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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 화 (132/132)

외전 6 화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의 인생을 구원해버렸지만, 멜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헤론시가 블미에와 같은 마차를 타고 떠나기 직전에 몰래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왜 나한테 감사하지?’라고 생각하며 의아하게 넘길 뿐이었다.

뭐. 그것도 이젠 너무 예전 일이 되었지만. 물론 그날 이후로 헤론시의 얼굴을 보는 날이 잦아졌다. 거기에는 또 다른 사정이 있다…….

“엔시! 아빠라고 해봐!”

“압바!”

“한 번 더 해봐!”

“……귀차나.”

멜은 세르베인과 엔시와 함께 지내는 날들이 너무 행복했다. 엔시는 이제 제법 말도 잘하고 세르베인도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늘 제게 힘든 내색을 안 하려고 하지만 엔시가 태어난 이후, 세르베인의 몸 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멜은 잠든 세르베인의 얼굴에 키스하는 것만으로 늘 만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거야.’

멜은 괜히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괜히 거울도 몇 번이나 힐끔힐끔 바라보며 제 얼굴을 확인했다.

그때 마침 하루 종일 활발하게 움직이던 엔시가 눈을 비비적거렸다.

“압바, 나 졸려…….”

“그러니?”

“압바는 내가 졸린 게 기뻐?”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티 났을까? 혹은 반음정도 올라간 목소리에 눈치를 챈 걸까?

멜은 어색하게 웃으며 애써 아닌 척, 엔시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살짝 말을 더듬고 말았다.

“우, 우리 엔시가 많이 자고 많이 먹어야 건강해지고 쑥쑥 자랄 테니까 그런 거야~.”

“아닌 거 가타.”

멜은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엔시가 태어나기 전, 육아를 책으로 공부할 때는 ‘미성숙한 개체일 테니 그만큼 말도, 생각도 고차원적이진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키워 보니…… 상당히 영특했다. 입에 발린 말과 거짓말 따위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곤 했다.

“나 안 잘래.”

“우리 아가가 왜 심통이 났을까…….”

멜은 엔시를 안아 들고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엔시는 무엇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려고 용을 썼다. 결국 멜은 비장의 한 수를 내보였다.

“잘 자라 우리 아가~”

“노래 시러! 엄마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엔시가 다급히 외쳤지만 멜은 듣지 않았다. 엔시도 아는 것이다. 자신이 멜의 노래를 들을 때면 기가 막히게 잠든다는 것을.

멜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노래를 계속했다. 승자의 미소였다.

* * *

“다폴샤가 아딜리아에서 연락을 해왔거든. 그러느라 예상보다 더 늦어버렸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그런데 엔시는 벌써 잠들었어?”

“으응……! 열심히 놀았더니 피곤했나 봐.”

침대 위에 걸터앉은 멜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은근슬쩍 세르베인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세르베인은 제 말에서 의심할 점을 찾지 못한 듯 ‘응, 그렇구나.’라고 말할 뿐이었다.

‘사실 내가 억지로 재웠어……. 아마 내일이면 눈뜨자마자 나를 원망할 거야.’

멜은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그동안 세르베인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걸음마를 뗀 엔시는 어디서 나온 체력인지 밤늦게까지 자지 않았고, 간혹 새벽까지도 눈을 감지 않으며 멜과 세르베인 사이를 지켰었다.

세르베인은 시계를 살폈다. 평소보다는 많이 이르지만 멜이 이런 걸로 거짓말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한 세르베인은 툭, 장신구 따위를 벗어두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내일 엔시를 보러 헤론시가 오기로 했어.”

“……뭐? 왜?”

“응? 왜냐니…….”

“세르베인, 역시 그 남자가 엔시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 같아. 엔시가 너무 예쁘니까 데려가서 키우려고 하는 게 분명해! 그러니까 오게 해서는 안 돼!”

엔시가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아기일 시절, 헤론시를 왕성에서 만났을 때 가졌던 의심이 사실이었나보다.

헤론시가 헥사바임 가주를 대신해 업무차 이곳에 오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엔시를 보기 위해 온 적은 없었기에 더더욱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 남자에게는 엔시를 내킬 때 마음대로 보러 올 자격 따위 없어!’

만약 멜의 이런 속내를 알았더라면 헤론시는 억울함에 피눈물을 흘렸겠지만 멜은 개의치 않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멜의 반응과 달리 세르베인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하하, 왜 그런 생각을 했어? 헤론시가 엔시를 보러 오는 건 내가 부탁해서 그래. 엔시가 헤론시를 의외로 잘 따르잖아.”

