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싸늘한 미소를 지은 내가 동네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주시했다. 그들의 얼굴을 잘 기억해두려는 의도였다.
쓰러진 케쉬키를 둘러싸 서 있던 동네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소곤소곤했다.
내가 그들과 같이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들은 쓰러진 케쉬키를 들어 올리며 내게 외쳤다.
“사샤 너 진짜! 너 갑자기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니야?”
“앞으로 너랑 안 놀 거야!”
응, 그래. 내가 원하던 바야. 장차 남주인 데클란에게 처리당할 너희들이랑 손절하는 거.
일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나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씨익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자 아이들이 단체로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히, 히이익!”
“아, 악마 같은 사악한 얼굴! 무서워!”
그렇게 아이들은 쓰러진 남자아이를 부축하며 허둥지둥 퇴장했다.
이제 이곳에는 나와 데클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나와 데클란 사이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데클란의 어깨 위에 한쪽 팔을 올린 채 그에게 친밀하게 붙어있는 상태였고, 데클란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방금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데클란.”
잠시 데클란의 안색을 살피던 나는 최대한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 으응.”
데클란이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게 독설을 퍼붓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데클란이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어깨동무를 거두고는, 이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데클란, 앞으로 너 나랑 절친이야. 베스트 프렌드. 알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우드득, 하고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방금 케쉬키란 놈을 날려버리느라 주먹에 조금 무리가 가서 관절을 풀어줘야 했다.
꿀꺽.
데클란이 마른침을 삼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호라.’
짜식, 내가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니 괜히 긴장했구나. 이 녀석 아무래도 내가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인데?
흐뭇해진 나는 다시 한번 해죽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데클란의 안색이 곧장 달라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휴, 내가 그렇게 좋은 거야?’
날 바라보며 긴장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데클란을 보며 나는 괜히 더 흐뭇해졌다.
데클란도 이제 내가 얼마나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서 쑥스러워서 쩔쩔매고 있구나.
“자, 이제 너랑 나랑 친구니까 앞으로 매일 같이 노는 거야. 알겠지?”
“으, 으응.”
“그러니까 앞으로 ‘야’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 불러, 알겠지? 내 이름 뭐라고?”
내가 데클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내 옆에 데클란이 있었다.
“사, 사샤.”
“그래, 잘했어.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내가 웃으며 데클란에게 고했다.
“우리 옆집에 사는 거 알지? 난 네가 어디 사는지 다 알고 있어.”
“……?”
“너희 집에 부엌이 얼마나 크고 가구가 몇 개 있는지 다 알고 있을 정도라니까.”
“……!”
“내가 당장 마음만 먹으면 너희 집에 들어갈 수 있거든? 우린 그 정도로 친한 거야. 알겠지?”
내가 다시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데클란의 얼굴이 싹 굳어 붙더니, 이내 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에이, 갑자기 왜 존댓말이야? 말 놔. 넌 내 절친이니까 앞으로 누구든지 널 건드리면 아주 잣되는 거야. 알겠지?”
나는 상냥한 미소를 자아내 데클란에게 선보였다.
끄덕끄덕.
데클란은 곧장 공손히 두 손을 모아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선지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여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감동한 나머지 울어버릴 지경인가 보다.
‘됐다! 이대로 사망 플래그를 그대로 없애보자! 만세!’
내 앞에 고분고분 서 있는 데클란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그렇게 빙의 1일 차가 무사히 흘러갔다.
저녁 시간.
나는 부모님과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빠가 옥수수를 팔고 번 돈으로 사 온 소시지를 냠냠 먹고 있는데, 엄마가 내게 대뜸 물었다.
“너 이제 정말 데클란이랑 화해한 거니?”
“네.”
나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말은 반만 진짜였다.
나는 내 최선을 다해 데클란에게 용서를 구했다.
물론 데클란은 아직도 내가 껄끄럽게 느껴질 테다.
솔직히 그 애가 날 용서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데클란에게 무조건 친절하게 대해주자.’
그러면 나중에 데클란이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날 살려주겠지?
그렇게 살아남을 궁리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빠가 내게 말했다.
“내일은 조금 먼 다른 마을에 옥수수를 팔러 나갈 거란다.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데클란도 같이 가도 돼요?”
나는 대답 대신 먼저 그렇게 불쑥 물었다.
옥수수를 팔러 간다면 다시 마차를 탈 것이 아닌가.
그럼 데클란에게 다시 한번 마차를 태워 줄 기회가 온다!
‘그래, 마차 태워줄 수 있을 때 무작정 많이 태워주자.’
그렇다면 나중에 데클란이 나를 죽이려고 할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잠깐 데클란! 나 어렸을 때 너한테 잘해줬잖아! 내가 널 마차에도 태워주고 그랬던 거 기억 안 나? 어릴 때 정을 봐서라도 제발……!
어쩐지 죽기 직전의 쓰레기 엑스트라가 내뱉을 법한 대사였다.
‘……이러고 보니까 나 정말 삼류 악역 같은데.’
그래도 쓰레기도 쓰레기가 되기 전에 분명히 쓸모가 있었겠지.
데클란에게 내가 조금이나마 쓸모가 있다는 점을 최대한 어필하도록 하자.
그렇게 깊은 결심을 굳히고 있는데, 엄마가 의외라는 듯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머, 웬일이니. 사샤 네가 데클란을 다 챙기고.”
“앞으로 데클란이랑 친하게 지내려고요.”
이건 온전한 진심이었다.
내 말을 들은 부모님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친구랑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 일이지!”
“내일 데클란도 불러오렴!”
그렇게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 *
나는 다음 날 해가 밝자마자 두 눈을 번쩍 떴다.
