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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화 (127/132)

외전 1 화

“추운 건 싫어. 추운 날에는 나쁜 일들만 있었으니까.”

멜은 문득 수도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나를 끌어안은 채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가만히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겨울 바다. 코끝이 새빨개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파도와 함께 몰아치는 곳. 나는 내 어깨에 뺨을 부비는 멜의 귓가에 속삭였다.

“집으로 돌아가자, 멜. 그곳은 따뜻해.”

“……응.”

“…….”

“나는 영원히 너랑 있을 거야.”

작게 속삭이는 긍정의 말은 새침하기도 하고 여리기도 했다.

나는 멜의 짙은 남색 머리칼을 봤다가, 그의 푸른 눈동자를 보았다가 이내 웃었다. 사실 늘 그랬지만, 이 순간 그가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워 보였기에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전부 푸른색으로 이루어져 있나 봐.”

멜은 내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대충 자신을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이라 받아들였는지 더 화사하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의 눈물 어린 모습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너는 알까. 나는 너의 모든 감정까지도 사랑한다는 걸. 물론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것을 더 좋아하긴 해.

나의 인어. 나의 바다, 나의 물결, 나의 푸름. 나는 마침내 너와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육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곧 수도에 도착하게 된다.

이미 한차례 겪은 적 있는 일이다. 하지만 왜 지금에서야 정말 그 저택에서 벗어난 것 같은 감격이 느껴지는 걸까.

사실은 알았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던 어두웠던 과거로부터 정말 작별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내 사랑. 영원히 함께 해줘.”

나는 멜의 목에 팔을 둘렀다. 기다렸던 것처럼 다가오는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응.”

내게 몸을 감싸오는 체온이 따뜻했다.

* * *

멜은 꽤 옛날의 꿈을 꿨다. 세르베인과 함께 이 저택으로 오던 날의 꿈이었다.

“……너무 아득해.”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 멜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 당시의 감정이 너무 생생해서 기분이 묘해졌지만, 눈을 몇 번 깜빡이니 무사히 현실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멜은 고개를 돌려 제 곁에 잠들어 있는 세르베인의 얼굴을 봤다. 세상 모르게 잠든 얼굴이 갓 자라난 산호 같았다.

촉.

잠든 뺨에 가볍게 키스한 뒤 멜은 저도 모르게 푼수처럼 웃었다. 잠들어 있는 연인이 깨서 봤다면 몇 번이고 뺨에 키스를 돌려줬을 만큼 사랑스럽게.

이후에도 멜은 오래도록 잠든 세르베인의 모습을 보며 살살 뺨과 콧등 따위를 가볍게 만져보곤 했다.

‘닿으면 부숴질 것 같아…….’

속으로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차마 세르베인의 잠든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잠든 세르베인이 너무 연약해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자는 순간까지도 흐트러짐이 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녹시렐 공작’의 모습이었다.

“사실 그렇게 옛날 일도 아닌데 말이지……. 1년도 안 됐으니까.”

멜은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한 분위기를 느끼며 세르베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혹시 깰까 봐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어제 헥사바임 저택에 방문했다가 돌아오느라 그녀도 아주 피곤했을 테니까.

“그래도 다행이야. 오늘은 네가 쉬는 날인 줄 알고 엔시가 얌전-”

거기까지 말한 순간 멜은 입을 다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듣지 못했겠지만 멜은 들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아주 익숙한 발소리가 침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딘가 힘없고 망설이는 축 처진 발소리.

하하. 멜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지만 왜인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멜은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든 세르베인이 혹시 제가 떠나서 추워할까 봐 그 몸을 이불로 돌돌 둘러주는 건 이제 습관이 되었다.

끼익,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면목 없어 하는 사용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초췌해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익숙한 패턴이고 예상한 일이다. 옛날에는 사용인들 한명 한명이 불편하고 껄끄러웠지만 이제는 제법 친근하게 그들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멜은 이제 이들이 아주 소중한 존재임을 알았다.

“세르베인은 아주 피곤한 상태야. 그러니까 깨우지 마. 엔시아레는 내가 혼자서 돌볼 수 있어.”

멜은 호기롭게 말했지만 왜인지 저를 바라보는 인간들의 눈빛이 불신이 어려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무시하고 씩씩하게 사랑스러운 세르베인과 저의 아이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으애애앵!”

음…… 엔시아레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어딘가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는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용인들이 열심히 아기의 앞에서 모빌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아기 침대를 살랑살랑 흔들기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엔시.”

멜은 다정하게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아 들었다.

