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내 앞에 서 있는 마차는…… 내가 상상하던 그런 마차가 아니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빙의한 대상은 황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흔하디흔한 평민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당연히 가문의 인장이 떡하니 박힌 최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마차 따윈 기대하진 않았다.
그와 더불어 실크 커튼이 달린 마차의 창문이라던가, 혹은 레드 벨벳이 깔린 바닥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뚜껑이 달린 마차일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마차냐고!’
내 앞에 세워진 그것은…… 그냥 수레였다.
“뭐하니? 어서 타렴!”
당나귀의 상태를 확인하던 아빠가 나와 데클란에게 손짓을 했다.
“…….”
나는 흐린 눈으로 아빠의 손에 들린 고삐를 바라보았다.
열정을 잃은 내 시선은 천천히 고삐가 매어진 동물을 향해 움직였다.
그곳에는 윤기가 잘잘 흐르는 말이 아닌, 어딘가 푸석푸석해 보이는 당나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비쩍 마른 게 근육은커녕 뼈가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푸르릉.”
게다가 우는 소리도 어설프다. 어디 병든 거 아닐까?
‘이런 걸 마차라고 부르다니…… 순 허위매물…….’
‘마차’라고 부르는 물건 앞에 선 내 얼굴은 초췌하게 늙어갔다.
반면 데클란의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마차다…….”
그는 마치 호박 마차를 맞이한 신데렐라처럼 두근거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소박한 마차에 감동하는 데클란을 보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드디어 로판에 빙의한 김에 마차를 타보는 건가! 하며 속으로 꺅꺅 환호성을 지르던 나의 과거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고작 이런 수레 위에 타려고 내가 빙의했나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명색이 마차면 말이 끌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속으로 엉엉 우는 소리를 내며 나는 털레털레 수레 쪽으로 걸어갔다.
“옥수수 밟지 않게 조심하렴.”
“네에…….”
나는 수레 위에 한가득 담긴 옥수수 더미를 바라보며 시무룩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아빠가 끄는 이 마차는 애초에 사람을 태우는 용도가 아니었다.
이건 밭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옮길 때 쓰는 짐수레였다.
실망감을 감추려고 노력하며, 나는 짐칸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자.”
먼저 짐칸에 올라탄 내가 데클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체구가 작은 그를 도우려는 생각에 내민 손이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가만히 내 손을 주시했다.
“뭐 어쩌라고?”
“어? 내 손 잡고 올라오라고.”
데클란의 반문에 내가 두 눈을 깜빡이며 대꾸했다.
그러자 데클란은 고개를 휙 저어버렸다.
“필요 없어.”
짐칸의 반대편으로 걸어간 데클란은 자기 혼자 알아서 짐칸 위로 휙 뛰어올랐다.
괜히 손을 내민 나만 무안하게 되었다.
‘……내가 정말 싫은 모양이다.’
큰일 났다.
내 사망 플래그, 이대로 안전하게 삭제할 수 있는 걸까?
“이제 출발한다. 마차 달리는 동안에는 자리에서 일어서면 안 돼!”
마부석에 올라탄 아빠가 나와 데클란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당나귀와 밧줄로 연결된 마부석은 우리가 앉아있는 짐칸과 고리로 이어져 있는 구조였다.
당나귀의 힘이 일차적으로 곧장 닿는 마부석과 달리, 옥수수와 우리를 싣고 있는 짐칸은 상대적으로 당기는 힘이 적게 닿았다.
덕분에 당나귀가 움직이는 동안 짐칸은 계속 세차게 흔들렸다.
덜컹, 덜컹.
이윽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아…….”
데클란의 입에서 절로 탄성 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칸 한구석에 앉은 그는 바퀴가 힘차게 굴러가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신기해?”
데클란의 맞은편에 쭈그려 앉은 내가 물었다.
이에 데클란은 나를 흘겨보더니, 대답 대신 바퀴를 향해 다시 눈을 돌렸다.
나는 데클란에게 말을 붙이는 대신 가만히 있기로 했다.
‘얜 정말 마차만 구경하러 날 따라온 거구나…….’
정말이지 데클란은 내게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
옥수수들 사이에 쭈그려 앉은 나는 퀭한 눈으로 점점 멀어지는 우리 집을 바라보았다.
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고 마차를 타겠다고 나댄 걸까…….
그러나 난 곧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기로 했다.
현실은 바꿀 수 없다. 그러니 현실을 직시하는 두 눈을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속으로 징징 짜봤자 나만 기분이 나빠지지. 그러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래. 오픈카를 탄다고 생각하자.
전생에서 타보지 못한 오픈카를 내가 지금 타고 있다! 하하하!
나는 그렇게 속으로 미친 듯이 웃으며 현실에서 도피했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안에 들어가서 옥수수만 팔고 빨리 나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아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클란은 여전히 마차와 당나귀를 빤히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나는 그런 데클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마차 한 번 태워줬으니까, 나중에 데클란이 다 컸을 때 날 족치러 오지는 않겠지?’
안일하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어? 저기 사샤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나는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샤! 뭐해?”
“우리 같이 동네 강아지 괴롭히면서 못되게 놀자!”
어디선가 나타난 동네 아이들이 데클란과 내가 앉아있던 마차로 우르르 몰려왔다.
순간 데클란이 몸을 움찔거렸다.
‘뭐지?’
