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2)화 (12/177)

12화

보여주기 싫다는데 억지로 볼 생각은 없었다.

대신 나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잘 어때? 몸은 좀 지냈어?”

“뭔 소리야?”

“아, 말실수했다.”

어찌나 마음이 성급했던지 말이 이상하게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머쓱해진 나는 헤헤,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그간 잘 지냈어? 난 네가 계속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니가 왜 걱정 해?”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둔 데클란이 반문했다.

가시가 돋친 어투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날카롭지만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내 엄마도 아니고, 왜 걱정하는 건데.”

딱 자기 보호를 위해 자라난 장미의 가시와도 같은 냉철한 목소리였다.

“음, 난 네 친구니까?”

나는 천진난만하게 그에게 답했다.

데클란은 내 말을 완전히 무시했다.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너희 부모님 밭에 가서 일 안 하고?”

“부모님이 나보고 쉬라고 했어.”

“왜?”

“며칠 전에 그런 일이 있었잖아. 그래서 내 몸을 걱정하시는 것 같아.”

“…….”

내 대답을 들은 데클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던 그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시원찮은 대답을 한 데클란은 다시 나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완전한 거절의 의미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이상했다.

나는 분명히 데클란이 나를 미워하고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선지 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단순히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내 눈앞의 데클란을 볼 때마다 계속 떠올랐다. 마차의 짐칸 위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 가여운 모습이.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먼저 행복해지기로 했다.

“같이 놀래?”

활짝 미소를 지은 내가 데클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너 제정신이야?”

내 말에 데클란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니, 이게 그렇게 짜증 내야 할 대목인가.

데클란의 반응이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그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너 항상 이래?”

“어?”

“항상 이렇게 무식하게 구냐고.”

데클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무식하다니? 무슨 뜻이야?”

“진짜 몰라서 물어?”

데클란의 언성이 더 높아졌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한 표정으로 물들어갔다.

“……따라와 봐.”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데클란은 대뜸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어라?

진짜 내 손을 잡을 줄은 몰랐던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내게서 등을 완전히 돌린 뒤였다.

“어디 가는 거야? 놀이터로 놀러 가게?”

“놀이터? 우리 동네에 놀이터가 어딨어?”

“아, 그렇네.”

내가 생각해도 참 아둔한 질문이었다.

가난과 백년해로를 맺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에 무슨 놀이터가 있을까.

“들어와.”

데클란이 나를 데리고 온 곳은 그의 집이었다.

저번에는 들어가기가 그렇게도 어렵던 공간이었다. 문 앞에 서서 데클란의 엄마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겨우 들어갔던 곳.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문턱을 넘어가고 있었다.

“너희 엄마는?”

데클란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온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불과 몇 시간 전 내게 데클란이 집에 없다는 걸 알려주었던 데클란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옷 배달하러 가셨어.”

“배달?”

“그래.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우리 엄마는 마을 사람들 옷 수선해서 돈 벌잖아.”

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소설에 그렇게 세세한 설정 따윈 다루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저 ‘데클란의 집안은 가난했다’라는 두루뭉술한 묘사로 끝나있었는데.

데클란의 집이 왜 이렇게 초라한지, 나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로 와.”

데클란이 내게 손짓을 했다.

그의 손짓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자, 저장고와 같이 생긴 작은 공간이 앞에 보였다.

“여긴 어디야?”

“내 방.”

짤막이 대꾸한 데클란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펫도 없는 맨 마룻바닥이었다.

“앉아 봐.”

데클란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머뭇거릴 틈도 없이 나는 냉큼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항상 나를 째려보며 험악한 말을 퍼붓던 아이가 이렇게 친절을 베푸니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불편해도 참아. 방석이 오래된 거라 어쩔 수 없어.”

방석?

그 말을 들은 나는 내가 앉아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나는 내 자리에 데클란이 방석을 깔아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자기는 방석 없으면서…….

“팔.”

“응?”

“팔 좀 보여줘.”

데클란의 말에 잠시 멍하니 얼어붙어 있던 나는 허둥지둥 팔을 걷어 올렸다.

소매 아래 감춰져 있던 멍과 긁힌 상처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흔적을 본 데클란이 쯧, 혀를 찼다.

“무식해.”

“뭐?”

“너 바보야? 생각은 하고 살아? 머리가 조류지?”

“갑자기 왜 시비야?”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잖아. 거기다가 나 때문에 떨어지는 충격이 더 컸을 거 아냐.”

데클란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사샤, 제발 머리 좀 쓰면서 살아. 보통 사람은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뼈가 부러져.”

“근데 난 안 부러졌잖아. 나 튼튼하지?”

내가 환한 미소와 함께 그 사실을 지적했다.

데클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았다.

“운이 좋았던 거지.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마.”

“그래도 덕분에 데클란 네가 다치지 않았잖아.”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난 네 도움 따윈 필요 없고.”

그렇게 투덜거린 데클란은 바구니를 덮고 있던 손수건을 걷어냈다.

바구니 안에 담긴 건 아직 이파리가 싱싱한 여러 가지 식물들이었다.

‘뭐지?’

