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엄마의 말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데클란을 다치게 했다고? 그것도 목검으로 때려서?’
내가 엑스트라에 빙의한 건 알았는데, 설마 이런 싹수가 노란 엑스트라일 줄이야!
내가 좀처럼 대답하지 않자, 엄마는 내가 괜히 양심에 찔려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아, 사샤……. 동네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했잖니.”
옆에 있던 아빠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사샤. 네 엄마 말이 맞아. 너랑 데클란은 나이도 같은 데다가 또 바로 이웃사촌이니, 잘 지내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왜 그 애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거니?”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속으로 줄줄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운이 없어도 이렇게 지지리 운이 없을 수 있을까.
이 사샤라는 아이는 왜 가만히 있는 데클란을 괴롭힌 걸까?
도대체 왜? 왜? 왜?
머리는 이미 과부하로 터질 것만 같았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두 눈이 바람개비처럼 팽글팽글 돌아갔다.
망했다.
그냥 시골 촌 동네에 사는 평민인 줄 알았는데, 무려 남주가 있는 마을에 살고 있었다고?
게다가 남주를 괴롭히는 악역 엑스트라였어?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가낮별>에서 데클란의 동네 친구들이 어떻게 되는지 떠올렸다.
이건 원작 소설에서 데클란이 시골 마을에서 왕궁으로 떠나기 전날 밤 일일 테다.
‘네까짓 게 뭐라고 우리 마을 대표인데?’
데클란이 특수부대에 가게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동네 청년들이 그를 찾아와 시비를 털기 시작한다.
모두 데클란을 어릴 때부터 괴롭히던 불량배들이었다.
‘데클란 이 녀석, 넌 마을 대표가 될 자격 없어!’
‘어디 한 번 비 오는 날 먼지 털리게 맞아봐라!’
동네 청년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전부 악을 쓰며 데클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데클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간 숨겨왔던 실력을 드러냈다.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집단 따돌림을 당해왔던 데클란은 그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복수를 한다.
그는 동네 청년들의 이름과 그들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죄목을 하나하나 읊으며 검을 휘둘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데클란은 남주니까 미친 듯이 강했다.
아주 미친 듯이.
‘그때 동네 청년들이 전부 다 죽었다는 묘사가 있었는데…….’
등 뒤로 식은땀이 절로 나기 시작했다.
설마…… 나도 데클란을 괴롭히던 그 동네 청년 무리에 끼어있는 건 아니겠지?
“넌 어쩜 데클란만 골라서 괴롭히는 거니?”
음, 확인 사살 감사합니다.
‘망했어!’
엄마의 말을 들은 나는 고심에 빠졌다.
가만히 있자.
원작에서 불량배 놈들이 어떻게 죽었더라?
참고로 <가낮별>은 내가 nn번은 정주행한 소설이다.
하여 나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밀한 설정과 전개 구도를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었다.
‘일단 남자 청년들은 데클란의 검에 맞아서 죽고…….’
소설 속에서 데클란의 현란한 검술이 강조된 장면이었다.
데클란이 유유히 검을 휘두르자 불량배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그래, 그러고 보니.’
데클란의 복수 대상 중에 여자가 한 명 있었던 것 같다.
우락부락한 남자들 사이에 여자가 섞여 있다는 묘사가 눈에 밟혔던 게 기억이 난다.
작중에서 데클란은 그 여자를 직접적으로 죽이지 않았다.
다만 그 여자는 매우 재수 없게 죽는다.
‘……데클란이 날려버린 다른 남자 밑에 깔려서 압사당한다고 했던가?’
그랬다.
불량배 중 있던 여자는…… 데클란이 쳐낸 다른 덩치 큰 남자 밑에 깔려 죽어버린다.
그 불행한 여자로 추정된 사람이 바로 나다.
젠장.
‘왜 하필 죽어도 그딴 식으로 죽는 거야! 또 압사냐고!’
미래에 개죽음을 당할 바에야 그냥 지금 당장 죽어버리고 싶어졌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모님의 잔소리가 이어져갔다.
“사샤 넌 그 애가 불쌍하지도 않아? 안 그래도 친구가 없이 겉도는 아이인데!”
‘전 제가 더 불쌍하다고요!’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나는 사르르 증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전생 프로 로판 독자답게 나는 이미 내게 벌어질 전개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나 분명히 나중에 큰일 날 거야. 남주의 사이다 분량을 위해 나중에 분명히 참교육 당하게 될 거야!’
딱 1화 분량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삼류 조연이 나였다니!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속으로 좌절하던 그때였다.
“가서 사과하고 오렴.”
엄마가 내게 따끔하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뭐라고요?”
“가서 데클란에게 사과하고 오라고. 바로 옆집이잖니.”
“사과요?”
나는 앵무새처럼 엄마의 말을 반복했다.
이런 내가 답답한지 엄마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과하고 오렴. 데클란과 화해하고, 앞으론 친하게 지내겠다고 얘기하고 와.”
이거다!
심청과 재회한 심 봉사처럼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어머니의 제안을 묘기 부리는 물개처럼 덥석 잡아 물었다.
“할게요!”
“어?”
“가서 사과하고 올게요! 전 남에게 사과하는 거 너무너무 좋아해요! 커서 사과나무가 되고 싶어요! 제 몸에 사과주스가 흐르고 있어요! 와아아!”
자고로 빙의자의 생존 비법은 바로 신속한 태세 전환!
퀘스트를 수락했다. 남주에게 사과하고 자비를 빌도록 하자!
