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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화 (1/177)

1화

그 사건이 터진 날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마을 주민 일동은 모두 주목!”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실크 로브를 입은 서기관이 쩌렁쩌렁 목청을 올렸다.

웅성거리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귀를 기울여 들어라!”

금반지로 도배된 서기관의 손에는 국왕의 칙서가 찍힌 서신을 들려 있었다.

“위대한 헤브니아 왕국을 통치하는 국왕 폐하의 전언이다!”

모두의 주목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확인한 서기관이 서신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웃 나라인 로판느 황국이 최근 군사 정비를 하는 등 기세가 심상치 않다! 언제 전쟁이 촉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전쟁!

그 단어에 마을 사람들이 서로 수군수군하기 시작했다.

태평하게 살아가든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 서기관의 말은 꽤나 자극적이었다.

당장 내 부모님도 동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들었니, 사샤? 이를 어쩌면 좋니!”

“전쟁이라니! 아직 옥수수 재배도 못 끝냈는데!”

이에 나는 부모님을 위로하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비록 서기관은 전쟁이 곧 터질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전쟁이 터질 일은 없다.

왜냐하면 두 나라는 곧 평화 협약을 맺을 계획이니까.

‘물론 나만 이런 미래를 알고 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윽고 서기관의 다음 문장이 떨어졌다.

“그러니 각 마을 마다 가장 체력이 좋고 신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대표로 선출해 왕실 특수부대로 보내도록!”

왕실 특수부대란 말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세상에, 왕실 특수부대라고?”

“그런 큰 영광을 우리 같은 평민들에게 주시겠다니!”

역시나.

서기관의 말을 들은 나는 아무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이 나라의 국왕은 전쟁을 대비하여 자신과 왕족들을 지켜 줄 소수정예의 특수부대를 꾸리고자 했다.

그런데 이 국왕은 워낙 의심이 많아 왕실 안에 있는 귀족 가문 출신의 기사들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정계에 전혀 관심이 없는 평민들을 모아 새로운 부대를 만들기로 한다.

이때 우리 마을에서 대표로 왕실 특수부대에 들어간 게 바로……

“데클란.”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훤칠한 키의 남자를 불렀다.

“왜 불러.”

이름이 불린 데클란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윤기 있는 갈색 머리카락.

차가운 냉미남의 정석대로 길게 갈라진 눈가.

잡티 하나 없이 순백한 피부.

딱 봐도 이곳 근방 시골 촌뜨기와는 다른 귀티가 철철 흐르고 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넌 왜 이렇게 잘생긴 거니.

‘역시 남자주인공 아니랄까 봐…….’

속으로 데클란의 외모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어. 잘생김이 묻었어.”

“사샤, 장난 그만 쳐. 지금 당장 우리 마을에서 왕실 특수부대에 들어가야 할 대표를 뽑아야 하는데…….”

데클란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꽤 깊은 고민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와 달리 원작의 흐름을 알고 있는 나는 속으로 느긋하게 콧노래를 불렀다.

‘뭘 그렇게 걱정하니. 어차피 네가 가게 될 건데.’

그랬다. 나는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는 이러했다.

데클란은 오늘 이 자리에서 마을 대표로 뽑혀 왕실 특수부대로 입대한다.

입대를 위해 왕국의 수도로 옮겨간 데클란은 곧 여자 주인공인 이레사 공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둘 사이로는 운명을 거스르는 뜨거운 로맨스가 벌어지게 되어있지.’

생전 소설에서 읽었던 데클란과 이레사의 연애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후후, 내가 오늘을 위해서 데클란 너를 열심히 훈련한 거야.’

말 그대로였다.

나는 8년 전부터 데클란이 반드시 마을 대표로 뽑힐 수 있도록 그를 데리고 훈련해 왔다.

체력 단련부터 시작하여, 완력 기르기, 승마 기술, 기본적인 호신술, 그리고 검술까지 같이 익혀주었다.

단언컨대 이 마을에서 데클란보다 더 뛰어난 후보는 없을 것이다.

자, 데클란. 어서 여주를 만나러 가렴!

드디어 원작의 전개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흥분한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데클란을 대표로 보내야 한다고 말하려던 찰나—

“저는 사샤를 추천합니다.”

—옆에서 데클란이 먼저 선수를 쳤다.

……어?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입을 벌리다 말고 굳어버렸다.

머리가 사고를 정지한 것처럼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이 새X가 뭐라고 한 거지.

“여러분도 알고 계시지만, 사샤는 이 마을의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체력 단련을 했습니다. 게다가 아카데미까지 졸업했지요. 완력 기르기, 승마 기술, 기본적인 호신술, 그리고 검술까지…… 전부 다 사샤가 제게 가르쳐 준 겁니다.”

야. 잠깐만. 말이 왜 그렇게 돼.

“따지고 보면 사샤는 제 스승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왕실 특수부대에 당연히 사샤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

당황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미 데클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러하군. 확실히 사샤는 힘이 참 좋지. 어렸을 때부터 아주 천하장사였어.”

“맞아. 우리 마을에서 사샤보다 더 센 청년이 있던가?”

“저기요, 여러분! 저보단 아무래도 데클란이!”

나는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보려 했지만.

“예전에 사샤가 숲에서 멧돼지를 잡아 왔던 거 기억하시나요?”

잡아 온 적 없어요! 잡으려고 했던 거지! 게다가 그때 제가 다쳤던 건 기억 안 나는 건가요?

“거기다가 저번에는 맨손으로 곰을 잡아 팼다면서요. 특수부대에 가려면 일단 기본 체력이 좋아야지!”

제가 무슨 맨손으로 곰을 팼다고! 이상한 건국 신화 지어내지 마세요!