보아하니 농가에서 재배하는 채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생김새가 하나같이 기묘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뭐냐고 물어보려는데, 데클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벽에 딱 붙어있는 작은 책상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내 드르륵, 소음과 함께 책상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데클란이 서랍에서 꺼낸 것은 진한 녹색의 무언가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그게 뭐야?”

내 질문에 데클란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병의 입구를 막고 있던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순간 비릿한 풀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팔 내밀어.”

데클란이 다시 내게 손짓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나는 순순히 내 팔을 다시 한번 들어 올렸다.

그러자 데클란은 병 안에 든 내용물을 제 손에 흘려보냈다.

진한 녹색의 그것은 생각보다도 더 끈적끈적했다.

느릿느릿 기어가듯 데클란의 손 위로 흘러나온 그것은 마치 응고되기 전의 연고같이 보였다.

“이거 약이야?”

“그럼 뭐로 보여?”

그렇게 중얼거린 데클란은 제 손 위에 묻은 그것을 내 팔에 바르기 시작했다.

“으앗, 차가워!”

“움직이지 마.”

무뚝뚝하게 대꾸한 데클란은 내 팔 구석구석에 약을 발라주었다. 특히 멍과 상처가 난 부위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오…….”

“마를 때까지 가만히 있어. 붓기가 좀 가라앉을 거고, 상처도 덜 곪을 거야.”

“신기하다! 우리 집에 이런 거 없는데, 고마워!”

비위를 상하게 하는 냄새와 미끈미끈한 촉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데클란이 내 피부 위에 발라준 약은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신기해하는 눈으로 내 팔에 발라진 약을 내려다보던 나는 이윽고 데클란에게 물었다.

“이거 어디서 산 거야?”

“내가 만든 건데.”

데클란이 유리병의 마개를 도로 닫으며 말했다.

“네가 만들었다고? 정말? 우와, 대단하다! 너 혹시 천재야?”

“네가 멍청한 거겠지.”

얘는 칭찬을 해줘도 꼭 욕으로 갚네.

뒤돌아오는 데클란의 말에 나는 단번에 시무룩해졌다.

역시 나중에 자기 동네 또래 놈들에게 복수할 예정인 남주다웠다. 참 뒤끝이 센 친구다.

내 사망 플래그는 도대체 언제 없어질까.

내 두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문득 내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으로 보자면 조금 진전이 있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데클란이 무려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데려왔다.

그것도 모자라 내 상처를 걱정해주며 약까지 발라줬다.

이거 완전 친구의 훈훈한 우정 아닌가?

—라고 생각하던 그때.

“너한테 맞으면서 약을 만드는 방법을 익혔어.”

데클란의 입에서 폭탄이 튀어나왔다.

“……어?”

“사샤 너한테 맞으면서 약 만드는 법 익혔다고.”

딸깍.

데클란이 유리병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사샤 너한테 매번 맞으면서, 멍이 난 부분이 너무 아파서, 살갗이 찢어진 곳이 너무 따끔해서, 숲으로 가서 약초를 따서 이렇게 약을 만들었어.”

“…….”

“너 때문에 익힌 거니까, 너 자신한테 고마워해.”

그 말을 남긴 데클란은 내게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데클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다.

그래서 더더욱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비록 내게 아무런 과거의 기억이 없다 해도, 과거의 사샤가 데클란에게 저지른 잘못이 사라지게 되는 건 아니었다.

데클란은 이미 과거의 사샤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다.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이제 너네 집으로 가서 쉬어.”

데클란은 내게 손짓을 했다. 이제 집에서 나가라는 신호였다.

나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져가.”

방을 나서려던 내게, 데클란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약이 담겨있는 유리병이었다.

“이건…….”

“하루에 두 번 정도 발라. 상처가 빨리 회복될 거야.”

“……응.”

나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데클란으로 하여금 이런 약을 만들게 한 게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내게 내미는 이 약을 거절하는 건, 그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샤.”

집 밖까지 나를 안내해 준 데클란이 내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자, 데클란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고마워.”

“……미안해.”

어떤 말을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런 지루하고도 상투적인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 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런 투박한 한 마디 뒤에 숨겨진 내 진심이, 그에게 전달되기를 빌 뿐이었다.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마음을 바로잡고 데클란에게 물었다.

“데클란. 만약에 괜찮으면…… 내일 또 찾아와도 될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갔다간 데클란과 영영 엇갈리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데클란이 마음이 열어주기를 바라며.

“내가 전에 너에게 한 일 때문에 싫겠지만, 그래도 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러니까 내일도 또 만나면 안 될…….”

“안 돼.”

딱딱한 대꾸가 거침없이 돌아왔다.

탁, 하고 맥이 풀렸다.

심장이 차가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역시나, 거절인 건가…….

“네 몸이 다 나으면.”

이어지는 데클란의 말이 내 생각을 가로막았다.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그때 다시 찾아오던가.”

“……어?”

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푹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알았어! 빨리 나을 테니까, 다른 데 가지 말고 기다려!”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싱글벙글거리며 데클란의 두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고마워, 데클란!”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거야. 너 진짜 이상해.”

그러면서 데클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그의 한숨이 예전처럼 마냥 무겁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