남색 머리칼의 남자아이는 눈물 어린 호박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잠시 울음을 멈췄다. 덕분에 멜은 용기를 내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엔시, 아빠가 왔어.”

하지만 울음을 잠시 멈췄던 것은 상대가 누구인지 탐색하기 위한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엔시아는 이내 다시 으애앵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도 이젠 익숙해. 난 무려 두 달간 엔시를 돌봤는걸.’

멜에게는 약 두 달이라는 ‘육아 경력’이라는 것이 쌓였다. 그래서 이제는 이 상황에서 조금 더 전문가답게 행동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으아앙!”

하지만 제 품 안에서 이리저리 바둥거리며 서글프게 우는 아이를 보니 울컥,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멜은 아이를 꼭 안은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에, 엔시야…… 나, 나는…… 아빠야…….”

“우아아앙!”

“나 이제 제법 능숙한 아빠야…… 그러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흐윽!”

살짝 들썩이는 것 같던 어깨는 이제 눈에 띄게 흔들렸다. 사용인들은 일제히 흔들리는 시선을 하고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공작님을 불러오자.’

슬그머니, 문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더니 이 방에 있던 모두가 마음속으로 떠올리던 존재가 나타났다.

“저런…….”

녹시렐 공작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 * *

객관적으로 보자면 엔시아레는 아주 얌전한 아이였다. 우는 일이 드물었고, 늘 방긋방긋 웃던 천사 같은 아이였다. ……처음에는.

세르베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우는 일이 매우 드물었던 아이가 본격적으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한 건 아무래도 계기가 있었으리라.

“멜.”

“응?”

멜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톡톡 닦으며 세르베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엔시는 세르베인의 품에서 울음을 멈춘 뒤, 다시 요람에 누워 방긋방긋 웃으며 팔다리를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멜은 여러 걱정들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 미움 받고 있는 거야?’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똑, 떨어지기 직전에 세르베인이 말했다.

“내 생각에 엔시가 우는 건 이유가 있는 듯해.”

“역시 내가 싫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분명 어제는 나 혼자 돌봐도 괜찮았어.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너의 대용품이었던 걸까? 잠시 참아줄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걸까……?”

가련하게 떨리는 속눈썹이 안쓰러움을 더욱 증폭시켰다. 세르베인은 멜을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그런 거 아니야. 저번 주에는 반대의 경우가 있었잖아.”

“반대의 경우?”

“내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는데 네가 나타나니까 엔시가 웃었잖아.”

“아.”

멜은 저번주의 일을 기억해냈다. 이제 사람들이 제게 홀리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게 된 멜은 세르베인을 도와 공작가의 업무를 해내곤 했다.

그중에는 공작 부군으로서 참석해야 하는 사교 모임들이 있었다. 웬만하면 저택 밖으로 나서야 하는 모임 따위는 전부 불참하고 싶었지만 몇몇 사교 모임은 참석하는 편이 좋았다.

그래서 거의 하루 정도를 저택을 비웠다가 돌아온 날이었다. 그때 멜은 울고 있는 엔시를 달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세르베인을 목격했다.

“그러면 우리 둘 중에 하나라도 안 보이면 우는 거야?”

“대충 하루 정도는 참을 수 있는 것 같아.”

멜은 세르베인의 생각이 맞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엔시아레가 예전보다 많이 울기 시작한 시기가 세르베인이 건강을 회복하고 조금씩 공작가의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야! 내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었어!”

“음. 그렇지. 그런데 나는 네가 곤란해할 줄 알았는데 괜찮아?”

“당연히 괜찮아! 난 오히려 좋아!”

세르베인은 멜이 ‘어떻게 한시도 안 떨어질 수가 있겠어…….’라며 걱정하는 모습을 상상했건만 연인의 반응은 제 예상과 어째 매우 달랐다. 세르베인은 다행이라 여기며 ‘나도 좋아.’라고 말한 뒤 웃었다.

그 순간 멜은 세르베인이 저의 속내를 알아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자 기분이 조금 씁쓸해질 뻔했지만 이내 세르베인이 좋아하는 특유의 헤프고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엔시를 데리고 세르베인을 늘 따라다녀야겠어!’

가뜩이나 점점 왕성에 세르베인이 방문하는 날들이 많아질 것 같아서 불안하던 참이다. 멜은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세르베인을 지켜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세르베인을 홀로 보내야 했지만 이제는 따라다닐 확고한 명분이 생겼어……!’

인간이 된 인어는 여전히 프로셴이라는 금색 날파리를 경계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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