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대머리 남자가 휘두른 목각에 맞아 쓰러진 아빠는 맨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도 아빠의 손가락 끝이 움찔움찔 움직이고 있었다.
‘죽진 않았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내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건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또다시 실감했다. 내가 얼마나 재수가 없는 사람인지.
‘남주에게 미움받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강도들에게 잡히게 생겼다니!’
나뭇가지로 쑤셔진 개미굴을 탈출하는 일꾼개미처럼 나는 속으로 미쳐 날뛰었다.
“조금만 기다리렴, 얘들아. 곧 데리러 가마.”
킬킬거리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 남자들이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렸다.
그들은 가방 안에서 온갖 장비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밧줄부터 시작해 밧줄을 고정하는 대못, 망치, 그리고 장갑까지 하나하나 챙기는 모습을 보니 절대 초짜들이 아니었다.
직감이 말해주었다.
저 남자들이 아빠의 뒤통수를 내리친 건 결코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고.
‘아마 우리가 마을을 벗어났을 때부터 이미 우릴 보고 있었을지도 몰라.’
숲에서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차의 마부석과 짐칸의 연결 고리가 부서진 것도 이들의 탓일 게 분명했다.
“남자애는 얼굴이 반반해서 비싸게 팔리겠어.”
“그래, 여태껏 잡았던 아이들 중 제일 고와 보이네.”
“옷 좀 잘 입히면 어느 부유한 상인 집 하인으로 팔아먹을 수 있겠는데?”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올 밧줄을 고정하며, 남자들이 수치심도 없이 그런 말을 지껄였다.
그 말을 들은 데클란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데클란…….”
“…….”
내가 이름을 불렀지만, 데클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완전히 무반응은 아니었다.
곧 아래로 내려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남자들을 주시하는 데클란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그 자리에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은 피가 싹 뽑힌 것처럼 창백했다.
‘아.’
그 모습을 본 나는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난다긴다하는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이라고 해도, 지금의 데클란은 그저 또래보다 체구가 작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열 살짜리 남자아이일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 큰 성인 남성 둘을 보며 두려워하고 있는 꼬마였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데클란, 넌 미래에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낼 듬직한 호위 기사가 될 사람인데…….’
내가 아는 데클란은 불우한 가정사와 어린 시절을 모두 이겨내고 크게 성장할 인물이었다.
비록 어린 시절 정말 못돼먹은 불한당들에게 둘러싸여 괴롭고 처절한 바닥까지 떨어져 굴렀지만, 그래도 데클란은 훗날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훌륭한 남자가 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의 넌 어째서 고작 저 강도들 때문에 이리 떨고 있는 걸까.
물론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의 데클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그러니 데클란이 자신보다 덩치가 몇 배는 더 큰 두 남자를 보며 두려워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불안감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데클란을 보자, 심장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정연하고 고운 아이가, 고작 저 더러운 남자 둘 때문에 초췌하게 말라가는 이 상황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안 돼.’
내가 괜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많고 많은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서 데클란을 좋아했던 게 아니었다.
나는 모든 역경을 견뎌내고 사랑을 쟁취해낸 그가 좋았다.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 가장 높은 곳으로 나아간 그가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추악함을 똑똑히 목격하고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끝내 자신의 사랑을 선택한 그가 좋았다.
나는 그런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 짐칸에 몸을 웅크려 누워있던 그의 모습이 다시 한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보고 싶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데클란이 슬퍼하는 모습을, 나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데클란.”
내가 다시 한번 또박또박 그 이름을 불렀다.
“내가, 널 지켜줄게.”
“뭐……?”
내 말을 들은 데클란은 벼락에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는 내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추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무슨 수로 저 강도들을 이기겠다고!”
“우리는 둘이니까 저 남자들은 둘이서 같이 내려올 거야.”
내가 데클란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강을 위해 밧줄을 묶고 있는 두 강도가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하기를 바라며.
“내가 저 강도들의 주의를 끌게. 그때 넌 밧줄을 타고 위로 도망쳐. 그리고 밧줄을 끊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사샤 너 진짜 미친 거지!”
어째선지 도움을 주겠다는데 돌아오는 건 더 심해진 폭언이었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클란이 나와 두 눈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크나큰 발전이었다.
그렇게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한 나는 일부러 빙긋 미소를 지으며 데클란을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 데클란. 너도 그랬잖아. 나 힘 세다고.”
