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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화 (131/132)

외전 5 화

세르베인만 모르는 온갖 계략, 음모, 술수들이 오가는 자리였다. 고작 파티에 참석한 사람의 수는 얼마 되지도 않는데 말이지.

한 번도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걸 느껴본 적 없던 멜은 오늘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정신력이 탈탈 털리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르베인은 여전히 모른다는 점이야.’

블미에 헥사바임은 무슨 이유인지 그날 방계의 사건이 저로 인해 벌어진 일임을 세르베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약점 잡힌 느낌이라 멜은 불안함에 몸서리쳤다.

금색 날파리도, 회색의 마녀도 그렇고, 온통 불편한 사람들뿐이다. 멜은 세르베인이 차라리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령 말하자면…… 틸리타. 세르베인과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사람 말이다.

‘저 사람은 그나마 평범해 보여.’

심지어 그 여자의 딸인 다폴샤는 평범한 수준을 넘어 아주 만만해 보였다.

멜은 잠든 엔시가 깨어나 우는 탓에 사용인들이 저와 세르베인을 찾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멜의 다른 바람은 이뤄졌다. 틸리타가 세르베인에게 말을 건 것이다.

“음? 편하게 말해.”

“아딜리아로 사업을 확장할 생각입니다.”

“…….”

“그러니 그 계획에 저희를 써주십시오.”

멜은 조용히 틸리타 모녀에 관한 제 생각을 고쳤다. 이 자리에 평범한 인간은 없다. 어떤 인간이 사업을 위해 스파이 노릇을 자처하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건 세르베인 역시 저런 방식을 고려해봤다는 식으로 말을 꺼낸 것이다. 아무래도 제 사랑은 너무 냉정하고, 너무 뛰어나고, 너무…… 다정하다.

“솔직히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어. 하지만 틸리타, 그대는 이미 충분히 맡은 일이 많아. 그대가 너무 무리하는 것일까 봐 걱정돼. 그리고 이 일은 신변이 매우 위험해질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 제 딸이 갈 것이니까요.”

아니, 딸의 신변은 위험해져도 괜찮다는 거야?

이제 자식이 생긴 탓에 자식을 걱정하는 절절한 부모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 멜은 경악하며 그쪽을 바라봤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공작님!”

하지만 의욕이 가득한 다폴샤의 모습을 보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다…….

멜은 진심으로 이것이 엔시를 위한 환영 파티가 맞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답해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미친 워커홀릭들은 파티 자리에서 벌써 아딜리아 건에 대한 계획을 쭉쭉 확장시키고 있었다.

유일하게 그 모습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는 인간은 프로셴이었지만 그와 동질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멜은 세르베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세르베인, 나 잠시 어디 갔다 와도 돼?”

“어? 많이 피곤해서 그래? 이만 돌아갈까? 미안해. 많이 힘들지?”

“아, 아니! 괜찮아.”

마음 같아서는 ‘응! 당장 돌아가고 싶어!’라고 말하고 싶지만 세르베인이 이 자리를 매우 즐거워하는 게 보여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바람이나 쐬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금색 날파리가 걱정하는 척 시비를 걸었다.

“흠.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이는데 그대는 돌아가서 쉬는 게 어떤가?”

“…….”

멜은 입을 앙다물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저 남자는 세르베인의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않은 상태다. 이렇게 제가 없는 사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은가.

멜은 속으로 칼을 갈았다. 그래서 순진한 척 세르베인에게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했던 일에 대해 말했다.

“사실 아까 헤론시가 마신 차에 독이 있더라고.”

제가 일찌감치 말해서 그 남자가 독이 든 차를 마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멜은 조금 각색을 덧붙였다.

“그런데 의사도 안 부르고 혼자 끙끙 앓길래 지금은 괜찮은지 보려고.”

멜은 저를 향하는 여러 시선을 느꼈다. 블미에 헥사바임은 제 의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헤론시란 남자에게 관심 따위 조금도 없지만 그저 프로셴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걸.

사실이다. 멜은 지금 저를 향한 프로셴의 싸늘해진 눈초리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또한 세르베인의 당황한 얼굴까지도.

“일단…… 독을 마셨다면 의사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헤론시의 문제는 전적으로 프로셴의 선택에 달려있는 탓에 세르베인은 독을 사용한 자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쉽사리 프로셴을 나무라지 못했다. 그 점을 이용한 것인지 프로셴은 오히려 뻔뻔한 태도를 취했다.

“안타깝네. 하지만 그 남자를 의사에게 보일 수는 없어. 정체가 새어나갈 수 있으니까.”

멜은 기분이 나빠졌다. 생각보다 세르베인이 프로셴을 미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서 그러냐고? 아니다.

