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설마 첫 방에 잡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어릴 적 BB탄총을 하도 많이 가지고 놀아서 어느 정도 사격 실력이 있다고 했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내가 죽기 전의 일이다.
게다가 플라스틱이 아닌 이 금속 BB탄총(=아르테미스의 시련)의 위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지금 이렇게 한 발 쏘고 나니 어깨가 살짝 뻐근해진 기분이었다.
전혀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계속 쏘다 보면 어린 10세 소녀의 근육에 무리가 갈 것 같았다.
“어때요, 사샤 누님.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사냥할까요?”
능숙한 솜씨로 잡은 사냥감을 미리 준비해 둔 가방에 넣은 케쉬키가 내게 손짓했다.
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데클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 먹을 수 있지?”
“어?”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데클란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
금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토끼 한 마리만 먹어서 되겠어? 적어도 두 마리는 먹어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음? 몰랐어? 저 토끼로 너 몸보신해주려고 하는 거야.”
“나, 나한테 주려고 하는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는지 데클란이 말을 더듬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너 고기 안 먹은 지 꽤 됐다면서. 그러니까 지금 잡은 이 토끼, 집에 가져가서 요리해 먹어. 알겠지?”
“사샤…….”
데클란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굳어선 채로 가만히 나를 주시했다.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에는 여러 갈래의 감정이 휘말려 있었다.
데클란은 지금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뒤섞인 감정은 쉽게 읽어 내릴 수 없었다.
“아무래도 한 마리 더 잡아야겠다.”
좀처럼 데클란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나는 그에게서 휙 몸을 돌렸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자 왠지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나와 데클란, 그리고 케쉬키는 다른 사냥터를 찾아 향했다.
아까 사냥한 자리에 피가 조금 남아 있어 다른 토끼들이 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데클란과 케쉬키를 데리고 점점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기, 사샤. 우리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거 아니야?”
“아니야.”
데클란의 질문에 내가 가볍게 대꾸했다.
사실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내뱉은 대답이었다.
입 밖으로 말이 튀어 나간 뒤에야 나는 데클란의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생각해 보니까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사는 마을 인근 숲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습기가 강해졌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 근처의 바위 위로 이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자라나고 있었다.
확실히 깊게 들어온 게 맞았다.
‘이쯤에서 한 마리만 더 잡고 마을로 복귀하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데클란의 손을 냉큼 잡았다.
“데클란.”
“왜.”
이제 데클란은 내 손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그간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데클란을 데리고 다닐 때 이렇게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도 아마 익숙해져 있을 테다.
“숲에 너무 깊게 들어왔다고 걱정하지 마. 토끼 딱 한 마리 더 사냥하고 돌아갈 거니까.”
“그렇지만…….”
데클란은 불안하다는 듯이 주위를 살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숲 깊게 들어오면 마물들이 나오는데…….”
“알았어. 어서 끝내고 나가자.”
나는 데클란을 달래기 위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시절의 작고 소중한 데클란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역시 남주의 매력이란…….’
근심에 잠긴 얼굴의 데클란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뒤에서 케쉬키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사샤, 여기 숨기 좋은 수풀이 있어!”
“알았어, 갈게!”
나는 다시 한번 데클란의 손을 꼭 잡았다.
“걱정하지 마, 데클란. 내가 널 지켜줄게.”
“……알았어.”
데클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뭉글하게 깔았다.
어째선지 귀가 붉어진 그는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했다.
케쉬키가 안내한 수풀 뒤로 숨은 나는 예전에 했던 것처럼 가만히 몸을 숙였다.
내 손에는 여전히 BB탄총이 들려있었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사냥감을 신속히 겨냥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이상하게도 토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았다.
기묘할 노릇이었다.
지금 이 계절의 숲에 버글버글 넘치는 게 토끼인데, 왜 코빼기 하나 안 보인단 말인가.
“엇.”
케쉬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샤, 나 지금 등 뒤가 조금 축축해. 한번 봐줄래?”
“뭐? 너 설마 지렸냐?”
“아, 아니야! 바지가 아니라 등 뒤라고, 등!”
“등?”
케쉬키의 말에 나는 그의 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천으로 만든 작은 가방이 있었다.
아까 잡은 토끼에서 나온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기겁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피가 다 새고 있었잖아!”
이러니까 토끼들이 안 오지! 후각 좋은 토끼들이 죽음의 냄새를 맡고 다 토꼈겠지!
“아…… 내가 사냥 전용 가방이 아니라 일반 가방을 가져왔나 봐.”
급히 가방을 풀어 내린 케쉬키가 혀를 찼다. 그도 꽤나 당황한 안색이었다.
마냥 케쉬키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접고, 그냥 집에 가자.”
곧 해가 지고 어두워질 시간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간 마을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내 말에 데클란와 케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나 역시 주변에 둔 총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잠깐만.’
만일 케쉬키의 가방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릴 정도였더라면…… 혹시 주변에 다른 맹수들이 이 냄새를 맡지 않았을까?