“부탁을 했다고……? 왜? 혹시 엔시가 나랑 노는 게 이제 지겹대?”

종종 자장가를 불러주며 억지로 엔시를 재운 탓에 미움받은 걸까?

멜의 걱정이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뻗쳤다. 물론 엔시는 멜의 노래를 아주 좋아했다. 다만 자기 싫을 때는 그 노래를 들으면 저절로 잠드니까 싫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왜 잊은 것처럼…… 아.”

“응?”

“……미안해. 내가 말하는 걸 잊었어. 어떻게 바로 전날까지 말하는 걸 잊을 수가 있지. 세상에.”

무슨 이야기였기에 저렇게 낭패라는 표정을 짓는 걸까. 멜은 조금 의아해졌다. 그동안에도 세르베인은 쉽게 말을 잇지를 못했다.

“내일 그러니까…… 있잖아…….”

듣자 하니 아무래도 내일 무슨 일정을 계획해둔 모양이다. 멜은 이때까지 들은 이야기로 세르베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유추했다.

‘하루 정도 휴가를 내서 우리 둘이 놀러 가자고 말하려나?’

사실 자신은 세르베인과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기에 굳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당히 기쁜 척 반응하려 준비를 했는데 세르베인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우리 같이 바다에 가자.”

“!”

‘바다에 가자.’ 그건 멜에게 있어서 약간의, 사실은 심한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멜은 저도 모르게 사색이 되어 ‘싫어! 왜 또 나를 보내려는 거야!’라며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걸 눈치챈 것인지 세르베인이 다급히 멜을 끌어안았다.

“진정해, 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 그러면 왜…….”

“너는 바다를 그리워하잖아. 너의 고향이니까 당연히 가보고 싶었을 거야.”

“…….”

“하지만 나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바다를 언급하는 것조차 피해왔잖아. 나는 그게 마음이 아팠어. 내가…….”

세르베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던 멜이 흠칫 떨었다. 세르베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멜은 잠시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었던 것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황급히 그 품에서 벗어나 세르베인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그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내가 네게 너무 큰 상처를 준 것 같아서…… 그래서 너무 미안했어.”

아. 다정한 사람. 멜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 한마디에 혹시나 세르베인이 자신을 홀로 바다에 보내려는 걸까, 자신을 버리려는 것일까 염려했던 것이 아연해 졌다.

나는 네게 지은 죄를 전부 기억해. 그로 인한 죄책감은 당연히 평생 안고 갈 거야. 그 정도로 내가 네게 심한 짓을 했으니까.

그런데 너는 내가 네게 준 상처보다 내 아픔을 더 신경 쓰고 있었구나.

멜은 속으로 진심을 삼켰다. 그리고 세르베인을 안심시킬 수 있을 만한 반응을 보였다.

“……고마워. 내 마음을 이해해줘서. 네가 그런 제안을 해줘서 기뻐.”

네가 바란다면, 그걸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얼마든지 바다로 갈게. 물질적으로 실재하는 바다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지만 그건 언젠가 네 상처 역시 아물게 되면 그때 알려주도록 할게.

“정말? 네가 기뻐해서 다행이야……!”

멜은 눈물에 젖은 세르베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금세 안심하며 조금이나마 밝아진 얼굴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천천히 그 뺨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훑었다. 세르베인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뺨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눈에 밟혔다.

옛날에 세르베인에 제 눈물을 맛볼 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르베인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행동은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기에 애써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왜일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멜은 자신의 바다를 향해 입을 맞췄다.

나는 네 슬픔의 농도를 알고 싶어. 눈물을 흘린 것으로 네 슬픔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네 눈물을 맛보며 너의 슬픔이 어느 정도 덜어졌는지 확인할 거야.

“세르베인.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 그것만큼은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속으로 전전긍긍하며, 제가 행복하지 않을까 봐 염려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자신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염려해주는 다정함을 사랑하지만, 그로 인해 네가 불안해지는 건 원하지 않아.

“나도 지금이 가장 행복해. 하지만 네가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되돌아오는 말에 멜은 더 이상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침대 위로 쓰러지듯 두 사람의 인영이 겹쳐졌다. 이어가던 입맞춤에서 간헐적인 신음이 이어지는 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출항인데……. 괜찮을까?”

“괜찮아.”

이 상황에서도 엉뚱한 걱정을 하는 세르베인이 사랑스러웠다. 멜은 사랑하는 이의 목선에 키스를 이어가며 말했다.

“실은 네가 나의 바다가 된 지 오래니까.”

-외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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