이 상황이 아리송한 나는 가만히 굳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곧 데클란이 왜 바싹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뭐야, 사샤 옆에 아빠 없는 데클란 놈이잖아!”
내 옆에 서 있는 데클란을 본 동네 아이들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가서 괴롭히자! 우린 아빠 없는 애랑 안 놀아!”
“그러니까! 수준 떨어져!”
대여섯 명의 아이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이 작위적인 대사 수준 좀 보소.’
아이들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딱 들어도 저렴한 대사는 ‘저희는 악역 엑스트라 1, 2, 3 등등이에요’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데클란이 마을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고 소외됐다는 설정이 있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 노골적이잖아!’
소설에 빙의한 입장이었지만, 동네 아이들의 이런 반응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추측건대 나 역시 아마 이 아이들 패거리의 일원이었을 거다.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아이들과 함께 데클란을 괴롭혔겠지.
‘멍청한 놈들. 이게 사망 플래그를 세우는 지름길인 줄도 모르고…….’
속으로 혀를 쯧쯧 찬 나는 데클란의 앞에 서서 아이들을 막았다.
“야, 니네들 다 꺼져.”
잘 됐다. 이번 기회에 데클란 앞에서 최대한 점수를 많이 따보도록 하자.
내 말에 동네 아이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샤, 너 갑자기 왜 그래?”
“너 지금 설마 데클란 편드는 거 아니지?”
“응, 편드는 거 맞아. 그러니까 너희들 어서 꺼져.”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히 고했다.
“뭐? 사샤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 배신자!”
몰려든 동네 아이 중 가장 몸집이 비대한 남자애가 꽥 고함을 내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내가 분명히 전에 경고했을 텐데! 너도 데클란이랑 같이 죽어!”
마차 짐칸 위로 뛰어오른 녀석이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아니, 얜 또 왜 이렇게 급발진이야?’
다짜고짜 나더러 배신자니, 뭐니, 자기 혼자 발광하며 달려드는 남자애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맞을 수는 없다.
나는 엉거주춤 주먹을 들어 올려 막무가내로 휘둘렀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방어였다.
솔직히 남자애가 맞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끄앍!”
내게 달려든 녀석이 기묘한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당황한 나는 한 그루의 나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게 달려들었던 동네 남자아이는 저 멀리 날아간 채 그대로 뻗어 있었다.
녀석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동네 아이들이 기겁했다.
“죽었다!”
“사샤가 케쉬키를 죽였어!”
지금 나가떨어진 저 개새끼의 이름이 케쉬키였구나. 이름도 참 뭐 같이 지어놨네.
나는 원작 소설 작가의 작명 센스에 감탄하며 이마를 '탁' 쳤다.
“안 죽였거든? 숨 쉬고 있잖아! 쟤 배때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움직이는 거 안 보여?”
“으, 으윽…….”
내 말에 신빙성을 얹어주듯 땅 위로 쓰러진 케쉬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움찔거렸다.
다행히도 죽진 않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방금 나한테서 이런 괴력이……?’
나는 내 두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나보다 몸집이 두 배나 더 큰 남자아이를 날려버린 것이 무색할 정도로 평범한 주먹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 사실 엄청 쎈 거 아니야?’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한 데다가, 강도들을 때려눕힌 것도 그렇고.
나, 생각보다 힘이 정말 세구나?
평범한 엑스트라에 빙의한 내가 알고 보니 우리 마을 서열 0위?
내가 빙의한 몸의 체력과 지구력 그리고 완력에 대해 진심으로 고찰하고 있던 그때였다.
“사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이제 우리랑 안 놀고 데클란이랑 놀 거야?”
쓰러진 남자아이 옆으로 모여든 다른 동네 아이들이 나를 향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를 향하는 그 눈초리에는 원망과 공포감이 찌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갑자기 등을 돌린 내가 못마땅하면서도 방금 케쉬키라는 애를 날려버린 내 힘에 겁에 질린 모양이다.
이렇게 된 거, 다시 한번 확실히 못을 박아두도록 하자.
“잘 들어. 나 이제부터 너희들이랑 안 놀 거야.”
“뭐? 어째서! 사샤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랑 잘 놀았잖아!”
“왜긴. 너희들이 데클란 괴롭히니까 그렇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던 데클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친밀감을 과시하듯 그의 어깨 위로 팔을 올렸다.
데클란이 움찔거리며 굳어가는 게 단번에 느껴졌다.
‘음, 얘 눈에는 내가 아주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지겠지.’
그 심정 이해했다. 어제까지 괴롭히던 여자애가 갑자기 친한 척하다니, 조금 소름 끼치지 않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남의 웃음 소재로 전락하는 개죽음은 이제 사양이다.
“이제부터 데클란 건드리면 너네들 다 뒤지는 거야.”
데클란과 최대한 다정하게 어깨동무한 내가 동네 아이들에게 선포했다.
그 와중에 나는 한 손으로 주먹을 쥐어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무해! 우리 엄마가 폭력은 나쁜 거랬어!”
듣다못해 아이 중 한 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래. 방금 너희들 일당 중 한 명이 나한테 선빵 갈기려는 거 못 봤나?
나는 주먹을 더더욱 꽉 쥐었다.
“미안하지만 대화와 타협의 시대는 이미 끝났어. 이제부터 힘이 모든 걸 다스릴 거야.”
꼬우면 나보다 더 강해져서 오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