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올해 열 살이 된 데클란은 역시 남주답게 빼어난 외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이제 겨우 열 살짜리 남자아이였지만, 벌써 미남의 자질이 보였다.
이를테면 아직 가공되지 않은 원석과도 같이 빛나는 외모였다.
남주의 어린 시절을 보게 되다니, 난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저 얼굴 좀 봐…….’
사망 플래그의 미모를 직접 보니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생의 나는 소설 속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남주를 사랑하게 되는 여주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데클란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진짜 잘생겼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데클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과연 내가 과거에 읽었던 수많은 소설 중 가장 내 기억에 남았던 남주다웠다.
소설 속 묘사된 데클란의 머리카락 색은 갈색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건 단순히 한 가지 색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아하게 굽이친 그의 곱슬머리는 붉은 태양을 닮은 오묘한 빛을 담고 있었다. 마치 잘 손질된 보석처럼.
뿐만 아니었다. 데클란의 피부는 마치 백옥처럼 고왔는데, 이 근방에 사는 시골 마을 아이들과 다르게 귀티가 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데클란은 분명히 어제 나한테 두들겨 맞았다고 했는데, 이제 보니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운 모습이었다.
괜히 내가 터무니없는 누명을 쓴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장 옷만 갈아입히면 왕자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는데?’
데클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그런 멍청한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데클란의 미모에 대한 논문 한 편을 발표할 기세로 감격하며 그를 관찰하고 있던 그때.
“너……!”
날 발견한 데클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이, 이……!”
이, 이, 뭐? 이 곱하기 이는 4란다.
“……어머니!”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던 데클란은 이내 제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어머니! 저건 왜 데리고 왔어요?”
뭐? 저거?
졸지에 물건 취급당하는 꼴이라니.
그 한마디에 나는 표정 관리에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자아냈던 미소가 완전히 망가졌다.
“쉬이, 데클란.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어쩌니. 품위 없게.”
“당장 내쫓으세요! 전 저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데클란은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외쳤다.
퍽.
데클란이 던진 돌이 내 심장을 내리쳤다.
데클란의 미모로 인해 조금이나마 되살아났던 그를 향한 호감이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버렸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속으로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네 미모에 눈이 멀어서 잠시 잊고 있었구나……. 넌 내 사망 플래그였지…….’
데클란이 나를 대적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나를 혐오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면전에서 들으니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역시 빨리 사과하고 빌어야겠어. 내 모가지는 내가 챙겨야지.’
나는 주먹을 꽉 쥐며 데클란에게 고했다.
“데클란, 난 오늘 너에게 사과하러 왔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데클란은 알레르기 반응이라도 온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짓말하지 마! 너 저번에도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또 내 머리 때렸잖아!”
“…….”
내가 빙의하기 전의 사샤, 너 도대체 무슨 업을 쌓으며 살아온 거니…….
데클란은 마치 벌레를 보는 것처럼 나를 보며 치를 떨고 있었다.
그런 데클란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작 남주에게 이미 벌레로 낙인찍혔다면 하는 수 없지, 뭐.
다만 내가 해충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익충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도록 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은 나는 데클란을 향해 거침없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뭐, 뭐야.”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나를 본 데클란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오지 마! 또 나한테 무슨 짓 하려고!”
“얘, 지금 뭐 하는 거니!”
당황한 건 데클란만이 아니었다. 데클란의 어머니도 급히 내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높게 뛰어올랐다.
“어?”
데클란과 그의 어머니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쫓던 찰나.
착!
그대로 맨바닥에 착지한 나는 찰싹 달라붙듯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두 무릎을 모은 나는 두 손으로 바닥을 치며 데클란의 발아래 이마를 박았다.
그러고선.
“나, 네 친구가 될게!”
대놓고 데클란의 자비를 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원작에서 살아남기 위한 엑스트라의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
예고도 없이 닥쳐온 내 변화에 데클란은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에는 혼란과 당혹감이 고스란히 뒤섞여 있었다.
그 시선을 느끼며 나는 더더욱 머리를 박았다.
“앞으로 동네 애들이 너 괴롭히면 내가 널 지켜줄게.”
“…….”
“제발 마음대로 날 부려 먹어. 시키는 대로 다 할게. 그러니까 나 좀 용서해줘.”
“…….”
묵묵부답.
여전히 데클란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긴장감이 극도로 오른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저기…… 혹시 날 못 믿는 거면, 지금까지 널 못살게 굴었던 다른 애들 족치고 올 수 있는데…… 어느 애부터 잡고 올까?”
“필요 없어!”
데클란이 기겁하며 다시 한번 뒷걸음질을 쳤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두려움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래도 적어도 경멸감은 아니니 다행이었다.
“……데클란, 사샤가 이렇게까지 하니 너도 용서해 주는 게 어떠니.”
조용히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데클란의 어머니가 나섰다.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러 왔다는 점에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제 어머니의 말을 들은 데클란이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데클란은 어릴 적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자라왔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란 유일한 버팀목이자 인생의 전부였다.
그러니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서야 배길 수 없을 테다.
“……알았어. 용서하면 되잖아.”
데클란의 입에서 후, 하고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상황에 그다지 만족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좋아, 그럼 우리 오늘부터 절친인 거다?”
