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
갑자기 통곡하기 시작한 아이들을 보며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단체로 쥐약이라도 했나? 다들 왜 이래?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른 나는 한숨을 내쉬며 부탁했다.
“다들 그만 짜고, 의자 하나만 줘 봐.”
눈치 빠른 녀석들이 냉큼 내게 의자를 내어주었다.
나는 한쪽 발목을 다른 다리의 무릎 위에 올리며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빙의 전 골반이 좋지 않았던 내가 가지고 있는 습관 중 하나였다.
나는 내 뒤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데클란을 흘끔 바라보았다.
“데클란은 의자 안 내주니?”
덜컹, 소리와 함께 내 옆에 새로운 의자가 마련되었다.
잠시 주춤하던 데클란은 내 손짓에 이내 의자에 앉았다. 무릎을 딱 붙이고 두 손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자세였다.
아유, 공손하고 예의 바른 게 참 귀엽고 깜찍하기도 하지.
절로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내 미소와 마주 앉은 데클란은 더 빳빳하게 허리를 폈다.
“내가 너희들이 데클란에게 다시는 피해 안 주려고 하는 거 다 알아.”
회관 안에 모인 아이들을 쭉 둘러본 내가 말했다.
“예, 예에. 언니.”
“옳습니다, 누님.”
어째선지 아이들은 내 앞에 전부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쭈굴쭈굴한 상태였다.
게다가 왜 자꾸 나한테 존댓말을 하는 건지.
이들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더 많은 언니 오빠들도 있는데.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에이, 그게 뭐야. 말 놔. 듣는 내가 기분 안 좋아.”
“다, 당연히 놔야지. 사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그리고 좀 웃어. 분위기 이상하잖아.”
내 가벼운 충고에 아하하, 아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가 회관 안에 울렸다.
웃고 있는 게 전혀 웃는 게 아니어서 기괴하게 느껴졌다.
“…….”
심기가 괜히 불편해졌다. 도대체 얘네들은 왜 이러는 거지.
나는 흠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다름이 아니고, 오늘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찾아온 이유는 토끼 사냥을 하러 가기 위해서야.”
“토, 토끼 사냥?”
“그래. 요즘 토끼들이 번식기거든? 그래서 숲에 아주 활발하게 돌아다녀. 실력 없는 우리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을 거야.”
내 설명에 동네 아이들은 그제야 내가 찾아온 이유를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케쉬키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케쉬키, 아까 말한 대로 너희 집에 가서 쓸 만한 사냥 도구 좀 가져와 줄래?”
“아…… 알았어!”
케쉬키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회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등에 무언가를 잔뜩 짊어진 채로 돌아왔다.
케쉬키는 내 앞에 자신이 가지고 온 도구를 하나하나 내려두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거는 토끼 잡을 때 쓰는 트랩이야. 한 번 설치하고 다음 날에 돌아오면 토끼가 대부분 잡혀 있어.”
“흠.”
한 번 설치하고 방치하면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빨리 데클란에게 고기를 먹이고 싶었다.
“다른 건 없어?”
“당연히 있지.”
내 말에 케쉬키는 능숙하게 다른 물건을 가방에서 꺼냈다.
이런 점을 보면 사냥 물품을 파는 자신의 아버지와 쏙 닮아 있었다.
“이건 미니 석궁. 토끼처럼 소형 동물 잡을 때 딱 걸맞은 크기야.”
“음.”
케쉬키가 내민 석궁은 좋아 보이긴 했다. 상당히 로판스럽고 멋졌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석궁을 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옥수수 농장하는 농부 딸이 석궁 다루는 걸 배울 틈이 어디 있겠는가.
그 뒤로 케쉬키가 여러 물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대부분 내가 다룰 줄 모르거나 사용법이 번거롭고 설치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이었다.
나는 마침내 참고 있던 답답한 한숨을 터뜨렸다.
“케쉬키, 네가 날 도우려는 건 알겠는데, 미안하지만 물건이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어. 이게 최선이야?”
“…….”
내 최종 통보와도 같은 말에 케쉬키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장한 표정을 지은 그는 천천히 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건 우리 아빠가 저번에 도시에 갔을 때 새로 사 오신 물건인데, 성능이 가장 좋아. 내가 아빠 가게에서 본 사냥 도구 중 가장 좋은 거였어. 그런데…….”
“그런데?”
“……나도 사용법을 몰라.”
마른침을 꿀꺽 삼킨 케쉬키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앞에 탁 내려놓았다.
‘헉.’
그가 내민 물건을 본 나는 단번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이거 BB탄총이잖아?’
그랬다.
내 발아래 놓인 사냥 도구는 다름 아닌 빙의 전 내가 어린 시절 자주 가지고 놀던 그 BB탄총이었다.
대한민국의 코리언 친구들과 함께 공터에서 나무나 돌멩이를 향해 쏘며 가지고 놀던 기억이 났다.
그런 BB탄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거 로판 장르가 아니라 스팀펑크였나?’
장르 혼동이 오는 것도 잠시.
‘아니지, 로판이니까 원작자가 뭐든 넣을 수 있지.’
로판이란 장르의 무한한 가능성을 납득한 나는 태연히 BB탄총을 집어 들었다.
“이건 [아르테미스의 시련]이라는 무기야.”
내가 총에 관심을 보인 걸 눈치챈 케쉬키가 덧붙였다.
“아르…… 뭐?”
“[아르테미스의 시련].”
아르테미스가 여기서 왜 나와. 아르테미스는 활 쏘는 여신 아니었나?
