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화
“싫어.”
예상했지만 정말 가차 없는 거절이다. 헤론시는 허허 웃고 말았다. 멜이 왕성에 온 김에 저를 만나러 왔다는 점에서 그와 친구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너, 엔시가 너무 예뻐서 그러지?”
아이가 예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말의 속내는 ‘내 아이가 너무 예뻐서 데려가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거지?’라는 걸 알았다.
헤론시는 매우 억울해졌다. 순전히 도와주기 위해 아이를 달래봐도 되냐고 물은 것이었는데 유괴범 취급이라니. 문득 책에서나 봤던, 아주 추운 지방에 사는 펭귄이란 동물이 떠올랐다.
‘내가 펭귄도 아니고 남의 아이가 예쁘다고 대뜸 데려가서 키울 인간으로 보이나.’
보통이라면 그런 오해를 받았을 때 매우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헤론시는…… 의외로 매우 괜찮았다. 이 상황이 익숙해서 옛날 일을 떠올릴 여유까지 있었다.
‘예전에 녹시렐 공작님이 이분을 처음 소개하셨을 때도 비슷했지.’
아무리 부부라지만 이런 점까지 닮았다니. 그런 두 사람의 아이는 과연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자랄까.
먼 훗날 왕국에 지금보다 더 골치 아픈 스캔들이 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헤론시는 차를 마셨다. 정확히는 마시려고 했다.
“마시지 마.”
“……네?”
“그거 인간이 먹으면 안 되는 냄새가 나.”
헤론시는 찻잔을 든 채 우뚝 굳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멜은 종종 낯선 화법을 썼는데, 어쨌거나 그 말이 차 안에 독이 들어 있다는 의미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헤론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뒤늦게 ‘아…… 감사합니다.’라고 멜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싱긋 웃었다.
제 잔에 독이 든 걸 알게 된 사람이 저렇게나 담백하게 감사를 표하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나 멜은 그가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헤론시는 찻잔을 뒤엎지도, 사용인을 불러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다시 테이블 위에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를 가지런히 올려둘 뿐이었다.
멜은 헤론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봤다. 하지만 그에게 베풀 걱정의 말 따위는 없다. 그리고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 가능해서 놀랍지도 않았다.
‘왕이라는 남자가 저와 같은 혈통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야.’
멜은 한눈에 프로셴이 왕위에 꽤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 점에서 보면 오히려 그 남자가 헤론시를 여태껏 살려둔 게 신기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저벅저벅.
세르베인의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세르베인의 일정을 더 지연시키는 건 너무 민폐겠지. 아쉽지만 이젠 물러설 때다. 멜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엔시를 고쳐 안았다.
‘그래도 이 남자 덕에 시간을 제법 끌었어.’
그 생각이 들자 멜은 헤론시에게 약간의 호의를 베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초점 없는 눈으로 찻잔만 바라보는 헤론시에게 말했다.
“너무 떨진 마. 그 잔에 든 독, 왜인지 사람을 바로 죽일 만큼 강하지는 않았으니까.”
멜은 한동안 세르베인이 프로셴과 회포를 풀고, 프로셴이 엔시를 보며 온갖 상냥한 척을 하다가 회의가 시작될 것이라 생각했다.
업무는 뒷전일 게 분명하다. 벌써부터 사용인을 통해 마차에 실은 선물이 한가득이었다.
“네가 엔시야? 어떡해……. 너무 귀엽다.”
멜은 입을 앙다문 채 프로셴을 바라봤다. 그가 심장을 부여잡는 척을 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엔시를 바라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제 형제나 다름없는 이에게 독을 주는 인간이다. 왕족들 사이에는 흔한 일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이해할 수 없다. 절대 저 인간이 세르베인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무작정 미워하는 게 아니다. ……아마도!
‘엔시! 이참에 너도 사람 보는 눈을 기르렴. 저 인간의 선물에 기뻐하면 안 돼!’
멜은 속으로 몇 번이나 엔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프로셴이 흔드는 장난감에 이미 혼이 빼앗긴 듯한 엔시는 조금도 제 심정을 모르는 듯했다.
“꺄아!”
하지만 멜은 인정했다……. 저나 세르베인은 아이들 장난감을 고르는 데에 소질이 없었던 모양이다.
세르베인은 늘 교육적인 장난감을 가져왔고 자신은 늘 잔잔한 바다의 색감을 가진 장난감을 가져온 탓일까. 엔시는 생전 처음 보는 수준으로 화려하고 반짝반짝한 모빌 따위에 몇 번이나 깜찍한 감탄사를 뱉었다.
몇 시간이나 더 이런 상황을 참아야 할까. 멜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옆에서 세르베인이 저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런데…… 금색 날파리, 프로셴이 생각보다 일찍 엔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럼 이제 회의를 시작할까?”