자리에서 냉큼 몸을 일으킨 나는 데클란의 옆을 다가가 그의 팔짱을 꼈다.
“이, 이거 놔!”
흠칫 놀란 데클란이 뒤로 몸을 빼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내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나는 더더욱 그의 팔을 더 꽉 잡았다.
“우리 이제부터 친.구.잖아, 데클란? 친구끼리 팔짱 끼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너 뭐 잘못 먹었어? 어제 숲에서 독버섯이라도 먹은 거야? 갑자기 왜 이래?”
영락없이 내게 붙잡힌 데클란이 언성을 높이며 내게 타박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상처 입지 않았다.
“아닌데? 나 지금 멀쩡한 제정신인데?”
“제정신이라고 말하니까 더 무섭잖아!”
끝내 나를 밀어내지 못한 데클란은 힘에 부치는지 숨을 몰아쉬며 소리를 질렀다.
“하아, 하아…… 넌 도대체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왜, 여자애는 힘세면 안 돼?”
“넌 여자치고 힘이 센 게 아니라 그냥 인간치고 힘이 세!”
“응, 그래. 칭찬 고마워.”
나는 데클란의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내 머릿속은 언제까지나 사망 플래그 탈출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헤헤, 너랑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너무 기뻐.”
“시끄러워! 넌 원래 나 싫어했잖아!”
“근데 이제부터 네가 너무너무 좋아졌어!”
나는 뻔뻔스럽게 데클란을 향해 헤실헤실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겨우 붙잡은 내 생명의 동아줄을 잃을 수는 없지!
나는 데클란에게 내 친절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를 더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명랑한 어조로 이렇게 고했다.
“오늘도 재밌게 놀아보자, 데클란! 어제 내가 너무 심했지? 오늘은 쌍코피가 터지지 않도록 잘 놀아줄게!”
“나, 나한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데클란은 겁이 질린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째선지 덜덜 떨고 있었다.
아차.
데클란이 덜덜 떠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내가 너무 막 행동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급히 내 팔을 거두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별거 아니야! 우리 아빠가 옥수수 팔러 마을 장터에 간다고 했거든? 너도 같이 가자! 우리 아빠 마차 태워줄게!”
그러자 데클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차를 태워주겠다고?”
“그래. 느그 집엔 이런 거 없지?”
원작 소설에 등장한 데클란의 설정을 떠올리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작중에는 어린 시절의 데클란은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왔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데클란의 집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마차조차 없었다.
나는 데클란과 친해지기 위해 그 설정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자고로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남자들은 바퀴 달린 것에 환장하는 법이다.
데클란은 마을의 또래 친구들이 부모님과 함께 마차를 타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몰래 부러워했을 것이다.
“……진짜로 마차 태워줄 거야?”
잠시 내 눈치를 보던 데클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역시나. 은근히 마차를 타보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런 데클란의 모습에 의기양양해진 내가 팔짱을 끼며 당당히 외쳤다.
“당연하지. 너 언제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맨날 하잖아. 며칠 전에도 안 때린다고 해놓고 때리고, 어제도 사과한다고 하다가 갑자기 뻥이라고 하고…….”
데클란이 가시 선 목소리로 날카롭게 대꾸했다.
이에 나는 애써 능청스럽게 핫핫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건 과거의 내가 한 행동이잖아. 그때의 사샤는 이제 없어.”
“뭐?”
“어쨌든, 가자!”
나는 씩씩한 미소와 함께 데클란을 끌고 나섰다.
* * *
“이게 누구야? 데클란 아니니?”
집으로 돌아오자, 아빠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와 데클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빠는 옥수수를 팔러 가기 위해 마차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아빠, 얘도 같이 마차 타도 돼요?”
“응?”
난데없는 내 질문에 아빠는 당황한 듯했다.
하기야.
당장 어제까지 동네 남자애를 쥐어패고 다니던 자기 딸이 대뜸 그 애를 다시 데리고 와서 다짜고짜 이런 요청을 하면 어느 부모가 놀라지 않을까.
나는 어린 소녀의 순진함을 가장하여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저랑 데클란이랑 이제부터 절친이에요!”
“그러니……?”
아빠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장마철에 화장실 벽면에 기어 올라온 곰팡이처럼 말이다.
좋지 않은 반응이다.
‘음, 너무 나댔나.’
아무래도 내가 지나치게 오버한 모양이다.
아빠는 내가 또 새로운 방법으로 데클란을 괴롭히는 게 아닐까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으음, 어쩌지?’
아빠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 내가 당황하고 있던 그때.
“얘가 아저씨 마차 태워준다고 했어요.”
내 옆에 바짝 붙어있던 데클란이 대뜸 입을 열었다.
“어? 우리 사샤가 그랬다고?”
“네. 어제 절 때린 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의미에서 아저씨 마차 타게 해준다고 했어요.”
“아하, 그렇구나! 그럼 어서 타렴. 뒤에 옥수수 밟지 않도록 조심하고!”
아빠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내가 데클란과 사이좋게 화해한 게 그저 기쁜 모양이다.
우리 아빠, 읽기 쉬워서 참 좋네.
나는 히죽 웃으며 아빠의 뒤를 따라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차가 세워져 있는 집 뒤로 도착한 나는…….
‘아니 시방, 이게 뭔데!’
……속으로 절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