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 화 (126/132)

126 화

멜은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묘하게 동공이 풀린 눈동자는 나를 이미 바다로 데려간 미래를 상상하는 듯 행복해 보였다.

……자칫 잘못하면 이대로 바다에 끌려가게 생겼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멜, 네가 지금 간과하고 있는 게 있는데 사람은 바다에서 못 살아.”

“왜? 숨 쉴 수 있잖아.”

“바닷속은 너무 추우니까.”

인간은 숨만 쉰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체온 유지가 안 되어도 죽는다.

아주 잠깐 바닷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건 괜찮겠지. 하지만 멜이 바라는 것처럼 오래오래 그곳에서 사는 건 불가능하다.

아주 옛날, 불이 난 숲에서 호수에 빠진 나를 구하기 위해 멜은 제 몸을 불에 노출 시켜 뜨겁게 한 뒤 나를 끌어안지 않았던가.

즉, 그도 인간은 체온이 높은 편이며, 체온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은 알고 있다.

‘다만 지금은 그걸 잊어버릴 정도로 정신이 없는 거야.’

내 말에 멜이 ‘아.’하고 작은 탄성을 냈다. 그는 이내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 틈을 타 외풍이 흘러 들어오는 듯한 대문 근처를 벗어나기로 했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기지 않을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은근슬쩍 로비로 끌고 갔다. 멜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반강제적으로 그를 소파에 앉게 하려 했지만 멜은 앉지 않았다.

그는 줄곧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치 내가 바다에서 잘 살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눈은 꽤 몽롱해 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저런 상태의 멜을 자극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바깥이나 안이나 얼어 죽겠군.’

나는 팔을 쓸어내리며 열을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문득 벽난로가 눈에 밟혔다.

어째서인지 벽난로에는 오래된 듯 먼지가 가득 쌓인 장작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저걸 사용할만한 이는 없었을 텐데도.

‘아무튼 잘 됐어. 불이라도 붙여야지.’

내가 걸음을 옮기자 멜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세르베인. 어디로 가려는 거야?”

“벽난로에 불 지피려고.”

“추워?”

멜이 허둥지둥 내게 둘러줄 담요라도 찾고 싶은지 두리번거렸다. 이제서야 인간은 추워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린 탓인지 무척 당황한 게 보였다.

하지만 이곳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나는 적당히 그를 무시하고 벽난로로 다가가려는데 멜이 또 울먹였다.

“그 남자한테 가려는 거야?”

“아니라고 했잖아…….”

“……못 믿겠어.”

“그러니.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믿을 수 있을까?”

“왜, 왜 그런 말이 나왔어?”

기다렸다는 듯이 멜이 다급하게 물었다. 얼마나 머릿속에 맴돌았던 생각이었는지, 주어조차 가뿐하게 생략해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프로셴과의 결혼 스캔들임을 알아챘다.

역시 멜은 내가 프로셴과의 결혼을 거절한 것으로 안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냐’는 것이 문제의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누구나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 그랬냐면…… 어…….”

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전혀 숨길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게다가 멜에게 떳떳하지 않은 이유도 전혀 아니었기에 나 스스로도 이 느낌이 당황스러웠다.

이 상황에 조금 어울리지 않은 감정일 텐데…… 조금 불편하고 뭔가 속에서 올라올 것 같은 메스꺼운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이 침묵을 유지할 수는 없어서 떠듬떠듬 말했다.

“그…… 지켜야 하는 게 있었어.”

“뭔데?”

순간적으로 스친 멜의 상처받은 눈빛을 보니 그가 대충 짐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녹시렐 가문이나 나의 명성, 혹은 프로셴의 안위 따위겠지.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나 말이 안 떨어지지?’

나는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냥, 말을 꺼낼 상상만 해도 목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답지 않게 택한 방법은 회피였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아니. 지금 말해줘. 나를 배신할 만큼 그게 소중했어?”

그런데 멜이 내 예상과 달리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내가 당황하는 기색을 그대로 보이자 더욱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세르베인.”

저벅저벅.

그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벽난로로 향하려던 것도 까맣게 잊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문득 멜이 일부러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푸른 눈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더 이상 걸음이 옮겨지지 않았기에.

“날 봐…….”

멜이 내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나는 숨도 멈추고 그 얼굴을 바라봤다.

“무엇을 그렇게나 지키려고 했어……?”

은근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가 인어의 능력을 사용하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미인계라니. 그 교활함과 영악함에 말을 잇지 못할 때 그가 가볍게 내 아랫입술을 물었다.

“읏…….”

멜은 내 한쪽 뺨에 조심스레 손끝을 대 내가 그 키스를 피하지 못 하게 했다. 어차피 나는 피할 생각도 없었는데.

마주치는 눈매가 매혹적으로 휘어지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집요한 눈동자는 내게서 꼭 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촉.

가볍게 입술이 떨어지고,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가 점점 내게 몸을 붙여왔다. 나는 원인도 모르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그를 피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멜의 의도였음을 곧 깨달았다.

툭.

무언가에 막혀 더 이상 후퇴가 불가능했다. 거실에 놓여 있던 소파에 가로막혔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멜은 부드럽게 나를 소파 위로 무너뜨렸다.

“잠, 잠깐만…….”

나는 뒤늦게 멜을 밀어내려 했지만 다 잡은 고기를 놓칠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멜은 화사하게 웃으며 잘못 들은 척했다.

“응. 나도 좋아.”

‘아니, 내가 언제 좋다고 말했니……?’

황당해서 입을 살짝 벌린 채 뭐라 말도 못 했다. 그러자 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얼마나 소중하기에 말을 안 해?”