빠르게 마음을 고쳐먹은 나는 그런 개소리를 외치며 무작정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부모님의 말대로 데클란의 집은 우리 집 바로 옆에 떡하니 붙어있었다.
소설 속에 묘사된 대로 빨간 지붕이 달린 작은 집이었다.
데클란의 집 문 앞에 선 나는 무작정 문을 부수려는 기세로 주먹을 휘둘렀다.
—쾅쾅! 쾅쾅쾅!
아침부터 요란한 소리에 근처에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뜨끔 놀라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거, 저거! 옥수수밭 하는 댁 딸내미 아니야?”
“거참, 어린 애가 힘도 세지. 뭘 먹고 자랐는지!”
뭘 먹고 자랐긴요. 범 기운이 쑥쑥 나는 옥수수 시리얼 먹고 자랐지.
속으로 그렇게 이죽거린 나는 마을 어르신들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계속 노크했다.
사실 노크보다는 구타가 더 어울리는 동사였다.
한참 동안 쿵쿵 울리던 문이 마침내 끼이익, 하고 열렸다.
“무슨 일이니?”
문 뒤편에 나타난 이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나는 두 눈을 반짝 떴다.
‘사망 플래그의 어머니다!’
정황상 이 여자가 바로 데클란의 어머니겠지.
일단 남주와 관련된 사람에겐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예의범절 있게 허리를 90도 굽히며 인사했다.
“아주머니, 좋은 아침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아니.”
내 질문에 물음표가 찍히기가 무섭게 단번에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잘 못 지냈단다. 너 때문에.”
쾅!
그 말을 끝으로 문이 인정사정없이 닫혀버렸다.
“…….”
너무나도 빠르고 깔끔한 거절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치 발바닥 아래에 뿌리라도 돋은 듯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퀘스트의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
처음부터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할 줄이야.
화들짝 놀란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후.”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정하자.
나를 바라보던 데클란 어머니의 눈길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녀는 나를 마치 벌레 바라보듯 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어제 자기 아들을 괴롭히던 동네 꼬마가 찾아온 셈이다.
아마 지금 내가 꼴도 보기 싫을 테다.
싸늘한 그녀의 눈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나는 이내 다시 마음을 바로잡았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쿵쿵! 쿵쿵쿵!
나는 다시 한번 힘차게 데클란의 집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데클란의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홱 열어젖혔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니!”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당장 허리를 푹 숙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뭐?”
“제가 어제 데클란에게 너무 미안한 짓을 했어요!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사과라고? 니가?”
“네!”
그렇게 홍량한 목소리로 답한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데클란의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데클란의 어머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얘가 미쳤나?’라고 속으로 외치며 경악하는 것 같았다.
아직 나를 믿지 못하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나는 두 눈을 번뜩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직 열 살짜리 꼬마라는 점을 이용해 쥐어 짜낼 수 있는 순진함을 영혼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곤.
“제가 그동안 데클란에게 했쪈 일들 쪈부 다! 사과하고 시포요! 구로니까 데클란 보게 해주세욤!”
찡긋.
혀 짧은 소리와 함께 나는 일부러 몸을 배배 꼬며 살짝 윙크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데클란의 어머니에게 선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 치명적인 혀 짧은 소리와 감당할 수 없는 큐티함이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내기를 바라며.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씨알도 안 통했다.
“……재밌니?”
“네?”
“아침부터 어른을 놀려먹으니 좋니? 내 아들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나까지 농락해야 속이 시원하겠니?”
데클란 어머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당장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어, 이게 아닌데.
‘이게 왜 안 되지?’
보통 로판 소설에 보면 이렇게 태세 전환하고 개과천선하면 일이 다 잘 풀리던데?
귀여운 척하면 주변 사람들이 전부 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이쁘게 봐주고 우쭈쭈 해주던데?
당황한 나는 급히 하트 모양의 손을 치워버렸다.
대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저 정말 데클란이랑 화해하고 잘 지내고 싶어요! 데클란 괴롭히는 거 그만두려고요! 진짜예요! 그러니까 데클란 좀 보여주세요, 네?”
“하아…….”
데클란 어머니의 입에서 메마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이가 없구나. 그래도 일단, 어디 한번 들어오렴.”
데클란의 어머니는 ‘어디 네가 하는 꼴 좀 지켜보자’라는 식으로 거칠게 문을 열었다.
‘그래도 일단은 통했다!’
나는 데클란의 집 안으로 냉큼 발을 내디뎠다.
행여나 데클란의 어머니가 마음을 바꿀까 두려워서였다.
집 안으로 들어온 나는 그 안을 둘러보았다.
첫인상은 간단했다.
‘집 작네.’
데클란이 사는 곳은 내 집보다 훨씬 작았다.
바깥에서 볼 때만 해도 작고 아담한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내로 들어오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낮은 천장과 좁은 거실, 그리고 그 옆으로 딸린 작은 부엌과 방 하나.
가구는 살아갈 수 있는 정도로 최소한만 놓여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고 했었지.’
예전에 읽었던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며 집안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실에 놓인 식탁에 한 남자아이가 앉아있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자신의 책을 읽고 있었다.
참고로 책의 제목은 <왕실 기사 검법 입문서>였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군.’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내 앞에 선 데클란의 어머니가 제 아들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데클란.”
“네, 어머니.”
데클란이 천천히 책에서 두 눈을 뗐다.
그와 동시에 데클란의 얼굴이 똑똑히 내 시야에 들어왔다.
‘얘가 바로 내 사망 플래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