“그거야 아이치고 힘이 세다고 한 거잖아! 네가 저 강도들을 어떻게 이겨!”
데클란이 맞받아치듯 타박을 주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저 강도들이 여기로 내려와서 우릴 잡아갈 수 있도록 얌전히 기다리게?”
“차라리 나랑 너 둘이서 저 사람들에게 덤벼드는 게 더 승산이 있지.”
“그러다가 둘이 사이좋게 잡히면 어쩌려고? 내가 저 두 강도의 주의를 분산시킬 때 네가 도망치는 게 그나마 현실적이잖아.”
“멍청한 짓 그만둬. 그러다가 저 강도들이 널 어떻게 할 줄 알고!”
“너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계속되는 데클란의 지적에 내가 대뜸 반문했다.
“아까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이래?”
“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너야말로 착한 척하지 마.”
나는 데클란의 말을 완전히 잘랐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준비를 다 마친 강도들은 곧 이 구덩이로 내려와 우릴 잡으려고 할 테다.
이렇게 주둥이로 싸우며 허비할 시간이 없다.
물론 나도 데클란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무리 내가 미워도 날 버리고 자기 혼자 도망치고 싶지 않을 테다. 내가 아는 데클란은 그런 남자였다.
바보처럼 우직한 사람. 그리고 자신이 받은 대로 돌려줄 줄 아는 사람.
그래서 나는 그 점을 악용하기로 했다.
“넌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하잖아. 집도 가난해서 밥도 잘 못 먹는 주제에.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네가 뭘 어떻게 하겠다고?”
“너 말 다 했어?”
갑작스러운 독설에 데클란이 눈시울을 치떴다.
당혹감에 휩싸인 그를 나는 가만히 두지 않았다.
“짜증 나게 말대꾸하지 말고. 입 닥치고 내 말 들어.”
“너, 너어……!”
“잘 들어. 넌 솔직히 싸움도 못 하고 약해 빠졌잖아.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일부러 험한 말을 섞은 내가 밉살스럽게 이죽거렸다.
“내가 저 두 강도를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위로 기어 올라가서 마을로 뛰어가. 가서 아무나 붙잡고 도움이나 요청해. 알아들었냐?”
“…….”
데클란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굳어버렸다.
속마음이 씁쓸했다.
‘내 최애에게 이런 언어폭력을 행사하게 될 줄이야…….’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남주에게 나중에 죽임당할 운명, 차라리 노예로 팔려 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노예로 팔려 가면 적어도 죽진 않을 테니까.
그때였다.
“얘들아, 오래 기다렸다!”
휘릭, 소리와 함께 낭떠러지 위에서 밧줄이 떨어졌다.
그 뒤로 허리에 밧줄을 맨 강도들이 나와 데클란이 있는 구덩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밧줄이 들려있었다.
‘저걸로 우릴 묶고 물건처럼 운반하려는 모양이군.’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두 눈을 부라렸다.
긴장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필시 거짓일 테다.
당연히 무서웠다.
저 악한들은 내 아빠의 머리를 쳐서 기절시켰다. 그리고 우리를 잡아다 노예로 팔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 없었다.
절망이 가득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동요하는 감정을 억눌렀다.
흔들릴 수 없다.
지금 여기서 내가 흔들리면, 데클란도 흔들리게 될 것이다.
“자, 다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으렴.”
구덩이로 내려온 강도들이 낄낄 웃으며 나와 데클란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기분 나쁘게 웃으며 껄렁껄렁한 게 우리를 얕잡아보는 게 역력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저들이 방심하면, 데클란이 이곳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테니까.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데클란을 흘끔 바라보았다.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데클란은 입을 꽉 다문 채 나를 정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씩 지어 보였다.
순간 데클란의 입가 위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듯 꿈틀거렸다.
그는 내 미소를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기, 너 여자애.”
어느새 우리 앞으로 다가온 강도들이 내게 턱짓했다.
“너 먼저 이리 와 봐.”
나와 데클란 중 내가 여자라서 조금 더 만만해 보였는지 그들은 나를 먼저 골랐다.
나는 군말 없이 그들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말 잘 듣는구나. 그래, 반항해봤자 너만 아파.”
강도들이 흡족하게 웃으며 내 팔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그대로 내 팔을 묶어버릴 기세였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순순히 잡혀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