이건 그냥 흔한 BB탄총인데.
‘이름도 로판스럽네.’
나는 BB탄총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플라스틱이 아닌 금속류로 만들어진 건지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이게 총알이래.”
케쉬키가 가죽 주머니에 담긴 총알들을 내게 꺼내 보였다.
내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플라스틱 총알과 달리, 그가 내민 총알은 니켈로 처리된 금속 총알이었다.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걸 본 적이 있는데…….’
미국에서 사람들이 금속 BB총알을 가지고 소동물들을 사냥하러 간다는 걸 본 기억이 났다. 특히 살찐 청설모를 잡아다가 고기를 구워 먹는다던데…….
케쉬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마지막 물건이야. 이 [아르테미스의 시련]이란 물건이 가장 좋긴 한데, 우리 중 아무도 사용법을 모르니, 역시 활과 화살을……”
“나 이거 쓸 줄 알아.”
철컥.
BB탄총의 탄창을 꺼낸 나는 능숙하게 총알을 장착했다.
순간 케쉬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어, 어떻게……!”
“내가 왕년에 별명이 [봉천동 마탄의 사수]였어.”
“뭐라고?”
“그런 게 있어. 어쨌든, 같이 사냥 갈 사람 있으면 하나씩 장비 잡아봐. 지금 당장 출발할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내가 당당히 선포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데클란, 네가 장차 이레사 공녀를 사랑하기 위해선 일단 기본 근력이 필요해!’
남주의 체력은 곧 독자들의 구매력! 남주의 침대 시트 회전율은 즉 독자들의 유료 전환율!
그러니 오늘 내 기필코 데클란이 배 터지도록 고기를 먹일 것이다!
* * *
무기를 챙긴 우리는 숲으로 향했다.
“우리가 과연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저벅저벅, 수풀을 휘저으며 걸어가던 내 옆에서 데클란의 기력 없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당연하지, 데클란. 왜 이렇게 비관적이야?”
탄창 안에 든 총알 개수를 세고 있던 내가 씩씩하게 대꾸했다.
데클란은 자신감 없이 활과 화살을 붙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린 전부 다 어린 애들이잖아. 우리 셋이서 뭘 할 수 있겠어?”
“걱정하지 마, 데클란. 분명히 잡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예전에 아버지와 자주 사냥 연습을 나왔었거든.”
같이 따라온 케쉬키가 의기양양하게 고했다.
케쉬키가 선택한 무기는 석궁이었다.
사냥 무기상 아버지를 둔 그는 우리 중 유일하게 석궁을 다룰 수 있는 아이였다.
나는 그런 케쉬키를 흘끔 바라보았다.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자고로 다다익선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도움의 일손이 하나라도 귀한 상황이다.
케쉬키 외에 다른 마을 아이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내가 여러 차례 아이들에게 같이 사냥하러 가자고 했지만, 어째선지 다들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나 숲에서 사나운 들짐승을 만날까 봐 두려워하는 건 아닐까.
‘숲 깊게 들어가지 않으면 맹수들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는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탄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볍게 걸어두었다. 언제든지 사격이 가능한 상태였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나는 총 외에도 단도를 챙겼다.
수풀이 억세거나 발에 풀이 걸리면 자르는 용도의 작은 칼이었다.
이는 데클란과 케쉬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숲으로 들어간 나는 데클란과 케쉬키에게 손짓했다.
“여기서 대기하자.”
그 말을 뒤로 나는 수풀 사이로 풀썩 엎드렸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데클란과 케쉬키도 잇따라 내 옆에 몸을 숙였다.
데클란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한 내 작전은 저돌적이면서도 나름 지적이었다.
“근데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야?”
석궁을 붙든 케쉬키가 내게 소곤소곤 물었다.
“보면 몰라? 존버하고 있잖아.”
“존버?”
“대자연에 대한 존경심이 생길 때까지 버티기, 줄여서 존버. 몰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치고 버티기다.
지금처럼 이렇게 수풀 뒤에 가만히 숨어 토끼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괜히 숲속을 휘젓고 다니며 토끼들에게 ‘나 여기 있소’ 알리는 것보다 더 현명한 방법 같았다.
케쉬키는 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처음 듣는 말인데……”
“이건 시사상식이야. 공부 좀 해, 이 케쉬키야.”
그렇게 괜히 케쉬키에게 핀잔을 주고 있는데, 옆에서 데클란이 내 팔을 살짝 잡았다.
“사샤, 저기!”
데클란의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과연 수풀 너머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잿빛 털을 가진 야생 토끼였다.
번식기를 앞두고 몸집에 꽤나 불어 있는 녀석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이내 풀을 잡아 뜯어먹기 시작했다.
‘데클란의 기력 보강 원료!’
나는 토끼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탕!
내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강한 반동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미리 장전해 둔 쇠구슬이 발사되었다.
퍽!
여유 있게 풀을 뜯어 먹고 있던 토끼가 그대로 쓰러졌다.
명중이었다.
“키야, 사샤 누님! 나이스 샷!”
수풀 뒤에 쭈그려 앉아있던 케쉬키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마치 ‘부장님 나이스 샷!’하고 아부 떠는 김 대리의 영혼에 빙의된 것으로 보였다.
“대단해, 사샤!”
활과 화살을 바닥에 던져버린 데클란도 환호성을 내질렀다.
조금 전까지 무기력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상태였다.
아닌 척하고 있어도 토끼를 잡은 게 퍽이나 기쁜 모양이다.
반면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 탄총과 토끼를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