그때 나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선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이건 명백한 사망 플래그였기 때문이다.
크르릉.
갑자기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모래를 갈아먹은 듯한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
순간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나는 본능적으로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눈을 돌렸다.
떠날 준비를 하던 데클란과 케쉬키 역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목격했다.
저 멀리서 흉악한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멧돼지 한 마리를.
자, 한번 생각해보자.
살상력이 거의 없는 무기를 지닌 10살짜리 아이들과 야생 멧돼지가 조우했다.
여기서 아이들이 취해야 할 선택지는?
1) 도망친다.
2) 36계 줄행랑.
3) 걸음아 나 살려라.
정답은 닥치고.
“튀어!”
아주 잣됐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무작정 얼어붙은 데클란을 붙잡았다.
콰콰쾅—!
뒤에서 흥분한 멧돼지가 질주하는 게 들렸다. 녀석이 밟은 나무가 우지끈 박살 났다.
귓가가 웅웅 울렸다.
뒤를 돌아볼 틈은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내 뒤에 무언가 미친 듯이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으아아악! 사람 살려!”
옆에서 같이 도망치는 케쉬키가 비명을 내질렀다.
‘시X! 아 진짜, X발!’
나는 이를 악물고 데클란의 손을 꽉 잡았다.
‘갑자기 장르가 이렇게 변하는 건 반칙이야!’
조금 전까지 빙의물을 찍고 있었는데, 지금 당장 서바이벌물이 되어버렸다.
이러다가 원작이 시작되기도 전에 강제 로그아웃 당할 위기였다.
그때였다.
“사샤, 나무 위로!”
“뭐?”
데클란의 외침에 나는 당혹했다. 그러나 곧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어차피 열 살짜리 꼬맹이들이 멧돼지의 추격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나무를 타고 올라가 멧돼지가 가버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효율적일 테다.
“너 먼저 올라가!”
가장 튼실하고 높아 보이는 나무를 발견하자마자 내가 데클란에게 외쳤다.
“사샤 넌?”
“시간 없어, 빨리!”
“사샤!”
“어서 올라가라고! 너 간 다음에 내가 갈게!”
나는 데클란의 어깨를 잡아 그가 나무를 향하도록 억지로 방향을 돌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데클란은 급히 나무 위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데클란이 나무를 반쯤 올라간 찰나.
“사, 사샤! 너 뒤에!”
어디선가 케쉬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뒤로 고개를 홱 돌리자.
“크르릉…….”
잔뜩 성난 멧돼지가 시야에 포착됐다.
내게서 불과 5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아.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순간 사지가 마비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오감이 전부 고장 난 듯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들린 BB탄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사샤!”
뒤에서 데클란의 급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한참 위에서 들려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무 끝까지 올라간 것 같다.
그 순간 멧돼지를 마주하면서도 내가 느낀 감정은.
‘다행이다.’
데클란은 무사하다는 생각.
내가 데클란을 먼저 나무 위로 올려서 다행이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데클란을 지킬 수 있어서 드는 안도감.
그 외에는 없었다.
자리에 가만히 선 멧돼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예상외로 녀석은 내게 바로 덤벼들지 않았다.
‘뭐 하는 거지?’
뒤늦게 닥쳐온 긴장감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멧돼지는 코를 킁킁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맞아! 멧돼지는 냄새는 잘 맡는데, 눈이 안 좋다고 했는데!’
예전에 봤던 자연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게다가 멧돼지는 몸 구조 때문에 하늘을 못 올려다본다고 했다.
그래서 바위 위로 숨으면 날 찾지 못할 테다.
그렇다면.
‘지금 저놈은 아마 케쉬키의 가방에 담긴 토끼 피 냄새를 맡고 따라온 걸 거야.’
멧돼지는 본래 사람을 먼저 공격하는 난폭한 동물이 아니다.
아마 피 냄새를 맡고 어디서 죽은 동물이 있으니 주워 먹자, 싶어서 찾아왔을 테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멧돼지는 정말 나를 보지 못한 것처럼 다른 쪽으로 자꾸 고개를 돌렸다.
‘잘하면 도망칠 수 있겠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에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마침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높은 바위가 하나 보였다.
‘저기 위로 올라가 숨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내가 곧바로 바위를 향해 질주하려던 순간.
“사샤! 내가 도와줄게!”
“뭐?”
“고개 숙여!”
다른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있던 케쉬키가 고성을 내지르며 석궁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틱! 티틱!
석궁에서 튀어나온 화살들이 멧돼지 주변 위로 떨어졌다.
“꿱!”
무작위로 발사된 화살 때문에 화들짝 놀란 멧돼지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케쉬키 트롤 개새놈아! 도와주지 마!”
케쉬키의 석궁에 맞을까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내가 절규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꾸에엑!”
석궁에 두어 발 맞은 멧돼지는 흥분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녀석은 나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