
“크륵, 크르륵…….”
만신창이 된 멧돼지는 더는 미친 듯이 날뛰지 않았다.
부상으로 진이 빠진 녀석은 비틀거리며 이리저리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기회였다.
‘좋았어, 이제 정확히 머리를 노리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멧돼지의 머리를 겨냥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후.’
숨을 얕게 내쉰 나는 두 손으로 총을 쥐었다.
계속된 사격으로 팔 근육이 떨려왔다.
게다가 조금 전 데클란이 실수로 내 등에 화살을 쏘는 바람에 등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멧돼지를 향해 제대로 사격할 수 있을지 장담조차 할 수 없었다.
‘집중하자. 나 예전에 BB탄총으로 사과도 명중하고 그랬잖아.’
스스로 최면을 걸듯 다독인 나는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온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그래, 내 별명이 한때 봉천동 빌헬름 텔이었어!’
그리고 마침내 방아쇠를 당기자.
—털컥.
김빠진 소리가 났다.
총알이 나가는 묵직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
당황한 나는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틱틱 소리만 날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젠장.”
총알이 떨어졌다.
‘젠장, 젠장! 딱 한 발만 쏘면 되는데……!’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여분의 총알을 찾기 위해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사샤, 조심해!”
순간 나무 위에서 절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흠칫 놀란 내가 고개를 들자,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향해 덮쳐오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에 기운을 되찾은 멧돼지가 나를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아.’
인간은 본래 극한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했다.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었다.
내 방향으로 달려드는 멧돼지를 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무능하게도, 그 자리에 얼어 붙어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일 수 없었다. 목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내 주머니 안에 단도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압도적인 공포감이 나를 지배했다.
—난 이제 죽는 걸까.
포악한 짐승의 날카로운 앞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 흉악한 입에 물리면 내 여린 육신은 한순간에 망가져 버리겠지.
—죽고 싶지 않아.
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내 작은 머리는 오로지 저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다시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던 것,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주머니 안에 넣어둔 단도를 꺼내 휘둘렀다.
푹!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를 향해 달려오던 멧돼지의 이마에 무언가가 박혔다.
“꽥!”
머리를 관통당한 멧돼지가 단말마를 내지르며 휘청거렸다.
녀석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러나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쿵!
생명력을 잃은 멧돼지는 그대로 땅 위로 머리를 처박았다.
쓰러진 멧돼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즉사였다.
‘뭐, 뭐지?’
나는 내 눈앞에서 펼쳐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급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을 가다듬으며, 나는 쓰러진 멧돼지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놈의 이마에는 굵직한 검이 박혀 있었다. 목에는 내가 찌른 단도가 꽂혀있었다.
순간 혼란이 찾아왔다.
데클란이 가지고 있던 무기는 활과 화살이었다. 그리고 케쉬키는 석궁.
우리 중 이런 검을 가진 사람은 없었는데…….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는 검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벅, 저벅.
차가운 숲을 거니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서 어렴풋한 인영이 눈에 밟혔다.
헌칠한 키. 암팡진 체구. 그리고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긴 머리카락.
“고작 총으로 멧돼지를 잡으려고 하다니.”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너머로 청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머리가 나쁜 건지, 아니면 용맹한 건지.”
온 숲은 갑자기 물 아래 잠긴 것처럼 조용해졌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데클란도, 그 옆에 매달려 있던 케쉬키도, 그 누구도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숲의 모든 것들이 오로지 여자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맹랑한 건 인정해주도록 하마. 하지만 다음부터 이런 무모한 짓은 그만두도록 해.”
흙을 밟으며 이어지던 발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높게 묶고 있는 그녀는 고고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일까.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만났던 강도처럼 위험한 사람은 아닐까.
혹시나 숲속에서 난 소리를 듣고 우리를 잡으러 온 사람은 아닐까.
행여나 데클란에게 위해가 가는 행동을 하면 어쩌지.
데클란.
데클란이 다치면 안 되는데…….
그 순간까지도 내가 아닌 데클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어차피 데클란은 이런 날 걱정하고 있지도 않을 텐데.
박힌 화살 때문에 등이 욱신욱신 아팠다. 지금도 유리 조각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고통이 따라오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이를 꽉 악문 내가 남은 힘을 쥐어 짜내며 여자에게 물었다.
“나?”
나를 내려다보던 여자가 피식 웃었다.
“네가 밟고 있는 이 땅의 주인이다.”
“……건물주세요?”
“아니.”
여자는 뭔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냐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사는 이 영지의 주인, 인페르나 남작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