업무 따위는 뒷전일 것이라고 내심 확신했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뭐지?’
멜은 살짝 의아한 기색으로 세르베인을 살폈다. 그냥 제 예상과 다른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를 바라보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세르베인은 왜인지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하지만 멜은 드물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벼락같이 떠오른 생각이 있었던 탓이었다.
‘엔시가 나를 닮아서 금방 관심이 식은 거야! 역시 아직도 세르베인을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나도 회의에 참석할 거야!”
“……뭐, 그렇게 해.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 아니었어?”
멜은 프로셴의 떨떠름한 허락에도 투기를 지울 줄 몰랐다. 그렇게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라고 해 봤자 세르베인과 프로셴, 두 사람만이 나누는 대화에 더 가깝다. 분명 느슨한 분위기에서 일이 진행되고 그 틈을 타서 프로셴이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지.
멜은 눈에 불을 켜고 회의 모습을 감시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딜리아에 첩자를 심는 방법에 대해서 말인데-”
“첩자를 우리가 양성해서 보낸다고 해도 지원자가 있을지-”
“기틀을 닦아놓는 게 중요-”
하지만 생각보다 담백하고, 정말 일과 관련된 이야기만 오가는 회의 분위기에 점점 당혹스러워졌다. 그러다 보니 서서히 프로셴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제 세르베인을 좋아하지 않는 건가? ……임자 있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는 상식 정도는 있었던 모양이지?’
드디어 세르베인을 노리던 가장 커다란 눈엣가시를 제거하게 되었다. 멜의 얼굴이 점차 생기를 되찾아갈 때 회의를 마무리하던 프로셴이 입을 열었다.
“아참. 엔시가 오는 걸 기념해서 작게 이브닝 파티를 열었어. 곧 블미에랑 틸리타도 올 거야.”
정정하겠다. 가장 큰 눈엣가시는 어쩌면 프로셴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두 사람까지 온다니 기쁘네. 꽤 오랫동안 못 봤었거든.”
역시나 세르베인은 거절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멜은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기뻐하는 세르베인에게 동조했다.
프로셴의 경우와는 다르다. 지금은…… 그 사람을 불편해하는 시늉조차 하면 안 되는 것이다.
* * *
“세르베인, 오랜만이군. 얼마 전에 왔을 때 자리를 비워서 미안하다. 방계 쪽에서 사고를 쳐서 급히 제거, 큼. 수습하느라 그랬다.”
“아니야, 이해해. 혈족들이 많으면 가문 운영이 편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봐.”
“그렇지 뭐. 아무튼 시간을 버린 것에 다시 한번 더 사과하지.”
“정말 괜찮다니까. 그 방계 쪽 인간의 문제지, 네 탓이 아닌걸.”
멜은 세르베인이 블미에 헥사바임과 인사하는 동안 딴청을 피웠다. 갑자기 악단의 연주가 너무 감미롭게 들리고, 창밖의 야경이 너무 아름답게 보이는 척 따위를 했다.
얼마 전, 엔시가 매우 울었던 이유는 세르베인이 헥사바임 저택에 다녀오느라 거의 하루 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날 업무차 그리고 사교차 헥사바임 저택에 방문했던 세르베인은 가주를 만나지 못했다.
가주가 모종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인데…… 거기에는 아무도 모를 어떤 일이 얽혀 있었다.
‘속여서 미안해, 세르베인……. 사실 그 사건 내가 일으켰어.’
멜은 속으로만 눈물을 훔쳤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당시 엔시는 저택 밖으로 데려가기 걱정될 정도로 어렸고, 둘 중 한 명은 저택에 꼭 붙어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때 저택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제가 된다. 제가 블미에 헥사바임을 만나러 헥사바임 저택으로 가는 건 말도 되지 않으니까.
멜은 세르베인이 블미에를 만나러 갈 계획을 짠 이후, 줄곧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세르베인이 헥사바임 저택을 방문할 계획을 짠 것처럼 저 역시도 계획을 짰을 뿐이다…….
제 능력을 이용해 헥사바임 가문의 어느 망나니를 홀린 후, 새벽에 사고를 치게 하는 건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인간들의 말에 의하면 완전 범죄라고들 하지.’
멜은 룰룰루, 계속 모르는 체하며 속으로는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엿듣던 대화의 어느 대목에서는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뭐, 그 덕분에 느낀 게 하나 있긴 하다.”
“뭔데?”
“널 만나려면 기습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흐르는 거야? 당연히 방계 단속을 잘 해야 한다는 말일 줄 알았더니.”
“그런 게 있다.”
세르베인은 ‘넌 여전히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이네.’라고 말하며 하하, 웃었다. 하지만 그 말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블미에는 웃지 않은 것이고, 멜은 웃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