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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8)화 (8/177)

8화

데클란을 본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데클란, 여기 흙먼지가 너무 심하지 않니?”

데클란과 어떻게든 친해지려는 심산으로 내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비가 오면 좋겠다. 그러면 흙먼지가 덜 하겠지.”

“……말 걸지 마.”

그렇게 짤막하게 대꾸한 데클란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

마차가 자꾸만 덜컹거려 불편한 모양이었다.

또래보다 자그마한 체구의 데클란이었다. 게다가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잘 먹지도 못해 비쩍 마른 상태였다.

그렇게 아픈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데클란을 보자 마음 한쪽이 미어져 왔다.

그간 사샤가 데클란에게 얼마나 지독한 짓을 해왔던 걸까.

지금 이렇게 뒤늦게나마 착하게 대해주려 해도 의심을 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다니.

사샤는 어제 목검으로 데클란의 머리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다고 했다.

그전에는 분명히 더 심하게 데클란을 괴롭혔을 테다.

내가 사샤에게 조금만 더 일찍 빙의했다면 좋았을 텐데.

‘정말 불친절한 빙의 타이밍이었어.’

이 상황에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라도 데클란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단순히 사망 플래그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이 아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데클란에게 다가갔다.

“불편해?”

“네가 뭔 상관이야?”

“자.”

나는 데클란을 향해 한쪽 팔을 내밀었다.

데클란은 멍하니 내 팔을 바라보았다.

“뭐 어쩌라고?”

“내 팔에 기대서 누워.”

“……이제 와서 착한 척하지 마.”

데클란의 인상이 걷잡을 수 없이 찌그러졌다.

“정말 역겨우니까.”

심장이 차가운 물에 철렁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데클란…….” 

“잘 들어, 사샤.”

아랫입술을 꽉 깨문 데클란이 나를 노려보았다.

“난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싫어.”

“…….”

“널 증오해, 사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덜컹!

잘 굴러가고 있던 바퀴가 갑자기 날카롭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우지끈 부서지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런! 사샤야! 데클란!”

앞쪽에서 아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불안감이 물에 퍼진 물감처럼 삽시간에 내 몸을 뒤덮었다.

이상한 낌새를 차린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켜 마포를 걷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끽! 끼이익!

귀청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의 짐칸과 마부석을 이어주는 고리 쪽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음과 함께 내 몸이 세차게 뒤흔들렸다.

마차의 짐칸은 중심을 잃은 것처럼 기우뚱거렸다.

“뭐, 뭐야?”

당황한 데클란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역시 휘청거리는 짐칸 위에서 제대로 몸을 세울 수 없었다.

마차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마포 사이로 난 구멍 위로 보이던 푸른 하늘이 단번에 모래색으로 뒤바뀌었다.

짐칸 위로 쌓여있던 옥수수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필이면 옮기기 쉽게 끈으로 몇십 개씩 묶어둔 터라 무게가 제법 나가는 것들이었다.

뭉치로 묶어둔 옥수수 더미들이 순식간에 육중한 흉기로 변해 나와 데클란을 향해 덮쳐왔다.

“데클란!”

그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와 데클란을 향해 덮쳐오는 옥수수 무더기를 보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내 두 팔이 데클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를 끌어안은 나는 그의 방패가 되듯 옥수수 더미를 등지고 섰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 뒤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휘둥그레 뜨인 데클란의 두 눈동자가 다시 한번 시야에 들어왔다.

왜 자신을 감싸 안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수초의 찰나를 미소 짓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쾅!

옥수수 묶음이 내 등을 강타했다.

“아윽!”

입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고작 농작물에게 얻어맞을 뿐인데, 이렇게 아플 줄이야!

옥수수에게 두들겨 맞은 나는 뒤로 휘청거렸다. 그렇게 다시 짐칸에 내팽개쳐질 줄 알았다.

그러나 등 뒤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여전히 데클란을 끌어안은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러자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추락하고 있었다.

나와 데클란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그 짧은 몇 초의 시간이 수천 개, 혹은 수만 개로 쪼개어져 갈라진 것 같았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일이 현실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저 우스꽝스러운 백일몽처럼 느껴졌다.

이런 내 작은 소망을 비웃듯, 날카로운 통증이 내 등을 덮쳤다.

쿠쾅! 콰아앙!

귓가에 마차 짐칸이 꺾이며 들리는 소음이 크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모래 위로 그대로 처박혔다.