벌써 늦었다.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도화선은 꺼질 생각이 없이 화르륵 타들어 가고 있었다.

“다른 마을에선 다 남자만 보낼 거 아니야? 그러니까 우린 좀 전략을 달리해서 사샤를 보내자고.”

“그래. 여자 병사라니, 멋지잖아. 차별성을 두는 게 좋겠어. 사샤는 분명히 우리 마을을 빛내 줄 거야.”

이 사람들이 진짜!

무슨 선발 대회 하세요? 최고의 전사를 가리는 서바이벌 게임인 줄 알아?

이게 무슨 전국 장기자랑인 줄 알고 있냐고요!

“데클란!”

마지막 구원의 동아줄을 꿈꾸며 나는 이 모든 토론의 발단이 된 데클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마을 대표로 왕실 특수부대에 들어가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네가 가야지!”

“아니야, 사샤.”

데클란이 덤덤히 함께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난 단순히 네 친구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난 사샤 네가 왕실 특수부대에 잘 어울릴 것이라고 믿어.”

믿지 마, 이 자식아!

“데클란, 그런 말 하지 마! 나 왕국 수도로 가기 싫어!”

그러나 데클란의 마음은 이미 굳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다 내린 뒤였다.

그들은 기어코 나를 떠밀어 서기관 앞으로 내보냈다.

“서기관님, 저희 마을의 대표는 바로 이 아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윽고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귀청을 때렸다.

얼떨결에 서기관 앞에 선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X발.’

망했다. 원작을 아주 국밥처럼 후루룩 말아먹게 생겼다. 

* * *

사람들은 늘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너 참 운도 없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도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묘하게 재수가 없었다.

어디 한 번 예를 들어볼까.

내가 친구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자고 날을 잡을 때마다 늘 비가 왔다.

내가 응원하는 아이돌 연습생은 매번 인기 투표에서 밀려 데뷔에 실패했고.

즐기던 모바일 게임은 1주년도 채우지 못하고 서비스 종료에 들어갔다.

동아리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은 어째선지 매번 사이비였다.

어렵게 구한 편의점 알바 자리는 늘 사장님의 폐업 통보 문자로 끝이 났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실망했고, 괴로워하며 울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우울감에 사로잡혀 지내지는 않았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드냐며 삶을 비관하지는 않았다.

내 인생이 개떡 같은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미 벌어진 일들을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만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내 생각을 바꾸도록 하자!’

그렇게 나는 재수 없는 일이 있을 때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신은 내 이러한 낙관주의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재수 없게 죽을 리가 없지.

때는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아직 복습해야 할 범위가 많이 남았는데…….’

밤새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지친 나는 카페인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도서관 내의 편의점은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건물 구석진 곳에 있는 자판기를 찾아갔다.

카드를 긁고 카페인 함량이 가장 많아 보이는 음료를 선택했다.

그런데 빌어먹을 자판기가 돈을 먹고 정작 음료는 내뱉지 않았다.

“아 씨, 내 카페인 내놓으라고!”

시험 기간에 쌓인 막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눈이 뒤집힌 나는 자판기를 쾅쾅 때렸다.

그러나 돈을 먹은 자판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꼭지가 돌아버린 나는 아예 두 손으로 자판기를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런데 조금 세게 힘들었나? 

중심을 잃은 자판기가 나를 향해 덮쳐왔다.

—쿵!

……그렇게 나는 자판기에 깔려 죽었다.

딱 개그 소재로 전락하기 좋은 죽음이었다.

젠장.

* * *

다시 두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뭐야?’

분명 자판기의 반짝거리는 버튼들을 보며 두 눈을 감았는데, 웬 낯선 천장이 보이는 거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내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패턴의 천들이 늘어진 발랄한 색상의 이불이었다.

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밝은색이었다.

‘뭐 이런 유치한 이불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애먼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러다 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다.

‘내 손…… 왜 이렇게 작아졌지?’

천천히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아담한 크기의 손이 똑똑히 느껴졌다.

“어, 어어……?”

두 눈이 절로 휘둥그레 뜨였다.

놀란 나는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다. 그러자 낯선 몸의 움직임이 생생히 느껴졌다.

“작아졌어!”

본래 성인이었던 몸이 갑자기 초등학생 정도 되는 체구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멍하니 굳어 있던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생각이 있었다.

‘나…… 빙의했구나!’

그래. 난 분명히 빙의한 게 틀림없다!

때는 대국민 빙의 시대가 아니던가.

평소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합법적으로 구매해 읽으면, 죽기 전에 읽었던 작품 중 베스트 3에 드는 작품에 빙의한다는 건 이미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낯설고 기묘한 상황에 공포감보다는 흥분감을 느꼈다.

드디어.

드디어!

나도 무료하고 지루하던 현실을 탈출해 로판 세계에 빙의했구나!

현실에 찌들어 살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구나!

“아 맞다, 거울!”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거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빙의한 것을 깨달은 이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당연히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이런 예쁜 외모의 소유자라고?’라고 놀라주는 게 로판의 정석이니까!

‘거울 속에 분명히 깜짝 놀란 만큼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새하얀 피부의 소녀가 보이겠지?’

나는 두근두근 마음을 졸이며 거울을 찾았다.

그런데 문제점이 있었다.

‘거울이 없어?’

방에 당연히 있어야 할 화장대가 보이지 않았다.

‘뭐 이런 방이 다 있어?’

마음이 급해진 나는 급히 두 눈으로 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커튼이 쳐진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촥!

침대 위로 엉금엉금 기어가 창가로 다가간 나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커튼이 막고 있던 햇살이 방 안을 침투했다.

그리고 한껏 밝아진 방 안을 본 나는.

“헉.”

숨을 거꾸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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