어차피 세르베인은 저 남자에게 딱히 가치 판단을 깊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은 저 남자를 골탕 먹이고, 기분을 망쳐 놓는 것에 만족한다.

지금 기분이 나쁜 건…… 그래, 인정한다. 멜은 인간 중에서는 그나마 헤론시라는 인간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는데 의사조차 못 부르게 하는 프로셴의 태도에 화가 났다.

하지만 세르베인도 프로셴의 말이 논리적으로는 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인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보도록 하지.”

블미에 헥사바임이었다.

* * *

헤론시는 저녁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람들 때문에 매우 불안하고, 불편했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다는 것은 기뻤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 없는 게, 오늘은 제 형제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날이지 않은가. 방문자 중에는 프로셴 역시도 있었다.

헤론시는 블미에 헥사바임을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 하지만 그녀가 왕성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사용인들을 통해 엿들었던 나날 중 이 사람이 저를 보러 온 적은 없었다.

어쨌든 녹시렐 공작 부부와 국왕 폐하까지 동반해서 이곳에 왔다. 저를 보고 싶어서, 라는 감정적 이유는 아닐 게 분명하다.

헤론시는 떨리는 감정을 애써 숨기고 담담하게 말했다.

“귀하신 분들을 뵙습니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확실히 안색이 안 좋긴 하군.”

“……네?”

“진찰을 시작하지.”

헤론시는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확연히 제 시선을 피하는 이는 한 사람이었다. 녹시렐 공작부군.

그때 능청스럽게 저를 걱정하는 척 말을 건네는 이가 있었다.

“독을 마셨다고 들었다. 내 성에서 그런 일을 겪게 해 미안하군.”

멜 님 덕분에 독은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은 제게 독을 준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괜-”

어쩌겠는가. 괜찮다고 말해야지. 이 정도는 그다지 큰 수모도 아니다. 곱게 독살당하는 건 어쩌면 제 운명에 주어진 가장 평안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때 저를 진찰하겠다고 앞에 서 있던 블미에 헥사바임 공작이 명치를 때리듯이 눌렀다.

“우욱! 윽……!”

“저런. 상태가 심각하군.”

아니, 공작님께서 제 명치를 때리셨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블미에의 뒤쪽에 있었기에 그녀가 제 명치를 때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멜은 옆쪽에 서 있었기에 볼 수 있을 만한 위치였다.

헤론시는 멜을 바라봤다. 그런데 분명 그 상황을 목격했을 남자는 저런, 이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세르베인. 나는…… 네 생각이 나서 아픈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

그 말을 들은 순간 녹시렐 공작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헤론시는 증언할 수 있다. 별 의욕 없이 난처하다는 기색으로 서 있기만 하던 세르베인은 순식간에 태세를 바꾸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어차피 프로셴은 블미에 외의 의사에게 헤론시를 보일 수 없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를 헥사바임 저택에 보내도록 하는 게 어때.”

“뭐?”

“네 성에서 그가 독을 마셔 유감이라고 말했잖아. 그렇다면 그를 치료해줘야 네 마음이 편하겠지.”

헤론시는 녹시렐 공작의 행동에 속으로 감탄했다. 저런 식으로 똑같이 안면 두껍게 행동해 상대방에게 얻은 것을 되돌려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아니나 다를까, 프로셴의 눈매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때 블미에가 말했다.

“나 역시 세르베인의 의견에 동의한다.”

“…….”

“애초에 헤론시를 처음 데려왔을 때 살려두도록 결정을 내린 게 너이니 이렇게 하는 편이 네게도 더 좋겠지.”

“……그래. 하지만 건강이 회복되면 돌아와야 할 거야.”

“…….”

“나는 내 형제를 매우, 아끼거든.”

아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고 하면 제 착각일까. 그의 형제, 프로셴은 웃고 있었다.

물론 헤론시는 저 웃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웃는 얼굴을 하고서 문밖의 사용인들에게 인사를 하다가도, 문을 열고 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순간부터는 태도가 돌변하던 인간이니까.

헤론시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 소리 때문에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았다.

그때와 같다. 처음 귀족들의 살롱에 갇혀, 약물로 흐린 정신 속에서 열린 문 앞에 선 회색 머리칼의 누군가를 발견한 순간.

“가장 중요한 건 당사자의 의견이겠지. 너는 어찌하고 싶나?”

무뚝뚝한 목소리. 지극히 오만하여 마치 모든 이들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투.

하지만 당신은 그럴 자격이 된다. 헤론시는 때때로 그녀가 자신의 신이라고 느낄 때가 있었다.

아니. 사실은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저는 당신을 따라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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