“악!”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번 비명을 내질렀다.

순간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등 쪽 근육이 홧홧 달아오르며 욱신거렸다.

추락으로 인해 웅웅거리는 머리는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사선으로 휘어진 시선 끝으로 옥수수 더미가 보였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데클란이 타고 있었던 짐칸은 모래 위로 처박혀 있었다.

마치 거인이 와서 짐칸을 수직으로 세워놓은 것처럼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으으…….”

신체적인 충격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만일 저 짐칸 아래에 깔리게 되었더라면, 바로 즉사했겠다.

그런 오싹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던 찰나.

“……사샤.”

가슴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클란이었다.

“아, 미안!”

그제야 아직도 데클란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허겁지겁 그를 안고 있던 팔을 거둬들였다.

황급히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근육이 찢어진 것처럼 아파졌지만, 한시라도 그를 빨리 놓아주고 싶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다는 아이의 신경을 더는 거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사샤! 아이고, 사샤야!”

머리 위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나는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낭떠러지의 끝자락에 선 아빠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두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사샤! 괜찮은 거니? 이를 어쩌면 좋아!”

“어떻게 된 거예요?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마차의 마부석과 짐칸을 이어주는 고리가 갑자기 끊겼단다! 그래서 짐칸이 갑자기! 아이고, 너 어디 다친 곳 없니?”

“네? 다친 곳이 왜 없겠어요!”

아빠의 말에 절로 그런 반문이 나왔다.

내가 떨어진 이곳은 3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깊은 구덩이였다.

다행히 바닥이 온통 고운 모래인지라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몸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모래가 쿠션 역할을 해 뼈가 부러지는 일은 없었을 뿐, 근육이 제발 몸 좀 험하게 굴리지 말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기다려라! 아빠가 곧 구해주마!”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아빠가 곧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몸 상태가 어떻든 일단 이 낭떠러지 아래에서 탈출해야 했다.

이곳에서 나와 데클란이 다시 길 위로 기어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래로 이루어진 곳이라 발로 밟고 올라갈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위에서 사다리나 밧줄을 가져다가 던져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아무래도 옥수수를 팔러 가는 데 사다리를 가지고 올 리는 없고.’

그렇다면 밧줄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아빠에게 외쳤다.

“아빠, 혹시 밧줄 없어요?”

“바, 밧줄?”

경황없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던 아빠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밧줄 던져주시면 저희가 타고 올라갈게요!”

“그, 그래! 좋은 생각이다!”

내 말을 들은 아빠가 옳거니, 하고 자신의 손등을 쳤다.

공포심에 질려있던 아빠의 얼굴 위로 조금이나마 희색이 돌았다.

“기다려라, 얘들아! 곧 당나귀 고삐를 풀어다가 밧줄로 만들어서—”

그러나 아빠는 그 말의 온점을 찍을 수 없었다.

퍽!

예상치 못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빠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픽 쓰러지는 게 아닌가.

“아빠!”

“아저씨……?”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내 옆에 서 있던 데클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야, 오늘 이거 아주 횡재했네.”

내 의구심에 답이라도 던져주듯, 자리에서 쓰러진 아빠의 뒤로 낯선 남자 둘이 등장했다.

그 둘 중 대머리인 남자 한 명의 손에 나무 목각이 들려져 있었다.

“어린아이가 둘이나 같이 있다니, 팔면 돈이 꽤 되겠군.”

두 남자는 히죽 웃으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난데없이 등장한 두 남자의 말을 듣자,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요즘 아이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먹는 나쁜 강도들이 극성이라잖아요. 조심해요!’

오늘 아침 식사 때 엄마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살려 주세요! 강도야! 사람 살려! 여기 불쌍한 아이들이 위험에 처했어요!”

강도를 마주쳤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곧바로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부디 근처를 지나가던 선한 사마리아인이 우리를 구해주기를 바라며.

그러나 내 외침을 들은 강도들은 킥킥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열심히 불러봐라, 누가 오나.”

“이 시간에 숲을 지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젠장…….’

나는 이를 꽉 악물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오늘은 주말이 아닌 평일이었다.

장터가 서는 주말이라면 모를까, 농사일로 바쁜 평일에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워낙 농업 위주로 발전한 영지였던 탓이다.

게다가 지금은 이른 아침도 아니고, 뜨거운 태양이 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 근방에 사람이 나타날 확률이 매우 적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X됐다.’

등 뒤로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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