‘데클란에게 같이 마차 타러 가자고 말해야지!’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간 나는 얼굴을 씻고 양치질을 하고 머리를 빗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옷이었다.
‘이 방은 진짜 좀 청소해야겠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난장판으로 방치한 방을 살펴본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옷장 안을 열자, 쓰레기 산처럼 수북이 쌓인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소매 셔츠와 양털 코트, 긴 바지와 짧은 원피스까지.
계절에 맞지 않는 옷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있는 옷장은 난장판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제대로 보관되지 않은 옷들은 잔뜩 구겨져 주름이 가득했다.
‘옷장은 포기하자.’
나는 빠른 현장 판단과 행동력으로 다른 옷을 찾았다.
다행히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원피스 하나가 있었다.
보아하나 아마 어제 엄마가 빨랫줄에서 걷어 온 깨끗한 옷 같았다.
그렇게 옷을 대충 챙겨 입고 아래로 내려가자, 식탁 위에는 이미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 좋은 아침……”
그렇게 인사를 올리려던 찰나.
나는 식탁에 둥글게 앉아있는 이들은 엄마와 아빠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클란?”
얘가 왜 여기에 있어?
옆집에 있어야 할 애가 우리 집에 들어서 있었다.
어째서?
“엄마가 가서 데려왔단다. 아침도 같이 먹고 바로 출발하면 좋잖니.”
내 의문에 대답하듯 엄마가 느긋이 말했다.
나는 속으로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데클란이랑 같이 아침 식사요?’
최고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데클란에게 내가 착하고 친절한 아이라는 것을 어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데클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최대한 힘차고 씩씩하게, 그리고 쓸데없이 밝고 활기차게 입을 열었다.
“데클란, 좋은 아침! 어제 잘 잤어?”
“……어.”
“그렇구나. 오늘 날씨 좋은 것 같지 않아? 날이 엄청 맑아!”
“어…… 그래.”
“너도 오늘 나랑 같이 마차 타고 옥수수 팔러 가는 거지?”
“어…….”
의외로 계속해서 정상적인 답이 돌아왔다.
내 말은 그냥 깡그리 무시할 줄 알았는데.
이건 장족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
갑자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신이 난 나는 아침을 제쳐두고 데클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오늘은 이웃 마을로 가서 옥수수를 팔 거래.”
“알아.”
“그래서 어제보다 훨씬 더 오래 마차에 탈 수 있을 거야. 재밌겠지?”
그 뒤로 나는 터진 댐처럼 콸콸콸 온갖 말을 쏟아부었다.
대부분 날씨가 어쩌구, 옥수수가 저쩌구, 따위의 시시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데클란과 내가 정상적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데, 데클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사샤.”
세상에! 데클란이 내 이름을 불렀어!
감격한 나는 당장 입을 틀어막고 ‘사랑해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가진 인내심을 전부 다 끌어낸 나는 내가 자아낼 수 있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응! 왜 불러, 데클란?”
“나 조용히 밥 먹고 싶은데…….”
푹.
내 여린 심장에 화살이 다다닥 날아왔다.
“……응, 입 다물게.”
내적 출혈로 인해 시무룩해진 내가 괜히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적거렸다.
그러자 데클란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어?”
“먹을 때는 입 열어도 돼.”
“……그래, 고마워.”
그 뒤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토스트를 와작와작 씹기 시작했다.
당장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어색한 아침 식사가 끝났다.
아빠는 먼저 마차를 점검하러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남은 나는 데클란과 함께 조용히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아빠를 기다렸다.
그때 엄마가 내게 말했다.
“사샤, 넌 방에 올라가서 옷을 좀 갈아입거라.”
“네? 제 옷이 왜요?”
“얘는. 데클란이랑 마차를 타는 데 치마를 입을 거니? 어서 네 방에 가서 바지로 갈아입어.”
아하.
나는 그제야 엄마의 말을 이해했다.
괜히 원피스 차림으로 마차에 올라탔다가 바람에 치맛자락이 홀라당 올라갈 수 있으니 조심하란 뜻이겠지.
나는 잠자코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침에 내가 깨어났던 방으로 다시 돌아간 나는 온갖 잡동사니를 피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지는 도대체 어디 있지?’
나는 바지를 찾기 위해 옷장 안에 든 옷들을 전부 하나하나 끄집어내 바닥 위로 던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옷장을 뒤진 뒤에야 그럴싸한 바지를 찾을 수 있었다.
‘헉, 진짜 치명적으로 촌스러워.’
내가 찾은 바지는 골판지 느낌이 나는 빳빳한 바지였다.
바지를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참 이상했지만, 원단에 돌가루라도 섞은 건지 튼튼하긴 정말 튼튼했다.
‘이왕 빙의한 김에 나도 예쁜 드레스 입어보고 싶었는데.’
한숨을 내쉬며 옷장의 문을 닫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반짝.
옷장의 제일 구석진 곳에서 무언가 빛났다.
‘뭐지?’
옷장 문을 닫으려던 손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처음에는 옷에 붙은 장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평민이었고, 이곳은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들이 모여 사는 남작령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난 농부의 딸인데, 옷에 쓸데없이 주렁주렁 장식을 달 이유가 없잖아?’
이곳 마을 아이들은 종종 부모님을 도와 농작물을 수확하곤 했다. 그리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 반짝거리는 건 내 옷장에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호기심이 생겨난 나는 그 빛나는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어찌나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아무리 용을 써도 잘 닿지 않았다.
‘저기에 어떻게 넣어둔 거야?’
한참을 낑낑거리던 나는 결국 옷장 안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 갔다.
난잡하게 늘어진 옷들을 헤집고 옷장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손이 닿았다.
‘이건……!’
옷장 구석에 숨어있던 그것을 손에 쥔 나는 절로 숨을 거꾸로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