“아니, 내가 딱히 집념을 가지고 숨기려는 게 아니라-.”

멜은 제 얼굴에 내가 홀리지 않으니 심통이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충분히 홀린 상태라서 더 안 홀리는 게 아닐까?

멜은 일부러 내 말을 끊으며 다시 입 맞췄다. 아무래도 그의 성격이 조금 막무가내가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아주 과거의 그의 순진한 모습이 떠올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세르베인…….”

줄곧 내 얼굴, 팔만 만지던 그가 손의 위치를 점점 옮기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랐지만 멜은 단순히 내가 그의 손길에 느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몽롱하게, 약간 늘어뜨리는 듯한 말투로 속삭였다. 누가 봐도 강박적이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속삭임이었다.

“네가 이렇게 말해주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안심을 하고 너를 믿어줄 수 있어? 나 너무 서운해……. 하지만 네가 너무 좋아서 너를 놓아줄 수는 없어. 너도 이해하지? 응…… 고마워. 그냥 바다로 가자. 일단 들어가면 방법이 있을 거야…….”

“아니, 무슨 대책 없는 소리야! 그리고 말할게! 말한다고!”

“난 죽어도 네 곁에서 죽고 싶었어……. 넌 나를 사랑하니까 나랑 똑같이 생각하겠지. 걱정 마, 세르베인. 만약 네가 죽는다면 나도 그 옆에서…… 어?”

“…….”

멜의 손길이 뚝 멈췄다. 갑자기 덜덜덜 흔들리는 그 물빛 눈동자를 보니 딱 봐도 원인이 짐작됐다.

들켜버렸다. 아니…… 애초에 그의 아이니까 숨길 이유도 없는데 말을 못 한 내가 이상했지.

하지만 이런 낯간지러운 일은 내 인생에 있었던 적이 없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그 이유였다.

“세……르베인?”

그가 내 배를 살며시 문지르더니, 내 체형을 가리던 두꺼운 코트의 단추를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그 손이 정말 비정상적으로 심각하게 떨려서 조금 걱정될 정도였다.

“너…… 혹시…….”

그가 저렇게 떠는 모습을 보니 나는 이상하게도 조금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역시 나보다 더 긴장한 상대를 보면 긴장이 조금 풀리는 모양이었다.

내 코트 자락을 쥔 채 멜이 석상처럼 굳었다. 어디, 조각상이라도 되시는 거냐고 조금 장난을 쳐볼까 생각했다. 그때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프로셴 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하지만 다행히 나에 대한 멜의 신뢰가 그 정도로 바닥을 친 건 아닌지 기쁨 섞인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그때 네가 우리 아이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떡해……!”

오히려 그는 내 상태를 보자 구체적으로 언제 아이가 생겼는지 시점까지 짐작되는 모양이었다.

‘혹시 계획한 건 아니겠지. 음…… 아무래도 그건 과한 짐작이야.’

솔직히 멜은 그쪽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오히려 어느 정도 의도한 쪽은 나였다…….

“세, 세르베인…… 나, 꿈꾸는 거면 어떡해……?”

어느새 내 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툭 건들면 울 것처럼 울망울망 했다.

나는 왜인지 푸스스,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은 채 그 뺨을 훑으며 조금 짓궂은 대답을 했다.

“꿈이라고 하면?”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리고 왜 나한테 바로 말 안 했어? 나 나쁜 아빠가 될 뻔했어……!”

내가 닦아주는 걸로 감당이 어려울 만큼 흰 뺨에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눈물 닦아주는 걸 포기하고 그 혼비백산한 얼굴을 감상하며 답했다.

“말하려고 했는데, 뭐랄까…… 말이 안 나왔어. 이제 결론을 내리는데 조금 쑥스러웠나 봐.”

“세상에! 그게 말이 돼? 얼마나 기쁜 일인데 왜 쑥스러운 거야. 넌 이상한 데에서 삐걱거려!”

멜이 기함했다. 나는 그의 울면서도 황당해하고, 그동안 내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것에 속상해하며 동시에 내 반응을 수긍하지 못하는 그 일련의 반응들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냥, 내 인생에서 이런 개인적인 일로 축하를 받은 적이 없어서 그런가.”

“…….”

“네가 기뻐할 걸 생각하니까 왜인지 말이 안 나왔어.”

멜이 입을 다물었다. 차츰, 옅어지는 듯했던 눈물샘이 다시 퐁퐁 샘솟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건 아껴보고 싶었어.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까.”

“……그러지 마.”

그 순간 멜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몇 번이고 다짐하듯 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늘 네 옆에서 행복해하는 모습 보여줄게. 그리고 너도 행복하게 해줄 거야.”

“응. 나도 그렇게 할게.”

내 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멜이 내 눈가에 입을 맞추며 간지럽게 속삭였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상투적인 대답일지 모르지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같은 말을 수십 번도 더 서로에게 속삭였다.

그간의 아픔이 그 한 단어가 반복됨에 따라 서서히 사라짐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그저 소유하고 싶었던 애정에서 상대의 행복을 바라게 된 소녀는 드디어 함께 행복해지는 법을 찾아 어른이 되었다.

소녀는 제 호수에 가두었던 인어를 마침내 얻었다고 생각했다.

반대의 경우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인어가 소녀를 줄곧 제 삶에 묶어두고 있었다는 가능성 따위를.

호수에는 여전히 유해가 남아 있어. 그것이 존재하는 이상 세르베인은 영원히 나를 떠나지 못해.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 인어는 생각보다 더 끈질겼고 치밀했다. 하지만 어차피 인어가 사랑하는 여자의 귀에는 진실이 닿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인어에게 홀렸으니까.

-본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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